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은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반복하여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무아와 연기를 이해하고 체득하여, 할 일이 마쳐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조작하지 않으며 특정한 자아상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뒤에도 수행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고 실제로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제대로
깨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돈오 또는 견성이라고 하는 경계는 고도의 수행 끝에 도달할
수 있는 대단한 현상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살고 있는 물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
이미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들은 일상적으로 미세하게 인식될 수도 있고 간헐적인
강력한 사건으로 각인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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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은 '나' 없음의 상태에서 일어나므로 (일상에서 '나'없음의 상태는 상시적입니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불가능하며 사건 직후의 잔존감을 겪는 것이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고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수행이란
이런 현상을 의도적으로 반복하게 만들어서 그 현상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체득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경험에 이르러서 시선이 확 바뀌게 됩니다. 이런 전환점을 특정하여 견성 또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선이 바뀌었다고 이전에 몸에 배었던 관념들이나 습관들이 인과도 없이 저절로 휘발되거나, 짠~하면서 전환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전히 탐진치가 잔뜩 찌든 심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춘 사람들은 이렇게 일어난 시선의 전환이 퇴전합니다. 견성이 힘을 잃어 하나의 기억으로 후퇴하여 버리고 그 경험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관념이나 습관들을 어찌하려고 조작하고 있다면
시선의 전환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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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 후에 더 나아간다는 것은 전환된 시선을 심신에 고정시키는 후속의 조치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보림이나 후공부 등의 과정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행되는 내용들은 이전에 힘써왔던 수행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바른 의심과 이해를 정리할 뿐, 더 이상 갈고닦지 않습니다. 하늘로 던지진 공이 원심력을 다한 뒤에는 저절로 구심력의 작용으로 땅으로 떨어지듯, 바른
깨달음 이후의 변화는 저절로 자기의 깜냥 껏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뒤에도 어떤 목표가 있고 갈고닦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깨달음을 착각했거나 견성과 시선의 전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태양은 저절로 동쪽 산에서 떠 오르고, 소나기는 저절로 대지를 적십니다. 제대로 견성을 이뤘다면 이 [저절로]에 의탁될 뿐 더 이상 대처하고 조작하지 않습니다. 이후에는 공감과 역지사지하는 능력이 그를 성인의 길로 저절로 이끌고 나아가게 되지만 이 조차도 '표현의 창발성' 때문에 필연적이지는 않습니다. <sns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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