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경 강의 7 공의 두가지 진실한 모습(공의은복진실장 空義隱覆眞實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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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경 강의 7 공의 두가지 진실한 모습(공의은복진실장 空義隱覆眞實章)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수) 10 03, 2018 12:49 pm

승만경 강의 7
 공의 두가지 진실한 모습(공의은복진실장 空義隱覆眞實章)


경(經) 세존이시여, 두가지 여래장의 공한 지혜가 있습니다.
1) 공한 여래장(空如來藏)은 모든 번뇌의 더미에서 혹은 떠나 있으며, 혹은 벗어나 있으며, 혹은 그것과 다른 것입니다.
2) 공하지 않은 여래장(不空如來藏)은 항하사(恒河沙) 보다도 더 많은 부사의한 불법을 혹은 떠나지 않으며, 혹은 벗어나지도 않으며, 혹은 그것과 다르지도 않습니다.


설(說) 1) 공한 여래장(空如來藏)은 모든 번뇌의 더미에서 혹은 떠나 있으며, 혹은 벗어나 있으며, 혹은 그것과 다른 것입니다.
-> 간혹 공의 의미를 허무나 텅빈 아무것도 없음이라 이해하는 불자님들이 계십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도 틀린 이해는 아닙니다.
다만 그 이해의 단계가 아주 낮은 이해일뿐입니다.
또한 공의 의미를 모든 번뇌를 멸하여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불자님들도 계십니다.
이또한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진정한 대승불자가 추구해야할 이해와는 거리가 있는 이해입니다.
이러한 낮은 단계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참다운 일승(一乘)의 도리를 추구하는 불자에게는 잠시 거쳐가는 중간 관문의 이해일뿐이지 이러한 낮은 단계의 이치에 빠져 헤매고 그 이치를 가지고 논하는 선문답 놀이에 빠지는 자는 한없이 어리석은 자이며, 인과율의 은총을 받아들일수 없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비움으로서 공의 이치를 터득하려 하지말고, 그 비움의 대상과 매체도 공임을 이해하고 터득하려는 자세야 말로 참다운 일승도를 추구하는 불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2) 공하지 않은 여래장(不空如來藏)은 항하사(恒河沙) 보다도 더 많은 부사의한 불법을 혹은 떠나지 않으며, 혹은 벗어나지도 않으며, 혹은 그것과 다르지도 않습니다.
-> 제가 금강경 강의1편에서 편재(遍在)의 이치를 설한적이 있습니다.
저는 비움으로서 공을 터득하지 않았고, 세상에 가득차 있는 나의 모습을 통해 공을 터득했습니다.
유(有)로서 공(空)을 터득한것입니다.
비어있다, 가득하다의 생각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 관념에 빠져 무언가를 버려야만,
번뇌를 버려야만,
재물을 버려야만 진여를 터득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승보살의 수행이 아니며, 불공여래장의 수행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번뇌와 욕망을 합리화 하는 이론이라고는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행(오욕에 가득한 행)이 궁극적으론 범행임을 알지만, 바라밀행을 멈추지 않는다'는 화엄경의 말씀을 이해한, 오직 일승보살(一乘菩薩)을 지망하는 이를 위한 강의이니 그 이하의 하근기 수행자의 반론에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본문의 항하사 보다도 더 많은 부사의한 불법이란, 사바세계의 모든 법칙과 삶을 뜻합니다.
사바세계의 모든 법칙과 삶은 중생의 시각으론 어긋나고, 뒤틀려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법칙과 삶은 진여의 관점에서는 한없이 청정한 행위이며, 모든 중생을 여래의 경지로 이끌고 있는 교육과정입니다.

그래서 불공여래장이란 그러한 모든 중생의 교육 과정을 아우르고 있고, 벗어나지도 않기에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전도진실장 顛倒眞實章)

경(經) 치우친 견해라는 것은, 범부가 오온(五蘊)에 대하여 아견. 망상. 집착으로 두가지 소견을 일으키는 것을 치우친 견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입니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열반은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상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견해들은 망상으로 인해 생긴것입니다.


