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거나, 절의 종소리, 죽비 소리, 일출 장면 등을 보고 갑자기 뒤집어진다고 오해를 하지만 그런 현상은, 가랑비에 옷이 꾸준히 젖어 가다가 어느 순간에 옷이 흠뻑 젖은 것을 알게 되는 계기일 뿐입니다.
세계관이 뒤집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게 되었다는 것은,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정보가 추가되는 현상이 아닙니다. 훈련을 통하여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현상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관이란 무아와 연기입니다. 본글을 쓰는 의도를 담아서 간명하게 설명하자면 '나는 죽었다'입니다. 세계의 주인인 줄 알았던 '나'는 착각일 뿐이고 연기의 현상으로 온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무아와 연기를 바르게 이해하였다는 것은 '나'가 망상임을 알았음에도 심리적으로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없음'을 '나'의 의식이 저항 없이 수용하기에 가능한 현상입니다. 이런 일은 논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힘의 변화로 일어납니다. '나 없음'이 주는 안도감의 힘이 생각의 힘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이해하더라도 안도감의 힘이 없다면 여전히 망상 안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도감을 키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깨달음(悟)이 일어나거나 안도감의 힘이 생각을 앞서는 일은 어떤 한순간에 홀딱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꾸준히 진행되는,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슬비가 내리는 마당에 접시를 두고 빵을 하나 올려놓습니다. 빵은 서서히 젖어 들어갈 것인데, 그 빵은 어느 순간부터 비에 젖은 것일까요? 특정 기준을 정하여 판단하는 것은 그저 특정의 목적을 위한 편의일 뿐입니다. 빵에 이슬비가 처음 떨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습도 100%가 되는 과정의 어떤 시점에서도 빵은 젖은 것입니다.
돈오도 이와 같아서 어떤 상태를 기준 삼을 수 없습니다. 뒤집어진 세계관으로 확철되고 보림까지 끝난 뒤를 돈오라고 한다면 돈(頓)은 전통적인 해석인 '갑자기'라는 의미보다는 '꺾이다, 가지런히 하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도감의 힘이 조금씩 확장될 때마다 문득문득 깨달음의 여러 경계를 체득하게 되므로 그중에 특정의 경험만을 돈오라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안도감이 형성되고 무아와 연기가 선명하게 이해된, 그래서 돈오의 과정에 들어선 도반에게는 깨어났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런 자기 선언이 생각의 힘을 더욱 제어하므로 그만큼 안도가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간혹 이해와 안도감의 강도가 조금 미진한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이든 안도감이 충분히 증장되는 보림의 과정을 생략하기는 어려우므로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꾸 생각에 쫄게 되는 일을 방치하여 안도감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비가 그친 뒤에 젖은 빵이 다시 바람에 마르듯 깨달음의 경험도 약화되어 잊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대한 확인이나 선언을 성취의 치장 따위가 아닌 수행의 일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후의 보림은 안도감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보림의 과정이 끝난 후에 생각이 안도감을 해치지 못하게 되고, 무아와 연기를 기반 삼은 세계관도 자기 살림(논리)을 정확하게 갖추어서 삶의 현상을 모순 없이 이해하고 설명하게 되는 것이 바로 불퇴전입니다.
이렇게 돈오를 마치면 이제 생로병사가 생각의 일임을 알아 자유롭게 됩니다. 삶의 완성을 위하여 더 이상 갈고닦거나 연습할 일이 없습니다. 더 좋은 내일 같은 것은 없으며 늘 지금 여기가 끝이어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환희심과 경외심도 그저 생각의 일이므로 구태여 좇을 필요가 없고, 조금의 불편과 치우침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시간이 저절로 해결할 것입니다. 주어지는 모든 경험들은 그저 꿈의 선물일 뿐이며 그림자가 있어야 드러나는 빛과 같습니다. 그런데 돈오를 한 뒤에도 타인과의 관계에 들어서면 돈오 이전에 몸에 밴 탐진치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작용을 하므로 당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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