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묵스님
1.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 ― 화두와 법 / 적묵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간화선은 화두참구를 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사마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위빳사나는 법을 관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이 공히 대상을 참구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제일 큰 차이점은 바로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방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참구의 궁극은 은산철벽이나 전후제단 등으로 표시되듯이 참구하는 자와 참구대상의 차별이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런 경지를 투과해야 주와 객, 심과 법의 대를 넘어선 절대의 경지 바로 性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런 주객이 끊어진 자리에 계합하는 것이야말로 견성이다(心法雙忘 性卽眞 심법쌍망성즉진 - 증도가).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이다. 위빳사나는 매순간 마음의 대상이 되는 물심의 현상(법)을 무상(변함)과 무아(실체없음)로 철견하고 통찰을 계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변함과 실체없음을 통찰할 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심의 현상(오온)이 해체되어버림을 통찰하는 멸괴지와 모든 현상(상카라)들에 완전히 초탈하여 평온하게 되는 평온의 지혜가 일어나게 되며 이런 과정을 거쳐 공하고 상이 없고 바램이 끊어진 해탈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찰라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심의 제 현상[法]들을 변하고 괴로움을 가져다주고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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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는 것으로 통찰해내지 못하고 매순간 이런 무상 고 무아를 바로 지금 여기서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공이나 성이나 자성청정심이나 진여 등에 즉각적으로 계합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관념(빤띠, 산냐)놀음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이것은 오히려 탐진치에 놀아나면서도 본자청정을 부르짖는 무사선의 폐풍과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묵묵히 본자청정을 반조한다는 묵조선을 비판하고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순간에 화두를 실참실수하여 분별망심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는 간화선과 같은 입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2. ‘오직 직관’과 ‘분석을 통한 직관’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또 다른 입장은 직관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전제를 부정하는 간화선의 입장은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심의 현상(법)을 분석하고 이것을 수관하여 무상 고 무아를 꿰뚫을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의 입장은 분석을 통한 직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선종의 화두와 힌두의 명상주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아무 구분없이 이 둘을 혼용하면 불교수행을 호도할 우려가 너무 많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불교에 많이 나타나서 두렵다.
힌두의 여러 수행 테크닉들은 그게 어떤 형태를 띠던, 어떤 식의 미묘한 설명이던 그들은 아뜨만 브라흐만 아니면 이것의 화현(요즘 아봐타로 발음하기도 한다)으로 보는 여러 가지를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것과 합일하려는 발상을 가진 수행법이다. 그러므로 힌두의 수행법은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의 화두는 전혀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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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해야 한다.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하고 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이 화두의 출발이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nnaanam uparodh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다. 이런 산냐의 척파를 고구정녕히 설하는 것이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이고『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aatmaa-sannaa) 즉, 我相(자아라는 산냐)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이 둘과는 또 다르다. 위빳사나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한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화두일념이 되어서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려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니다.
나를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과 물질[色]의 72/82가지 물/심의 현상[法]들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 찰라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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