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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하여 페이지별 내용을 오늘에 간추려 본다.(이미 회고록으로 올린 글을 보면서- 편집인 김안수) 당시 유신정부는 시국에 대한 청와대 강변일변도식 대처에 오히려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한편 79년 8월부터 장영자(불명:보각행)가 느닷없이 등장하여 용두관음보살상을 가지고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때였다. 당시 신문 기사는, 고뇌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탈케 해주는 대비원력의 신통력을 가진 성자로 불리는 33관음 중의 하나인 용두관음보살상이 1천6백년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출현해 불교계의 큰 경사가 되고 있다. 서울 칠보사의 돈독한 불자인 장보각행 여사가 소장해 오다 9월 4일 공개한 국보급의 이 관음보살상은 중국 청나라 때 것으로 일제말엽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했다.또 황수영 동국대 박물관장은 『이 용두관음보살상은 중국에서도 으뜸가는 불상중의 하나로 국보적인 가치와 함께 불자들에게도 큰 원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때 79년도 조계종은 77년 8월 이후 계속된 내분으로 종단이 완전 두 동강이 난 채 진통을 거듭해 왔던 때다. 문공부 등 전국신도회(이후락회장)가 내분을 수습하겠다고 거중조정에 나섰지만 모두가 실패한 채 내분의 소용돌이는 더욱 깊어만 갔다. 법원으로 양측은 계속되는 제소로 골만 깊어갔다. 1979년에는 분규 중에 조계사 및 개운사에서 각각 별도의 봉축 법요식을 개최해 모두 다 망신을 사기도 했던 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