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만경 강의 6 무변성제장(無邊聖諦章) 다함없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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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경 강의 6 무변성제장(無邊聖諦章) 다함없는 진리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수) 10 03, 2018 12:48 pm

승만경 강의 6

무변성제장(無邊聖諦章) 다함없는 진리

경(經)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처음으로 성스러운 진리(1)를 관찰할 때에 하나의 지혜로써 모든 주지번뇌(住持煩惱)를 끊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지혜로써 네가지 지혜의 모든 공덕을 끊는 것도 아니고(2), 또한 법으러써 능히 이러한 네가지 법의 뜻을 잘 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네가지 법의 뜻을 잘압니다.

설(說) (1) 성문 연각이 처음으로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한다 함은 이치의 깨달음이 열반의 참 맛이라 생각하던 그릇된 고정관념을 벗어나 참다운 바라밀을 수행하려는 마음을 먹었을때를 의미합니다.

제가 그동안 수차례 참다운 깨달음이란 어떤 이치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그이치와 하나가 되어 나의 모든 삶과 언행이 곧 참다운 이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살의 깨달음은 극도의 이치를 깨닫는 초이성(超理性)과 그 극에 이른 이치를 구현하는 초감성(超感性)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정의내린적이 있습니다.

초이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감성이 따라야 합니다.
또한 초감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이성이 따라야합니다.

초이성이 없는 자비는 그 한계가 명확한 상대적인 자비이므로 그의 자비가 어떤이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폭력이 될수도 있습니다.
또한 초감성이 없는 깨달음은 그저 학자의 논설에 불과함으로 세상의 변화를 이끌 큰 힘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이성(견성)을 목적으로 하든 초감성(바라밀행)을 목적으로 수행하든 어느 단계에 이르면 두가지 명제를 상호화합해야만 다음단계로 올라갈수 있음을 알게됩니다.

그 참다운 이치를 구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며, 이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한 첫번째 수행법은 저 상불경은 염불(念佛)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불이야말로 위대한 불보살님들의 대자대비한 자비심을 떠올리며 본받아 나가는 행이기에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2) 성문(아라한), 연각(벽지불)의 지혜(곧 견성자의 지혜)로서는 모든 근본 번뇌를 타파할수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컴퓨터 프로그램 소스를 노트에 옮겨 놓는 다고 그 소스가 구현되는 것이 아니듯이 그 소스(참된 지혜)를 컴퓨터의 특정 가상공간에서 구동해야만 구현이 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不二)의 이치를 그저알고 행하지 않음은 위대한 프로그램소스를 그저 노트에 적어 놓기만 하고 컴퓨터에 옮기지 않음과 마찬가지 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너무 단순한 비유일뿐이니, 여래의 지혜를 프로그램소스로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그저 이해를 돕기위한 비유일 뿐입니다.

성문, 연각은 불이(不二) 곧 바라밀행을 직접 수행해야만 불이의 이치의 큰 힘을 체득할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보살행으로의 입문입니다.


경(經)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에는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가지 지혜(四智)도 없으며,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가지 대상(四緣)도 없습니다.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법이 없는 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설(說) 이 대목이 아마도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는 어리석은 이들의 주장의 근거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한없이 어리석고 또한 어리디 어린 중생일뿐 절대 그들의 주장처럼 여래의 경지에 이른이들이 아닙니다.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가지 지혜와 대상은 사성제(四聖諦)의 다른 표현인듯합니다.
제가 번역가의 수준이 안되는 지식이 부족하고 미지한 어리석은 범부인지라 감히 윗대 스님들의 번역본을 재해석하는 우를 범한다고 생각하실수도 있으나, 진여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면 이 경문의 문구는

<최고의 지혜 곧 아뇩다라 샴먁삼보리는 점진적으로 인과 연의 흐름을 쫓아 깨달아가는 사성제로 이룰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바라밀행, 불이(不二)로서 이룰수 있는것입니다.>의 표현이 바른 번역이며 바른 해석인듯합니다.

그들 어리석은 이들의 주장처럼 단박에 깨쳐서 여래의 경지를 완성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의미하는것이 아닙니다.


경(經) 세존이시여, 금강유(金剛喩)라고 하는 것은 곧 제일의(第一義)의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은 주지번뇌(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않았으므로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가 제일의 지혜라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설(說) 금강유란 금강같은 깨달음으로 곧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와 같은 의미 인듯합니다.
승만부인께서는 성문, 연각의 견성은 모든 근본번뇌를 끊지 않은 한계가 있는 지혜임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경(經) 세존이시여, 일승의 도를 닦는 자는 둘이 아닌 성스런 진리를 아는 지혜로서 여러가지 잠재적 번뇌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 응공, 정등각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경지가 아니고 부사의한 공의 지혜이니, 모든 번뇌의 더미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번뇌의 더미가 무너진다면 구경의 지혜가 곧 제일의의 지혜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는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며 다만 위없이 바른 깨달음의 지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설(說) 법화경 화성유품에서는 여래의 직전 제자들의 깨달음이 구경열반이 아닌 여래가 잠시 변화로 만들어 놓은 작은 성에 도달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하셨지만 이 승만경에서는 수없이 되풀이하여 성문, 연각의 깨달은, 곧 이치의 깨달음, 혹 극기 훈련을 통한 마음의 평정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님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위대한 보살의 경지에 이른분들은 그시대에 이미 후대의 어리석은 불자들에게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사상이 퍼져 여래의 경지를 한없이 낮추어 보는 이들이 생겨날것이란 누진(漏盡)의 지혜가 있었나봅니다.

다시 한번 벗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라한, 벽지불의 견성이란 오직 불이(不二)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지름길이 적힌 지도를 가지는 경지일뿐 절대 열반과는 거리가 있는 하찮은 경지입니다.
(견성이 하찮은 단계라고 폄하하는 말을 하는것은 견성이 절대 하찮아서가 아닌 너무도 견성에 메어 있는 불자님들이 너무도 많기에 충격요법을 쓰기위한 표현일뿐입니다. 범부중의 성자라 불리는 아라한 벽지불의 경지가 어찌 하찮은 경지 이겠습니까?)


경(經) 세존이시여, 성스러운 뜻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에 대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문과 연각은 유한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며, 성문과 연각은 불완전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므로, 이름해서 '성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1)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성문, 연각의 공덕이 아니며, 진리도 아닙니다.
이러한 진리는 여래. 응공. 등정각이 처음으로 비로서 깨달아 아는 것이지만, 그뒤에도 무명의 껍질에 싸여 있는 세간을 위해서 출현하여 연설하므로 성스러운 진리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2)


설(說) (1) 불완전한 성문, 연각 곧 견성자의 공덕을 성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범어 원전에서는 같은 성스러운 표현이나 그 레벨의 차이가 있는 표현일것으로 생각됩니다.
작은 성스러움, 큰 성스러움의 차이일터이지만 승만경이 번역될때 번역가의 한자 수준이 그리 크게 높지 않아서 같은 성(聖)자를 사용하여 후대의 수행자들에게 견성자와 여래의 경지를 같은 성스러운 경지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지 않았나 싶다고 저 상불경은 생각합니다.

(2) 성스러운 진리는 여래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서 깨닫는 것이지만 무명에 감싸여 있는 가여운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기에 그 성스러운 진리는 가장 불이(不二)를 설하는 성스러운 진리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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