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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을 그린다.(옹강산)---------

1994년 1월, LA에 노스리지 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송광사 LA분원 고려사 국제선원장이라는 과분한 이름으로 1년간 소임을 살았다. LA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외포교에 눈을 돌린 여러 스님네들의 노력으로 한국절이 해외에서 제일 많이 건립되어 있는 곳이다. 당시 나는 30대 후반으로 법랍으로나 세납으로나 제일 어린 축에 들었기 때문에 남가주사원연합회 간사 일을 맡았다. 회장은 관음사 도안스님이셨다. 간사란 회장을 보필하고 심부름 하는 자리여서 자주 스님을 뵈었다.
때로는 스님께서 고려사에 오시기도 했고 때로는 내가 관음사로 찾아 가기도 했다. 전체적인 모임은 각 사찰에서 돌아가면서 열거나 아침식사를 겸해 작은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며 회의를 했는데 법왕사 현일스님, 반야사 현철스님, 대각사 진각스님, 보문사 인권스님, 한마음선원 혜중스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스님을 모시고 4월 초파일 행사 등 여러 불교 행사를 보좌하면서 늘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연세가 제일 많으신 데도 불구하고 항상 앞에서 남가주 불교를 위해 정열적으로 일을 하시는모습은 젊은 스님들의 귀감이 되었다. 남가주 불교방송도 당신이 시작한 일이었다.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그 해 12월 성당을 빌려 태안사 청화 큰스님을 모시고 송년법회를 할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정정하셨다. 얼마 후 나는 1년의 임기를 마치고 송광사 큰 절로 들어와 교무 소임을 살다가 다시 제방 선원을 다녔다.


다섯째가름(스님을 그린다-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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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해제철에 토굴에 머물고 있을 때 뜻밖에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데 LA에서 같이 살자고 하셨다. 나를 잘 보셨는지 8년 전 잠깐 살다 간 후학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러나 당신의 청을 들어드리지는 못했다. 포교에 자질도 없고 또 산골 토굴에 80 노모를 모시고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당신은 대장암으로 판명 받은 후 큰 수술을 마친 상태였으며 다행히 경과가 좋다고 하셨다.

그런데, 작년 여름 불교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스님께서 입적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세수 70세 법랍 54세. 세연을 마치시기엔 너무 안타까운 연세였다.

1975년 미국으로 건너 가 한국불교의 불모지인 LA에 관음사를 개원한 스님은 86년부터 95년까지 미국불교협회 공동의장, 남가주 불교사원연합회 회장을 맡으며 한국불교가 미국에 뿌리는데 앞장섰으며 북한식량돕기에 나서는 등 각종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불교전파에 힘을 기울이신 분이었다.

비록 잠시지만 가까이에서 모셔본 적이 있는 나는 평소 불교와 민족과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 일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던 스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다망하게 사신 것이 당신의 몸에 병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LA 관음사 홈페이지를 찾아 스님의 생전 법문 동영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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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가름(스님을 그린다-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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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이나 다름없는 인자한 모습이지만 몸이 많이 쇠약해진 수척한 노장님의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는다는 이 말은 바로 당신께 해당하는 말이리라.

마지막에는 무상의 진리까지 보여주셨으니 스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선지식이며 큰스님이셨다.

세상이 발전하여 인터넷으로 미국에서 열린 49제를 한국에서 보았다.

관에 누워계신 스님의 법구는 이제라도 일어나 “대원수좌, 왔어요?” 하며 반길 것 같았다.

스님, 부디 튼튼한 몸을 받아 다시 사바세계로 오십시오. 금생에 스님과 맺었던 짧은 인연이 다음 생에는 더욱 길어지길 바라오며 멀리서 후학 삼배 올립니다. (07. 03) 도안 스님을 추모하며|

작성자 옹강산<2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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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가름(스님을 그린다-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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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스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나 혼자만의 기억

----------스님을 그린다.(한원각행)---------

나는, 어린이 불교운동과 찬불가 보급운동에 앞장서셨던 운문 스님과의 인연이 나의 친정 부모님들로부터 맺어온 사이였다.   
그래서 내 나이 24살때 남산 KBS방송국에 다니면서 자주 운문스님의 활동을 곁에서 돕고 있었을 무렵, 1968년 4.8봉축기념 어린이예술제를 진명여고 강당에서 치루었는데 그때 예술제 사회를 보게 되어, 녹야어린이회를 이끌고 오신 도안스님을 처음 알게 된 인연이 된다.

그 뒤 1969년 1월 불교어린이회와 중고등학생회를 통합한 청소년교화연합회를 선학원에서 당시 종단 장로원장 대의 큰스님을 모시고 발족하게 되었는데, 대의 큰스님 방에서 도안스님 친동생 김안수 거사가 청소년교화연 창설 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 나도 운문스님과 함께 참석하게 되어 그때에 김안수 거사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또한 대의스님께서 설계하시는 선학원 보살계 대법회에 참석하게 되어 보살수계 불명도 그때 함께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이 결국 운문스님 중매로 1971년 4월, 김안수 법사와  혼인하게 되었고, 도안스님이 김법사와의 속가 인연으로 나에겐 시숙님이 된 것이다.   
그래서 도안스님의 생모이시며, 나에겐 시어머님이 되시는 강대선화 보살님에게서 들은 스님에 대한 이야기 등, 그 외 늘 기억속에 담고 잊지 않고 있는 이야기를 간추리며, 지난 세월의 스님의 덕을 잊지 못해 이를 함께 그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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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가름(나 혼자만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