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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대통령 미국순방 접견 도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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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평화통일 해외종교인 학자회의개최 기념


첫째가름(만남의 자리-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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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에서 연설하는 도안스님

민주평통 김창식 사무총장과 함께-산타모니카비치에서

91년 4월, 북한 묘향산 보현사 방문시 통일기원 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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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름(만남의 자리-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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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 입구 마애석불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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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름(만남의 자리-북한방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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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6월, 북한 외교관 방미단 초청 만찬(LA관음사에서)

사진 도안스님 오른쪽 한시해 단장, 선우학원 박사

 

91년 4월, 묘향산 계곡에서 고마태우 신부와 함

 

91년 11월, 남북불교지도자 순방일정(워싱톤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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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름(만남의 자리-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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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광복50주년 북한 통일축전 참석

평양에서 박창득 신부, 이승만 윤길상 목사외 종교지도자

95년 8월 통일축전 행사장에서-여운영선생 딸 여연구

조불연 심상련 서기장과 함께(중앙 도안스님)

98년 3월, 북경에서 남북 해외불교실무자 회담 모습


첫째가름(만남의 자리-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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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7월, 북한 큰물 피해 지원을 위하여

중국 단동 압록강 철교 앞에서

양현승 목사, 김세을 신부, 김명균 장로와 함께

98년 7월, 김일성 대학 방문 - 국제 담당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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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름(만남의 자리-북녘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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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3월

 

2002년 8월, 통일축전 / 북한적십자사 장재언 위원장

 

2002년 8월, 여연구, 여익구, 민화협(능라도 공원에서)


첫째가름(만남의 자리-북녘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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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8월, 평양 대정산 광법사 참배기념

 

2005년 북한 방문 순례단 광법사 합동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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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름(만남의 자리-북녘땅에서)

 

 


 

 

 

둘째 가름

남북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불교 교류현장을 살핀다.

무엇을 이루었나!

 

 

 

 

 

 

 

 

 

 

 

 


 

 

 

 

 

 

 

 

 

 

 

 

 

 

 

 

 

 

 

 

 


 

 

 

1991년 미국 LA 합동법회

 

1991년 남북불교 대표자 모임(LA관음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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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불교 교류를 시작하다"

남북한의 불교는 1950년에 발발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단절됐다. 반세기 동안 불교는 남북 체제와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됐다.

그 후 교류와 통일을 위한 염원에 다가서는 노력은 여러 측면에서 시도하였으나 곧바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분단 46년 만에 국내가 아닌 미국 땅에서 남북한의 불교는 처음 만났다.

북측의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약칭 조불련) 위원장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약칭 종단협)회장을 비롯한 불교종단 대표, 미국과 캐나다, 일본에 거주하는 불교계 인사들도 많이 참가하여 국제 행사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둘째가름(91년, 남북-LA합동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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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1991년 미국 LA에서 열린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관한 객관적 평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날 법회 및 행사에 대한 사진은 물론이고, 언론기사 등 문헌자료의 부재를 넘어 LA 관음사 김도안 주지와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등 몇몇 지도자들이 생을 마감함으로써 다시 고증할 기회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1991년의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는 불교 교류에 있어 출발점임으로 당시 언론 기사와 단체의 기록자료, 개인들의 기록을 참조하여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역사적인 맥락에 의한 접근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기록을 남겨 두기 위한 작은 바람이라 할 수 있다.

<LA 합동법회, 남북불교의 첫 교류> / 분단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교류 행사의 공식명칭은 ‘제1차 남북 및 해외동포 조국통일기원 불교도 합동법회’- (이하 LA-합동법회)로, 1991년 10월 29부터 11월 9일까지 미국 LA와 뉴욕 등지에서 열렸다. 북측 조불련 대표단(단장 박태호 위원장)이 그해 10월 28일 LA국제공항(LAX)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10월 29일~30일 양일간 LA 관음사에서 대표단 실무회의를 미리 개최하고, 이어서 불교도 합동법회를 가졌다.

이때 남북불교계는 10월 31일~11월 4일까지 캘리포니아주 중부에 있는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샌프란시스코등 2박 3일 관광과 LA하얏트 센트릭 호텔에서 만찬겸 환송법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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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LA에서 출발하여 뉴욕 전등사에서 환영법회를 가졌으며, 11월 5일 뉴욕 원각사 참배, 11월 6일~7일 맨해튼 자유의 여신상 관광과 UN본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참관을 거쳐, 11월 8일 필라델피아 원각사에서 환영법회를 개하고, 11월 9일 워싱턴DC 법주사 환영법회를 마지막 일정으로 마쳤다.   
조불련 대표단은 그해 11월 10일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귀국했다.

LA 합동법회는 분단 이후, 남북한 및 해외동포 불교지도자 70여 명이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법회에는 남측 16개 종단대표가 참석하고, 북측 조불련 대표단 4명, 일본의 조총련계 조불협 대표단 3명과 민단계 한불련 대표단 4명, 미국의 미주평불협과 한불협 등의 주요인사들이 참석하였으며, 남측의 불교신문에서 단독취재를 맡았다.   
하지만 이때의 취재 관련 자료는 1994년과 1998년 연이은 조계종 사태로 말미암아 대부분이 훼손되고 소실되었다.

