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묵스님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내는 아비담마의 분석위에 기초하여 사물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이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진다[無常, anicca]. 그래서 그런 것에 연연하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며[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無我] 여실지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즐겨 사용하신 제자들을 깨우치는 방법이다. 물론 이런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최후의 경지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한다. 분석의 끝은 바로 직관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는 분석을 철저히 하고 그 분석의 바탕위에 물/심의 제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직관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한다. 이처럼 위빳사나는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무상/고/무아의 직관에 이르도록 하는 체계이고 반면 간화선은 어떤 전제도 거부하며 본무생사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3. 정해진 대상(화두)과 변하는 대상(법) 간화선의 화두는 정해져 있다. 여기서 정해져 있다는 말은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자는 무자화두만 참구해야지 화두를 ‘이뭐꼬’나 ‘간시궐’ 등의 다른 화두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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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유 없이 화두를 바꾸는 일이다.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화두에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것이 간화선의 제일 중요한 측면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인 법은 매찰나 바뀐다.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일어남과 꺼짐은 순간순간 바뀌고 있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온몸의 느낌은 의식이 집중되는 매순간 바뀌어 간다.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찰나찰나의 마음은 바뀌어간다. 오히려 이런 변화하고 실체가 없는 현상(법)들을 매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무치게 꿰뚫어보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대상의 변화와 실체없음을 망각해버리고 대상의 표상에 집중하는 수행은 위빳사나가 아닌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간화선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이 아니라 정해진 대상(특히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화두는 단순한 집중의 대상이 아니다. 양귀비가 소옥아! 하고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안록산에게 그 목적이 있듯이 단순히 집중을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다. ‘관법(觀法)으로는 생사해탈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관법이라 표현한 것은 백골관 등의 부정관을 일컷는 것 같은데 이런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방에서도 부정관으로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남북방 공히 선정수행, 즉 사마타 수행으로는 해탈을 못하고 지혜를 돈발하는 간화선, 혹은 위빳사나로만이 생사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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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서로를 오해하여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이므로 해탈 못한다고 하고, 위빳사나는 선정수행이므로 해탈못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억지임을 곧 알 수 있다.
교학 무시와 중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교학을 무시하고 중시여기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간화선의 기본모토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물론 이 언구가 깨달음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실현하라는 말이기는 하지만 문자를 무시하고 교밖의 가르침임을 강조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선종의 기본입장은 깨달음의 경지나 진여의 자리를 현란하게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는, 화엄을 상수로한 대승의 교학체계를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 하였다고 전해오며 후대에는 마음 깨치는 이 공부법을 대승이 아닌 최상승이라 불렀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현란한 교학에 매몰되어버리면 마음이라는 바로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기 때문에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선종의 모토로 제시하였고 대혜 스님은 일체전제를 거부하는 무전제의 수행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였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위빳사나에서는 바른 위빳사나의 전제조건으로 아비담마를 정확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아비담마는 현란하지 않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남방의 강원에서는 아비담마를 중시하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아비담마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자칫 테크닉에만 치중하여 자기가 배운 기법만을 정통으로 고집할 우려가 있다.
각묵스님- 2003년 2월 지리산 실상사 제7회 선우논강의 발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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