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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11월에 도안스님이 미국으로 들어가시고 난뒤, 2년쯤 지나서 비몽사몽간에 스님에 대한 불길한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사람은 하나도 없는 산중에 시커먼 검정 개울물에 스님께서 몸이 반쯤 빠져서 나오실려고 애를 쓰는 꿈을 꾸다가 잠을 깼는데 너무 예감이 안좋아 김법사께 이야기를 하고, 미국에 전화를 해보는게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그런 쓸데없는 꿈에 매달리지 말라고 야단치드라구요.

꿈을 꾸고 난 뒤 이삼일이 지나서 미국서 한국(77년 6월경)에 다녀간 청년불자 녹야원 학생회 출신 연실 아가씨를 통해 전해듣게 된 소식은 77년 3월 고속도로에서 스님께서 기름탱크 츄렐라에 의한 대형교통사고로 인해 응급조치 후, 퇴원하셨지만 매우 극심한 교통사고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 통증에 불편을 겪으면서 살아 가신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도안스님은 어린시절 어머님 곁을 떠나질 않고 따라 다니셨는데, 어머님께서 부엌에서 풀을 쑤어 퍼 옮기던 중 일어서려다가 뜨거운 죽그릇이 옆에 쭈구리고 앉아 있던 아이(스님) 머리에 쏟아져서, 화상을 입고 그 뒤로 머리에 흉터가 남고 머리카락이 나질 않아 평생 모자를 쓰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님을 졸졸 따르던 어린시절 스님! 어머님은 그 도안스님에 대한 출산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출산할 때 아이가 거꾸로(발 다리부터) 나왔는데, 두손은 합장하고 똑바로 꼿꼿하게 서서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15세에 출가하신 스님은  24세 때는 서울 적조암에 기거하게 되었고, 그 때 서라벌예대(문예창작과)를 다니셨는데,..


다섯째가름(나 혼자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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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과 여학생이 혼자 너무나 스님을 좋아하고 사모하며 절까지 매일 찾아오다싶이 하면서 결혼을 하자고 매달렸다. 스님께서는 냉정하게 뿌리치셨고 단한번 눈길마저 주지않아서 결국 그 여학생은 결국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마지막 그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49재를 정성껏 봉행해 주었다고 어머님은 내게 말씀해 주신 바 있다.  

그리고, 스님께서 법회때 알려준, 직접 겪으신 체험 실화 한편이 너무나 내겐 잊지못할 감동여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스님께서 직지사에 주석하실 때인데, 어느 봄날 스님방 문 앞에 새 한 마리가 신음소리를 내며 울부짖길래 나와보니, 새 한마리가 다리를 다쳐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새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붕대로 약을 발라줬더니 마침내 나아서 날라 갔는데, 그 다음 봄에 새 한마리가 날라와 스님이 방문 앞에 서있는데 그 새가 막 소리를 내길래 그 새를 보는 순간 씨 하나를 스님 앞에 떨어트려 살펴보았더니, 보리자 염주씨였드랍니다. 그래서 심었더니 많은 보리자 열매가 달려서 그것으로 염주를 여러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스님께서 법회 때 들려주신 이야기 입니다.

이제 마지막 이야기로는 제가 꿈에 본 신기한 이야기 입니다.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장례를 치룬 일주일 쯤 지난 후 일로, 새벽에 비몽사몽간에 스님을 뵈었는데 옛날 살아 계실때 그 얼굴모습이 아닌, 꿈속에서도 사바세계에 사는 분은 아니구나 담박에 알아차렸죠. 얼굴모습은 눈화장만 한듯하고, 아주 화려한 거룩한 비단 옷 황금벨트에 맨앞에서 주장자를 짚으셨는데 스님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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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가름(나 혼자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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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스님을 보는 순간...꿈속에서라도 너무 놀라고 반가워서 합장하고 인사를 올렸는데 스님께서는 말씀은 안하시고 약간 미소만 짓고 서로 바라만 보고 있다가 꿈을 깬 기억입니다.

끝으로 이자리를 빌어 스님께서 투병시 스님의 회복을 위해서 많은 신심과 불심으로 물심양면으로 노고에 임하셨던 분들, 송학당 원장 탕재치료, 어느 비구니스님의 간병, 혜광법사 한의치료 및 총력을 기우려 헌신해주신 신도여러분께 충심으로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저와 김법사님, 사중 스님들께서 필사적으로 간병을 지켰건만 사바의 인연이 다 되셨는지 굿사마리탄 병원에서 마지막 몇몇 신도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그리고 편안한 모습으로 임종을 보이시며 입적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간 연화방에서 스님의 불사에 적은 보시나마 보태시라고 틈틈히 제게 건내주신 헌납금을 차곡차곡 모아 오던 중에 스님 입적으로 달리 용처가 없었던 바, 이를 앞으로 스님 출판물 간행이 있을 때 사용하려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간 제가 모금해서 간직해 온 것, 합계 결산으로, 헌납명단을 아래에 밝히며 불사금 회향처로 삼습니다.   
2005년- 김인선, 원명사 신도(익명), 신동환, 송운, 유철호, 이희정, 김형근, 문은희, 임보살(신북경)
2006년- 전계향, 변서이, 이민아, (익명), 김희순, 서기영-서태희(부부), 정연규, 김영중, 이계식, 김화자, 길민호, 길성호, 길미경, 최문수행

---총 헌납 모금액 : $1,187.00 ---/ 화주자(한원각행)   


다섯째가름(나 혼자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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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기 남북불교의 교류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스님을 그린다.(김형근)---------

본격적인 남북불교계 교류는 1990년 뉴욕에서 제안하여 시작하였다.

대원스님과 법타스님의 개인적인 방북이 있었지만 미주한국불교계 차원에서 북한 불교계 인사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교류하는 문제는 당시의 미주한국불교계 역량으로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과 미국과는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북한 불교계 인사를 초청하는 문제는 북한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미국 입국비자는 미 국무성의 사전 허락을 받아 중국의 북경 미 대사관에서 받아야 하는데, 북한 정부와 국무성에 연락망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불교계에서는 없었던 때다. 그래서 나(김형근)는 이 일을 불교인이 아닌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며 추진하였다. 미주현대불교(월간잡지) 주변사람들과 필라델피아 거주 황규식씨(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등이 조직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는 LA에 있던 법타스님을 회장으로 발족된 단체로 조불련에 남북불교계가 미국에서 한데 모여 회의를 하자는 '조국의 평화통일 기원 남북재미동포 불교인합동법회' 제안을 1990년11월에 하였다. 이 제안을 하기 전에 나(김형근)는 미국에서 북한과 교류활동을 하던 여러 단체와 사람들을 통해 '조불련'에 의사를 타진하였는데 그때 케이커 교도인 이행우씨로부터 북한 조불련이 "당신이 하는 행사라면 참석 하겠다"라는 언질을 전해 들은 후에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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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가름(LA 남북불교?: 김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