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무념) 한 친구가 물었다. “스님, 저는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군요. 당신은 단멸론자이고 유물론자이군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안 것입니까?”... / “제 생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 “그렇죠? 생각으로 이해한 것이죠? 그럼 생각은 실재가 아닌 관념이라는 것도 아시죠?” / “관념이라는 것이 뭡니까?” / “예를 들어, 윤회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일 뿐이라는 거죠. 당신이 윤회를 믿든 안 믿든 윤회가 있다면 그것은 윤회는 실재하는 것이죠. 그러면 윤회를 믿지 않는 것은 관념이 되는 거죠.” / 나는 그 친구에게 단멸론을 믿으면 세상을 열심히 성실하게 살 의미도 없고, 도덕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 “스님, 유물론자도 충분히 도덕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단멸론자이지만 성실한 도덕론자이기도 합니다.” / “그렇죠. 단멸론을 믿지만 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멸론은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이지만, 양심은 살아있으므로 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양심은 관념이 아니고 실재이기 때문이죠.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일어납니다.” / 관념과 실재는 아비담마를 배울 때 맨 첫장에 등장하는 단어이다. 빨리어로 빤얏티와 빠라맛타라고 한다. 불교는 머리로 하는 관념놀이(알음알이, 思量分別)가 아니고 실재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실참수행이라고 한다. “불교는 관념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실재를 다루는 것입니다. 머리로 헤아리지 않고 마음을 관찰해서 번뇌를 소멸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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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이 일어났으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탐욕이 왜 일어났는지 관찰하고, 그것이 불만족이나 결핍감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불만족이나 결핍감이 분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탐욕과 분노가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 “그렇게 수행해나가다 보면 탐욕이 줄어드는 것을, 분노가 줄어드는 것을, 에고가 줄어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경험한다는 것이 실재한다는 의미입니다.” / “그럼 경험할 수 없는 것은 관념입니까?” / “정확합니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은 관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경구이고 아름다운 말이더라도 실천할 수 없으면 관념입니다.” / “붓다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모든 악을 짓지 않고(諸惡莫作) 모든 선을 행하라(衆善奉行 ).’입니다. 이것은 관념놀이가 아니고 탐욕,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소멸시키고 고요, 평온, 일념과 같은 선한 마음을 키우라는 말입니다.” / “남들이 비난하고 욕을 하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 “수행을 해나가다보면 분노가 점점 소멸되어감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 “그럼 머리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까?” /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개선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배워야겠죠. 그렇지 않는 관념철학들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겠죠. 붓다께서는 ‘그 마음을 맑혀라(自淨其意).’라는 말로 그 가르침을 요약하셨습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마음이 맑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머리로 완벽하게 이해해도 여전히 탐욕,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그러므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관념놀이(사량분별)는 그만두고 실재(팩트)를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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