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서는 케이커라는 단체를 신뢰를 하기 때문에 케이커교도들이 보증을 서면서 추천한 나(김형근)의 제안을 북한 정부당국자들이 승인을 한 것이다. 케이커가 보증을 하지 않았다면 성사될 수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후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우선 1970년대에 방북경험이 있는 뉴욕 롱아일랜드 대학교 지창보 교수를 통해 미 국무성으로부터 북한 스님들의 미국 방문 비자발급을 협조해 준다는 서신을 1990년12월5일에 받았다. 위와 같은 사전 준비작업을 하면서 조불련에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 단체의 회장 신법타, 사무국장 김형근 이름으로 남북불교 모임행사를 1990년 11월15일에 제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불련이 보낸 전보를 1991년 1월22일 먼저 받은 후에 1991년 1월10일자로 평양에서 보낸 편지를 뉴욕에서 1991년 2월15일 받았다. - 이 제안을 시작으로 출발한 행사가 1991년10월29일 LA관음사에서 [조국통일 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로 막을 올리며 내린 결과였다. 이 행사는 뉴욕의 재가 신자들이 구상하고 중요한 준비는 하였지만 행사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서, 부득이 이에 따른 재정조달의 원활을 확보하기 위해서 본국 종단의 참여가 불가피 함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국의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주최하게 되는 형식으로 막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 행사에는 한국의 대부분의 종단이 참석하였고 재일본 조선불교도연맹도 참가하였다. 원래는 미국 동부와 서부에서 행사를 열 예정이었지만 서부에서만 하였다. - 남북불교가 서울이나 평양에서 만나지 못하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만난 것은 당시에 남한의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북한과 접촉이 안되고 대화통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46)

둘째가름(LA 남북불교?: 김형근)

*

 

또한 일본이나 중국에도 이를 추진할 불교계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1991년 '조국통일 기원 불교도 합동법회' 이후에는 중국을 통해 북경에서 남북불교계가 직접 만나 회의를 많이 하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남북불교 교류가 이루어졌고 조계종은 금강산에 목조로 신계사를 복원하였고, 천태종은 개성에 시멘트로 영통사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남북불교 교류는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을 계기로 이명박 정권부터 다시 남북 교류가 막히면서 남북불교 교류도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이후 금강산에서 신계사 건립 기념행사를 조계종과 조불련이 공동으로 몇차례 하고 있다. 불교계 인사가 금강산이 아닌 평양을 가장 마지막 방문한 것은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2011년 여러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이때 자승 스님이 조불련에 버스 한 대를 기증했다고 한다.
도안스님은 1991년 이후 2005년까지 총 16번 북한을 다녀왔다. 2005년 스님이 미주현대불교에서 모집한 참가단 22명을 이끌고 간 북한 방문이 막지막 활동이 되었다.

2017년 11월 4일, 불교교류현황 과제(세미나 자료)

* [미주현대불교]북한사찰순례단은 1차로 2005년에 도안스님을 단장으로하여 22명 참가했고, 2차 2013년, 3차로는 2015년, 2016년에 4차 순례를 끝으로 2017년부터 미국의 북한여행금지령으로 중단, 그 뒤를 잇지 못했다. <사진-2016년 개심사(칠관음변신도) 대웅전>


둘째가름(LA 남북불교?: 김형근)

(47)

 

 



 

 

*

 

도안스님은 ● 52년(당시 14세)에 경남 동래 범어사에 출가 득도 ● 63년 서라벌예술학교 문예창작학과와 66년 동국대학 불교학과 수학 ● 62년 서울 돈암동 적조암 주지, ● 71~75년 조계종 총무원 사회국, 재무국 활동 ● 75년 포교위해 도미, ● 90~92년 미서부 승가협회장 역임, ● 82~96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위원역임, ● 96~2000년 한반도 통일연구회 연구위원 역임, ● 인권문제연구소 미국중앙이사회 활동, ● 타계할 때까지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미주본부 회장으로 활약하며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해 온 불교인으로 미주동포사회에서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다. 김도안스님(6.15공동위 미국지역위원회 공동부위원장, 미주평불협 회장)은 통일맞이 나성포럼 창립 5돌 기념식에서- "2006년 통일운동 원로"로 선정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법타스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91년 이북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스스로 그 전에는 무척 보수적 인물였다고 말한다. 그는 불교인이지만 남북문제, 평화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승만 목사, 윤길상 목사, 선우학원 박사가 관계하시던 북미주기독학자회 관계자들과 교제하면서도 영항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북을 방문하여 불교사찰을 돌아보며 느낀 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1950년 전쟁을 치르고 완전 폐허가 되었던 평양시가 새롭게 건설된 것을 보고 느낀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60년 세월 남이나 북이나 너무나 변화했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이데오로기 같은 사상이나 이념 갈등에 연연하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어 분쟁을 야기시키는 시대를 끝내야 한다.


(66)

둘째가름(외지 보도 도안스님)

*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평화정책으로 바뀔 수 있도록 우리 미주동포들이 노력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김도안 스님은 미주청년들을 향해서 민족사 공부를 하여 시각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미주내 청년단체들이 통일운동하는 숫자가 별로 많지 않다고 상기시키면서 앞으로는 양적으로 발전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의 분단이 강대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기 까지 우리 민족구성원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 많다고 꼬집는다. 
우리 민족은 각기 성들이 달라 지금 남북에 약 373개의 성(김씨 ,박씨, 최씨 등 다양한 성들)이 있다고 하지만 따져보면 다들 10촌 미만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즉"우리 미주동포들만이라도 이데오로기 싸움을 초월하여 우리들은 남에 있건, 북에 있건, 해외에 있건 우리 모두가 한 민족, 한 형제자매, 한 친족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 식구처럼 생각하는 입장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자세로 정비, 정립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김도안 스님은 강연을 마치면서 2000년 8월13일 남북해외 공동행사에서 자신이 써 발표한 시를 소개하며 이 내용을 당시 남과 북에 모두 전달했다고 한다.   
그의 시는 마음에 와 닿는 민족적 시이며 동시에 뜨거운 애국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형상화 하고 있다. 김도안 스님은 그 시를 읽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만남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 백두산에서 한라에 이르는 동해, 압록강에서 한라에 이르는 서해, 무엇이 두려워 만남을 마다하는가, 만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그 많은 세월 수십년을 기다렸는데..." ---중략  


둘째가름(외지 보도 도안스님)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