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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 view-the Place of Coolness 바른견해-아찬 차 법문(무념 옮김)

우리는 감각을 제어하는 수행은 하지 않고, 괴로움이 외부 대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은 습관과 충돌하고, 진리는 욕망을 충돌한다. 그래서, 수행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것이고,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우리의 마음은 어둠에 잠겨 있어, 진리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사람들은 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바른 것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정이, 계속 자신을 속이고 있다.

우리는, 이 마음(감정)과 견해를 가이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직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길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인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믿거나 믿지 않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모두 똑같이 들어주어야 한다. 부주의하지 않고, 중간쯤에서 머물러야 한다. 듣고 나서, 그것을 명상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바른 결과가 일어난다.

지혜로운 자는 들었던 가르침을 믿기 전에, 그 가르침에 대해 명상하고 원인과 결과를 스스로 보아야 한다.

스승이 진리를 말했다고 해도, 맹목적으로 믿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아직 스스로 진리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나는 일찍 수행을 시작했으며, 많은 거짓된 가르침을 보아왔다. 예를 들어 “이 수행은 매우 어렵다. 정말 어렵다”라고 하는 법문처럼. 수행이, 왜 어렵단 말인가? 이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많은 스님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올바른 출가생활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산과 숲으로 도망쳤다. 비구와 사미 대중들에게서 도망쳤다.

그들은, 나처럼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대충대충 살았다. 저 사람은 이 사람과 같았고, 이 사람은 저 사람과 같았다. 그것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거나 함께 있거나, 여전히 나는 평화롭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대중들과 함께 있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살고 있는 장소, 음식, 날씨 때문이라고, 이것 또는 저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끝없이,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 헤맸다. 두타행자로써,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다. 그러나 일이 여전히 바르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깊이 숙고했다.

“일을 바르게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도 불만스럽고, 몇몇과 함께 살아도 불만스러웠다. 왜 그러는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나는 불만족스러운가? 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도 좋지 않군. 저기도 좋지 않군.....”이렇게 계속 됐다.

붓다는, 자칼을 보았다. 그 들개는 자기가 살던 숲에서 뛰어나와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덤불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덤불숲에서 뛰어나왔다가, 다시 빈 나무둥치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러다가, 다시 굴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나왔다. *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왜 그런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 자칼은, 구더기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시 서 있다가도, 구더기가 살을 파고들 때면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했던 것이다. 

“비구들이여, 오늘 오후에 자칼을 보았는가? 서있어도 몸이 괴롭고, 달려도 몸이 괴롭고, 앉아도 몸이 괴롭고, 누워도 몸이 괴롭다. 덤불숲이나 빈 나무둥치나 굴속에 있어도, 몸이 괴로웠다. 자칼은 서있음으로 해서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앉아있음으로 해서, 달림으로 해서, 누워있음으로 해서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덤불숲, 굴속 때문에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구더기에 감염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우리 비구들은, 자칼과 같다. 불만족은, 잘못된 견해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을 제어하는 수행은 하지 않고, 괴로움이 외부 대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왜 그런가?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들이 우리에게 (사물을) 바르게 보라고 가르칠 때도, 이와 같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저항하고, 그것이 불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모든 잘못된 견해에서 해로운 결과를 보게 된다면, 그때에서야 거기를 벗어날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실제 수행해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반대로, 바른 견해를 가지면 어디를 가든지 만족스럽다. 나는 수행을 통해, 이것을 확인했다. 비구, 사미, 재가자들이 나를 찾아온다.  바르게 머무는 곳, 냉정하고 객관적인 곳은, 바로 바른 견해이다. 그 이외, 다른 곳을 찾을 필요가 없다.

불행이, 그대의 ‘자아’인가? 주체가 있는가? 그것이, 진짜인가? 나는 불행이 진실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영속성이 있는가? 행복의 주체가 있는가? 느낌일 뿐이다. 사랑에, 영속성이 있는가?

미움과 분노는,  이런 감정들은, 마음속에 잠시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상일 뿐이다. 이것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지만, 어디에도 실체를 찾을 수 없다.

태어남, 살아감, 죽음의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무지한 자는 끊임없이 달리고 붙잡는다. 거기에 진실한 것은 볼 수 없고, 끝없는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이것을 모르면, 지혜보다는 생각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전혀 지혜가 없거나!

우리는 행위에 대한 해로운 과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포기한다. 우리가 수행의 진짜 이익을 보고 나면, 비로소 수행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마음에 ‘선’이 깃들도록 노력하기 시작한다.

만약 그대가 붓다께서 설해놓은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두 가지를 초월할 것이다. 양극단이다. 수행자의 길이 아니다.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과 괴로움에 몰두 하는 것이다.

이쪽은 행복, 저쪽은 불행이다. 마음이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가면서,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자아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열반의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양쪽에 침몰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진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수 있다. 행복과 불행(즐거움과 괴로움), 사랑과 미움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것들을 따르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과 괴로움에 몰두하는 것을 놓아버린다. 이것이, 바른 수행이다. 양극단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결국 평화에 도달할 것이다.  ★


위 글은 페이스북을 통해 널리 불법의 이해를 위해 소개하고 계시는 무념스님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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