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자칼은, 구더기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시 서 있다가도, 구더기가 살을 파고들 때면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했던 것이다.
“비구들이여, 오늘 오후에 자칼을 보았는가? 서있어도 몸이 괴롭고, 달려도 몸이 괴롭고, 앉아도 몸이 괴롭고, 누워도 몸이 괴롭다. 덤불숲이나 빈 나무둥치나 굴속에 있어도, 몸이 괴로웠다. 자칼은 서있음으로 해서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앉아있음으로 해서, 달림으로 해서, 누워있음으로 해서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덤불숲, 굴속 때문에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구더기에 감염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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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비구들은, 자칼과 같다. 불만족은, 잘못된 견해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을 제어하는 수행은 하지 않고, 괴로움이 외부 대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왜 그런가?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들이 우리에게 (사물을) 바르게 보라고 가르칠 때도, 이와 같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저항하고, 그것이 불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모든 잘못된 견해에서 해로운 결과를 보게 된다면, 그때에서야 거기를 벗어날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실제 수행해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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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바른 견해를 가지면 어디를 가든지 만족스럽다. 나는 수행을 통해, 이것을 확인했다. 비구, 사미, 재가자들이 나를 찾아온다. 바르게 머무는 곳, 냉정하고 객관적인 곳은, 바로 바른 견해이다. 그 이외, 다른 곳을 찾을 필요가 없다.
불행이, 그대의 ‘자아’인가? 주체가 있는가? 그것이, 진짜인가? 나는 불행이 진실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영속성이 있는가? 행복의 주체가 있는가? 느낌일 뿐이다. 사랑에, 영속성이 있는가?
미움과 분노는, 이런 감정들은, 마음속에 잠시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상일 뿐이다. 이것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지만, 어디에도 실체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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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 살아감, 죽음의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무지한 자는 끊임없이 달리고 붙잡는다. 거기에 진실한 것은 볼 수 없고, 끝없는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이것을 모르면, 지혜보다는 생각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전혀 지혜가 없거나!
우리는 행위에 대한 해로운 과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포기한다. 우리가 수행의 진짜 이익을 보고 나면, 비로소 수행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마음에 ‘선’이 깃들도록 노력하기 시작한다.
만약 그대가 붓다께서 설해놓은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두 가지를 초월할 것이다. 양극단이다. 수행자의 길이 아니다.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과 괴로움에 몰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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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행복, 저쪽은 불행이다. 마음이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가면서,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자아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열반의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양쪽에 침몰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진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수 있다. 행복과 불행(즐거움과 괴로움), 사랑과 미움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것들을 따르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과 괴로움에 몰두하는 것을 놓아버린다. 이것이, 바른 수행이다. 양극단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결국 평화에 도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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