1991년 10월 29일 오후 5시, LA 관음사 법당에서 약 2시간 개최한 LA 합동법회는 당일 오전 9시부터 식순과 발언 내용 그리고 호칭 사항과 좌석 배치, 담당자 등에 관한 사전회의를 장시간 동안 조율해서 열렸다.

그날 공동법회는 양측의 최고 수장인 종단협의 서의현 회장과 조불련의 학림당 박태호 위원장이 나란히 서서 합장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냉전의 기류가 흘렀다. 이어 10월 30일 같은 장소에서 ‘한민족불교지도자연석회의’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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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합동법회와 연석회의에는 남측 단장 서의현, 대표단 - 송월주ㆍ전운덕ㆍ박해륜이 맡고, 북측 단장 박태호(조불련 위원장), 대표단 - 홍화두(조불련 고문)ㆍ심상진(조불련 서기장)ㆍ이동철(조불련 책임부원)이 맡았다. 미국 측에서 김도안ㆍ신법타ㆍ기대원, 일본 조총련계의 재일본 조선불교도협회에서 홍봉수ㆍ서태식, 민단계에서 이법홍ㆍ이혜륜 등이 참석하였다.

그날 연석회의에서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불교인의 역할’이란 주제로 세미나 형식의 대표 발언을 가졌다. 또 연석회의에서는 남북불교 간의 정례적 교류방안, 불교문화재 공동조사, 북측지역 사찰복원 등 총 8개 항의 안건과 한강ㆍ대동강ㆍ임진강에서 유등(流燈) 법회를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매년 부처님오신날을 기해 ‘합동 연등제’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양측이 합의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남북공동의 유등 법회와 합동 연등제는 열리지 못하고 있다.

<미완의 만남, 미완성의 교류>....   
이처럼 미국 LA에서의 남북 합동법회가 평가됐다. 그것은 남북불교가 분단 46년 만에 합동법회라는 형식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단절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로부터 3년 후에 알려진 내용인데, 미국 LA에서 합동법회가 열린 다음에 남측의 한 인사가 국내 언론에서 ‘북한종교는 정권의 시녀’라는 등의 인터뷰 내용이 상당히 문제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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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름(91년, 남북-LA합동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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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속적으로 불교 교류가 전개되지 못한 것은 1993년 3월 북측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시작된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과 1994년 7월 8일 김일성주석의 사망이란 주요한 원인이 작동되어 중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비롯해 1992년 4월 북한의 헌법개정과 같이 남북관계 개선 국면에서, 조불련은 같은 해 5월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표훈사 등 전국의 사찰에서 석탄절 기념법회를 처음으로 여는 등 종교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1991년 10월 29일에 열린 LA 합동법회는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2001년 발행한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에서도 기록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인 법타 스님의 <북한불교연구> (2000)에 의하면, “미주평불협에서 1990년 11월 15일을 기해 북한의 조불련에 교류를 제의하자, 조불련은 1991년 1월 15일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남북해외동포 간담회’라는 행사 명칭과 재일본 조선불교도협회(조불협)의 홍봉수 회장과 서태식 부회장을 대표에 포함시켜 초청해 줄 것을 수정하여 다시 제의하게 된다.

이에 미주평불협은 조불련의 수정 제의에 대해 수락을 통보했다. 그리고 1991년 2월에는 재미 승려를 중심으로 ‘한민족불교교류추진미주불교협의회’(한불협, 회장 김도안, 부회장 신법타ㆍ기대원)가 창립하고, 그 총회에서는 미주평불협이 추진한 ‘남북불교 합동법회’를 적극 지지할 것을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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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미국 LA 관음사 김도안 주지와 한불협 신법타 부회장은 그해 4월 21일~5월 10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묘향산 보현사에서 처음으로 유점사 종을 33번 타종하는 통일의식을 가졌다. 또 조불련의 청사로 사용하던 평양 용화사 등에서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홍화두 고문 등과 6차례 회의를 하고, 행사 주최는 한불협으로 주관은 미주평불협이 맡기로 조정하게 된다.

이때 방북을 통해 조불련이 미국 LA 간담회에 공식 참가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라고 했다.

한편, 조불련의 미국행이 확정 된 가운데에서 미국 하와이 대원사의 대원 스님은 1991년 8월 3일~13일까지 평양에 가서 그 사실을 또 확인하였다. 8월 17일 조불련으로부터 북측 대표단의 명단과 이력이 한불협으로 제공된 다음, 8월 25일에는 미국의 한불협 회장 김도안, 부회장 신법타, 기대원이 남측으로 들어와 종단협에 공식 보고하면서 LA 합동법회가 협의, 조정하게 됐다.

