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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10월~20년11월

(제8호)

mediaJournal - buddhaRoad

우주가 주는 힌트

     

 

 

 

 

뿐만 아니라 우주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대상을 관찰하는 주체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대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안목의 전환을 가능케 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주에 대한 인식이 명백한 사실로서 검증되기 이전에는 인류가 그 모든 일의 주체와 중심이었지만, 이 엄청난 우주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부터 지구나 인류는 이 거대한 허공에서 드러난 하나의 대상이자 객체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주체의 입장에서 대상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의 관점에서 나를 객체처럼 바라보는 것이 수행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우주로 향한 인식의 확장이 불교의 가르침과 상당부분 상응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나라는 중심과 대상이라는 바깥 경계, 그리고 생각이라는 방식을 기본의 인식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나를 향한 중심성을 탈피하여 전체성으로서의 안목을 갖추는 것이 수행의 미덕이라 여기고 있고, 존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 전체는 곧잘 허공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전심법요>에서 황벽스님은 법신과 허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부처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하는데 이는 비유이다. 법신(法身)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바로 법신인데, 보통 사람들은 법신이 허공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면, 허공 가운데 법신을 포용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법신이 바로 허공이며 허공이 바로 법신임을 모르는 것이다...’

법신은 모양도 없고, 생각도 없고, 인연에 의지함도 없기 때문에 법신입니다. 이는 곧 법신이 모양 이전의 일이며, 생각이 벌어지기 전이며, 의지함 이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양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의지함도 없는 이 법신을 말로써 설명하기 힘들기에 많은 깨달은 이들은 이 법신을 곧잘 허공에 비유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허공은 모양도 아니며 생각도 아니고 의지함도 아니지만, 그 모든 모양과 생각과 의지함이 이 허공의 성품을 바탕으로 해서 벌어지고, 또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허공은 그 어떤 틀로도 규정할 수 없는 전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봄의 연둣빛 잎들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이나, 계곡의 물이 흘러가는 소리나, 봄햇살을 쬐며 기분이 상쾌해지는 일들은 분명하게 벌어집니다. 얼핏 보면 이러한 감각과 생각의 일들은 라는 중심에서 느껴지고 인식되는 일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허공이라는 바탕에서 라는 조건과 인연을 통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수행은 견고한 중심이나 절대의 실체처럼 여겨지는 를 하나의 인연에 따른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흐름으로서 익숙해지는 과정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라는 작은 중심에서 전체라는 큰 바탕으로 인식의 기반이 옮겨지는 일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역시도 생각 되어지는 것입니다. ‘역시도 조건의 드러남이며 인연의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루게 될 때, 우리는 나와 대상이라는 좁은 안목에서 전체와 드러남이라는 거대한 안목으로의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와 드러남이라는 안목을 갖추게 된다면, 여러 조건과 인연에 상응해서 모든 존재들이 제각기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며 흘러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함을 불교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했습니다. 진공(眞空)이란 규정할 수 없는 전체로서의 배경이자 바탕이고, 묘유(妙有)는 여러 인연과 조건들이 신비하게 모여서 드러나게 되는 작용을 뜻합니다. ‘나와 대상이라는 실체감 중심의 좁은 안목에서는 소유와 집착에 얽매여 끊임없는 고통들이 양산됩니다. 그러나 전체와 드러남이라는 머뭄이 없는 안목에서는 다양하게 펼쳐지는 인연에 상응하면서 집착없이 흐르고 각자의 인연에 알맞게 노릇할 수 있게 됩니다. 진공와 묘유는 서로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양상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드러나지만 전체를 떠난 적이 없고, 전체이기에 그 모든 인연에 따른 드러남을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우주로 검증되는 사실은 삶의 거대한 힌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밤이든 낮이든, 우리는 이미 우주 안에 있습니다. 이를 허공이라고 해도 됩니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밤이든 낮이든, 우리는 이미 허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체를 그 어떤 단 한 순간도 떠나거나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몸뚱어리와 생각에 들어앉아 갇혀 살게 되면서부터, 분리의 고통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에 대한 면밀한 성찰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주가 주는 힌트를 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은 새벽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으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지 눈으로 새벽별만 보신 게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으로도 닿을 수 없는, 허공과 같은 전체라는, 본래 항상 있어왔던 법신의 자리로 곧장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라는 것은 말하거나 생각하기 이전에도 이미 분명했던 그러한 곧장입니다. 선문(禅门)에서는 곧장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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