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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계와 전자매체의 고장이나 사고는 누가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이점을 감안할 때 만능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건전한 사고는 건전한 생활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심성을 맑혀주는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생각과 의식 활동도 기계문화에 의존하면 인간 자신은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앞으로 언어에 있어서도 언젠가는 새로운 변화가 예상됩니다. 인간자신의 말보다는 기계가 말하고 전자매체를 통한 영상매체가 대신해 주는 시대가 도래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특혜라고 한다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기계문화나 전자문화가 대신해 주는 것이 어찌 좋다고만 하겠습니까? 모든 신체적 조직기능도 쓰지 않으며 퇴화가 됩니다.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에 일들이 발생할 때, 우리 종교인들은 무엇을 말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 역시 대비하여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전한 생각(의식)이 건전한 행동을 할 수 있다 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전도된 사고의식으로 온갖 사회병리 현상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금전 만능주의 물량주의 요행과 권위주의는 인간 심성을 마비시키고 잘못된 판단이 갖는 병리 현상이 행동으로 이어져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도전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인간과 자연 환경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환경의 파괴는 이 지구를 병들게 할뿐 아니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다섯째가름(2000년대 종교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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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온난화 현상이라든가 바다의 해일 그리고 폭풍, 지진과 화산폭발 또한 폭우로 인한 대홍수 이러한 천재지변의 재앙도 이것 역시 인간이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데 있습니다.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이것 역시 인간의 편의주의나 또한 과대한 욕망이 스스로 자초하여 만든 인위적 재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21세기를 맞아 천년을 대비한 종교인들이 전개하여야할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화해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지구촌을 천국으로 만드는 값진 귀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믿음이라는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계율과 보시, 버리기, 비우기 지혜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믿음이요 이름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이 지구가 존재하고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순간까지 우리 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신앙인의 자세는 이름을 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끝까지 베풀어 나눔을 통한 공존의 덕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보시란 재물보시, 법보시, 무외시를 말합니다.

재물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기 마련입니다. 갖지 못한 이웃을 위해 나누는 것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생활고에 고통 받는 이웃, 기아에 먹지 못하여 죽어 가는 생명들은 이 지구촌 어느 곳에 살던지 구제하여야 할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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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시란 인생이 걸어가야 할 바른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중생의 고달픔을 쉬게 하고 인생이 걸어가야 할 바른 지침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깨달음의 세계, 그 해탈의 세계란 인생의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를 뛰어넘어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해탈의 경지를 말합니다. 또한 무외시란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갖게 하고 그 불행의 늪에서 헤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것 역시 행복을 주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종교인이 베풀어야 할 덕목입니다.

다음은 우리 종교인은 연꽃과 같이 살아가고 등불과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먼저 연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세간여허공 여련화불착수라는 경전 구절이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지은 절의 기둥에는 으레 나무판에 글을 써서 붙여놓은 것이 있는데 주로 한문 글귀라서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경전가운데서 짤막하면서도 뜻이 깊은 구절만을 골라 써놓은 것으로 주련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주련의 글귀에서도 주로 많이 쓰이는 글이 앞에든 ‘처세간 여허공 여련화 불착수’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에서 살되 마치 허공처럼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도 있고 우리 마음에 본성은 허공과 같이 크고 연꽃처럼 깨끗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허공과 같은 마음은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요 또한 큰마음 입니다. 하늘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 다니지만 새가 날아간 자국이 없고 천둥번개가 치든 하늘이라도 비가 개인 후의 하늘은 오히려 더욱 맑아 보이지 않습니까?


다섯째가름(2000년대 종교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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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마음, 무엇에든 집착하지 않는 큰마음을 허공과 같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만일 하늘에 새가 날아간 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거나 비행기가 날아간 흔적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다른 새가 날아가거나 다른 비행기가 운항하는데 지장이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새들도 거침없이 날아다닐 수가 있고 비행기도 같은 항로를 되풀이해서 운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련화 불착수’라는 글귀는 비록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살더라도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 온갖 나쁜 생각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본성 자체는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뜻이요, 한편으로는 연꽃과 같이 물들지 않는 이 본마음을 찾아서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새 천년은 그 삶의 질의 면에서 크나큰 변화가 있고 의식의 변화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심성에서 파생된 선악의 가치표준은 크게 달라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의식의 다변화, 문화적인 다원화, 빈부의 차별화에서 오는 환경적 불안과 갈등의 소지는 20세기에서 경험 못한 더 복잡한 사안들이 발생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요즈음 세상이 하도 험악해서 아무리 착하고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해도 주변 환경 때문에 잘되지 않는다고 불평들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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