그로부터 10월 15일을 기해 합동법회는 한국의 종단협이 주최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처럼 추진된 미국 LA 합동법회는 1991년 9월 남북이 유엔(UN)에 동시 가입을 경축하는 배경에서 북측의 국제관계 개선에 따른 별도 조치의 성격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LA 합동법회는 독자적인 교류 창구의 미비와 국내법적으로 한계를 보여준 미완의 만남, 미완성의 남북불교 교류였다.

/ 이지범-북한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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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석회의, 8개항 의향서 체결, 교류'물꼬'열어

남북불교교류 비망록2 - LA합동법회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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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부터 '행사 명칭' · '합의 문안' 으로 설전

"정치 떠나 교류" - "국보법 폐지" 시각차

미국 한인기독교계, 통협-조불련 연결에 도움

1991년 10월 30일 LA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남북 불교도 합동 법회 연석회의 모습

2019년 12월에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감염증이라는 전례없는 감염병으로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이 바뀌었다.

집과 사무실에서도 마스크 없이 살 수 없고, 악수 대신에 주먹치기와 눈인사 등 비접촉식 인사가 다반사이다. 그래서인지 코로나19 극복 이후라는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 상황을 넘어 이제는 함께 공생할 수밖에 없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에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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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적 맥락과도 비슷하게 ‘포스트 LA 합동법회 1991’은 1950년대에 전후 복구라는 시대적 과제와 분단이라는 민족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던 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교류와 통일을 위해 남북불교계가 내딛은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의 이전과 그 후를 살펴보는 것은 향후, 불교 교류의 필요성과 지속성에 관한 과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화석화된 냉전 이데올로기의 낡은 틀에서 진행된 첫 번째의 만남과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본다. (이지범-남북불교 비망록)

첫 만남, 설전하다

1991년 10월 말, 미국 LA 관음사에서 개최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대한 뒷담화는 1990년대 말까지 분분하다가 지금은 잊어진 이야기다. 그것은 기록의 미흡과 개인의 기억으로 비롯한 것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기록은 마치 ‘자기검열’이라도 하듯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과 없이 투영된 채로 작성된 바 있다.

1991년 10월 25일 종단협의회 명의로 작성된 ‘연석회의 자료’에서는 종단협의회・통일원・문화부・안기부 등 정부기관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또한 그때 실무를 맡았던 분들은 “내가 다 한거야”라고만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때 자료가 거의 사라지고, 보물처럼 부여안고 있는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 가운데에서의 기록은 단편적이거나 시각차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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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련 박태호 위원장과 남측 송월주 대표가 참여한 특별인터뷰 (1991.10.29. LA 관음사),

LA 합동법회와 같이 역사적인 내용은 당시 대표자를 중심으로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도 있을 수 있다.

양측의 입장이 서로 팽팽하고, 또 대표자의 최종 승인으로 결정되는 사안일수록 더욱 축약되어 기록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LA 합동법회도 행사 명칭과 일시, 장소 그리고 한 줄 평가로 기록하고 있다.

1991년 10월 28일 LA에 도착한 조불련 대표단은 남측 대표단 등과 별도의 상견례 없이 하루가 지난 다음, 29일 오전 9시부터 관음사 종무소에서 ‘남북・북남불교 대표자 연석회의(조율)를 가지면서 행사 명칭과 합의 문안에 관한 사항으로 설전(舌戰)을 가졌다.

설전은 다음 날, 연석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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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46년 만에 처음 만난 양측은 행사의 명칭 표기에 대한 이견으로 8시간 마라톤 회의를 했다.

북측은 ‘조국통일’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남측에서 ‘기원법회’만으로 하자는 양측의 팽팽한 주장은 결국 ‘조국통일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로 확정하고, 미리 준비해서 부착한 기존 현수막을 뗀 다음, 당일 오후 5시반을 넘기고 나서 창호지에 붓글씨를 써 행사 펼침막으로 붙이는 일까지 벌어졌으며, 이는 불교교류 역사에서의 명장면으로 남게 됐다.

그날 합동법회는 1991년 10월 29일 오후 6시 30분 부터 관음사 법당에서 열렸다. 개회선언을 시작으로 삼귀의례, 반야심경 봉독, 경과보고, 대표단 참관단 소개(북측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남측 이홍파 종단협 사무총장, 해외 신법타 한불협 부회장), 환영사(김도안 한불협 회장), 개회인사(남측 서의현 종단협 회장, 북측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 선물-전달, 조국평화통일 발원문 봉독(환영위원장), 사홍서원, 폐식의 순으로 마쳤다.

양측 대표단은 장시간 이동의 피로감과 첫 만남의 어색함으로 거의 대화 없이 헤어졌지만, 그날 관음사 육화당에서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과 남측의 송월주 대표가 참여한 언론사 ‘특별인터뷰’에서는 박 위원장에게 북측 불교의 현황 등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면서 북한 불교의 이모저모가 처음으로 소개됐다.

미국방문 3일째인 10월 30일 북측 숙소인 LA 월셔타워 호텔과 관음사(10월 29일)에서 열린 ‘남북불교도 연석회의’는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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