설(說) 요즘 페이스북의 일부 불자님들을 보면 여래의 사상이 무아(無我)라느니, 공집을 버려야 참나를 알수 있다느니, 법집을 버려야한다느니 참나를 찾을수 있다느니 수많은 이론들을 올리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이론들은 모두가 치우친 견해에서 비롯된 이론입니다.

나는 세상 가득히 존재하고 있고, 존재의 개념을 넘어서까지 있는데, 나를 부인하는 무아는 무엇이며, 참나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모든 집착이 바로 참 나이고 그 집착을 여읜 바른 마음도 곧 참 나인데, 집착을 여읜다는 말은 나를 여의어서 참 나를 찾겠다는 말이니 애초에 세상에 존재할수 없는 개념일뿐입니다.

학자적인 성향을 가진 분께서 그런이야기를 하신다면 그분의 성향이 그러해서 쉬운말을 복잡하게 논해야만 이해할수 있는 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너무도 많은 불자님들께서 이러한 문자놀이에 여념하고 계신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뿐입니다.

모든 집착과 바르지 못한 견해에 담겨있는 청정함을 깨우쳐 청정의 도리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참나를 찾는것이며, 진여의 길입니다.

다 완성으로 가는 여정에서의 하나의 관문에 불과할뿐임을 알지만 저 상불경은 너무도 미욱한 중생인지라 그저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미욱한 중생의 관점에서 세상의 잘못된 견해하나를 지적하겠습니다.
예의범절(禮儀凡節)이야 말로 문화인의 기본소양이며 선진국민이 되는 기본 자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의는 두가지 갈래에서 생겨난 개념인듯합니다.
그중 한가지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탄생한 예의이며
다른 한가지는 한없는 자비심에 의해 탄생한 예의입니다.

두려움에 의해 탄생한 예의란 어떤 것인가 하면
제가 소싯적 읽어본 어떤 책에 이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영국신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영국 신사라는 말이 왜 생기게 되었냐면,
영국이란 나라의 사람들은 사소한 시비에도 칼부림을 하기 일쑤인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작은 시비에도 칼에 베일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분쟁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고, 그 마음가짐에서 엄격한 법률과 매너(예의)라는 문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가까이로는 사무라이 문화인 일본사람들의 예의 바른 모습을 칭찬하는 모습이 많은데 이들 또한 그렇다고 합니다.
불과 백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하급무사일지라도 평민은 조그만 실수에도 팔다리를 자르고 목숨마저 거두어가도 아무 항변도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극도의 하심(下心)문화가 생겨나게 되었고, 타인에게 폐를 끼지면 단지 욕을 먹는게 아닌 죽음의 과보가 돌아온다는 두려움에 타인에 대한 민폐를 극도로 싫어하는 문화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들만의 문화가 2차대전 종전후 세계에 고루 퍼진 일본인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인이 예의 바른 민족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두려움에서 탄생한 예의는 그 한계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상대가 반항할수 없는, 보복할수 없는 약자일 경우 그 예의 바른 사람은 한없이 잔인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세계에는 이지메(イジメ)라는 사회 현상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지메 문화가 바로 두려움에 의해 탄생한 예의의 부정적인 측면인 것입니다.


간혹 교도소에 봉사를 다녀오신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죄짓고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다들 참으로 선하고 바르기에 사회의 부정을 참지 못해 죄를 지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나온 의견일 뿐입니다.

범죄자들의 성향은 오직 고통과 폭력에 고개를 숙일뿐입니다.
그래서 그들 세계에서는 약자를 끝없이 학대 하는 소시오패스의 숫자가 일반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단지 감옥이란 갖혀진 환경과 교도관이란 자신이 범접할수 없는 강대한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의 힘을 가진자에 대한 두려움에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일뿐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의해 탄생한 예의는 불자님들이 추구해야할 예의와는 거리가 한참 멀은 개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두려움에 의해 탄생한 예의 보다는 진정한 대자대비의 마음에서 타인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큰 지혜의 관점에서 시작된 예의를 추구해야합니다.

일주일만에 글올렸습니다.
모든 벗님들께 인사올립니다. _(())_(())_(())_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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