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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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하여 페이지별 내용을 오늘에 간추려 본다.(이미 회고록으로 올린 글을 보면서-편집인 김안수)
10월 14일 박재원 수석부회장은 국제불교도협의회 일을 더이상 도울 수 없겠다며 사의 표명을 해온 것이었다. 나로선 이제 홀로 남아 국제불교도협의회를 감당해 나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고, 하는 수 없이 남은 이사들에 의해 새 이사장을 임시로 교체해 놓고, 대책을 강구해 나가야할 처지였다.
내가 그때 미국을 다녀왔을 때는 불교법난을 겪은 뒤였고, 법난은 국제불교도협의회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는지....,이어서 먼저 미국을 다녀 온 소식부터 나열하고 그 뒤를 잇기로 한다.
80년 10월 중순에 LA관음사를 처음으로 방문하고, LA한인타운 8가에 위치한 삼일당에서 개최(10월17일)한 LA불교문화원 건립기금 조성을 위한 서화전시회에 참관하고, 그 뒤 미국 이곳저곳과 하와이를 경유 일본을 잠시 다녀 11월 중순 귀국했다.
다음은 관음사 20년사 연감에 기록된 내용이다. 80년 10년 17일 오후 6시 / 8가 삼일당 화랑에서 서화전 개관 - 본국에서 구산대종사, 김철오, 김안수, 전영화, 전치환 참가 - 나성총영사 및 각 사회단체장 참석 / 6만2천불 건립기금조성(작품구입예약-약정).
나의 첫 미국방문은 귀국까지 범종사 김철오 사장과 함께 했었다. 관음사에 머물면서 우정의 종각, 달마사, 수도사, 헌팅톤라이브러리, 그랜드캐년을 다녀왔고, 하와이를 거쳐 일본을 들려 귀국했다. 하와이로 가기 전에 나는 78년 겨울에 들어오신 이상훈 선배님을 만나 미국생활을 물어본다. 노동의 신성함을 내게 말씀하신다. 내가 만난 곳은 수와밑 야시장에서 옷을 팔던 모습을 본다. 혼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꽤 수입이 많다고 했다. 그 당시는 한달에 4,000불이상의 순익을 보았던 모양이다. 고생하면서 가디나지역에 어머님 모시고, 정원이 넓은 집을 사서 묘목 나무도 길렀고, 꽤 재미있게 사신다고 했다. 무조건 나보고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불교활동에 대한 미련은 이제는 접으라고 하기도 했다. 멋진 겨울 외투를 사주셔서 입고 들어오게 된 때다.
나는 김철오 사장과 함께 일본에 잠시 체류 중에 귀국일정을 잡고자 김철오 사장이 홍법원 김정길 사장을 통해 한국의 정황을 전화로 알아보았다. 들려온 소식은 한국불교계가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다. 국내가 10.27법난으로 온통 아수라장이 된 상황을 듣게 된 것이다. 일본에 좀더 머물다가 들어오는 것이 좋겠다는 전언이다. 어찌할지 몰라, 그렇다면 기왕에 일본불교계를 일부나마 살펴볼 생각으로 당시 일본에서 고생하시며 유학중이던 임송산(무근)스님이 계신 곳을 찾아간 것이었다. 나와 김철오 사장이 송산스님의 안내로 그때 일본에서 고생하시며 한국불교개화를 위해 선구자로서 불교학문 전반연구에 몰두하시던 스님들을 잠시나마 찾아서 만난 분으로는 홍선스님, 도업스님, 세민스님, 태연스님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을 경유해 한국으로 귀국한 나는, 불교법난으로 인해 시국이 참으로 암담한 현실임을 체감하면서, 불교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던 미래지향적 의지감각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듯 했다. 우선 박재원 부회장님을 찾아뵈었다. 어처구니없는 법난으로 국제불교도협의회 박재원 부회장님 댁까지 수색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때에 이들은 원일당 창당 기미를 찾아내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밝혀낸 것 없이 집안만 들쑤셔 놓았던 것 같다. 이 일을 겪은 박재원 부회장님은 이젠 더이상 모든 일에 대해 의기소침해 계신는 듯 했다.
80년 연말을 기해 나와 국제불교도협의회 운명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불교계가 사회악의 정화대상으로 둔갑되어 버린 것일까. 정교분리가 엄존한 시대에 어째서 이들은 그들의 정치에 지지선언을 못하는 온당한 종교계 처신을 빌미로, 누굴 위해 사회혼란을 부추겼단 말인가. 어쨌든, 법난 후속조치로 1980년 11월 5일에는 정화중흥회의를 출범시켜, 종헌개정, 중앙종회 해산, 산하기구 해체를 단행하고 이후의 종단운영을 승계했다. <참고: 중흥회의는 81년 1월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하고 종정의 임기를 10년으로 하는 등 종단운영의 새 틀을 짠다. 6대 종정에 성철스님을 추대하고, 18대 총무원장에 성수스님을 선출한다.>
뒤이어 1980년 11월 13일 계엄사령부는 비리승려 18명 구속. 32명 승적 박탈. 200억 6천만 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종단에 환수 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당시의 신군부는 제5공화국의 출범을 앞두고 집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정치적 정지작업에 나섰다. 80년 11월 전두환과 노태우(보안사령관)는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K-공작계획의 결과를 바탕으로 언론기관 통폐합방안을 마련한 다음, 정보기관을 동원해 각 언론사를 협박함으로써 언론 강제 통폐합을 시행했다. 전두환은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정치인별 신상카드를 가지고 정치활동 규제대상을 선정하게 하고 이를 결재해 사회정화위원회에 그 명단을 전달, 80년 11월 12일 811명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조치를 발표하게 했으며, 정치활동 규제조치로 신군부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구 정치인들의 정치적 도전을 막기 위해 3김씨를 비롯한 500여명의 유력정치인들을 정치무대에서 퇴출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다시 새 정국이 열리는 시대로 81년을 맞이하게 된다. 81년 국제불교도협의회 존속여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음 편으로 이어 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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