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가는 길

 

1991년 한해는 7천만 모든 동포가 함께 통일을 부르짖고 나섰다. 남북한 최고 책임자는 물론 각계각층 해외 동포 너나 할 것 없이 한반도의 통일이 어서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구동성 함성을 부르짖고 나섰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통일을 하여야 하는가?

7.4공동성명에서 밝혔듯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삼대원칙에 의하여 통일을 하여야 한다고 그 명분을 걸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골이 깊은 이념적 갈등은 가시지 않고 있으며 불신의 벽은 이념적 촌보도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다.

금번 남북불교 대표자와 해외불교지도자들의 만남이 있었으나 종교적 이해나 교류와 협력을 상호 접근도 못한채 원론적인 이념적 갈등으로 만남의 그 자체로 끝을 맺고 말았다. 우리는 이러한 시점에 통일은 그렇게 쉽게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항상 입으로만 부르짖는 통일보다는 실지 우리가 통일을 어떠한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면서 종교인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일천만 이산가족이 서로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범국민적 운동이라든지 국민적 화합을 위한 신뢰회복운동 이라든지 민족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민족문화 복구운동 이라든지, 빈부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사회복지운동 이라든지, 상호 통행과 통신을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 교류협력문제를 종교인이 앞장서서 전개하여야 통일기반을 조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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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름(통일로 가는 길)

지난 시기 남북불교의 교류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앞장서신 스님을 그린다.(김형근)--------

본격적인 남북불교계 교류는 1990년 뉴욕에서 제안하여 시작하였다.

대원스님과 법타스님의 개인적인 방북이 있었지만 미주한국불교계 차원에서 북한 불교계 인사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교류하는 문제는 당시의 미주한국불교계 역량으로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과 미국과는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북한 불교계 인사를 초청하는 문제는 북한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미국 입국비자는 미 국무성의 사전 허락을 받아 중국의 북경 미 대사관에서 받아야 하는데, 북한 정부와 국무성에 연락망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불교계에서는 없었던 때다. 그래서 나(김형근)는 이 일을 불교인이 아닌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며 추진하였다. 미주현대불교(월간잡지) 주변사람들과 필라델피아 거주 황규식씨(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등이 조직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는 LA에 있던 법타스님을 회장으로 발족된 단체로 조불련에 남북불교계가 미국에서 한데 모여 회의를 하자는 '조국의 평화통일 기원 남북재미동포 불교인합동법회' 제안을 1990년11월에 하였다. 이 제안을 하기 전에 나(김형근)는 미국에서 북한과 교류활동을 하던 여러 단체와 사람들을 통해 '조불련'에 의사를 타진하였는데 그때 케이커 교도인 이행우씨로부터 북한 조불련이 "당신이 하는 행사라면 참석 하겠다"라는 언질을 전해 들은 후에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둘째가름(LA 남북불교?: 김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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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안 스님(6.15공동위 미국지역위원회 공동부위원장, 평불협 회장)은 또한 지난 해 6.15공동위 결성식 이후 미주에서 가진 보고회 자리에서 역사적인 결성식을 치룬소감에 대해 /    
"1948년 남북연석회의의 의의를 되새기며 그 의지가 꽃피우지 못하고 남북 좌우대결구도에서 우리 민족문제를 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한편, 2000년 6.15공동언을 통해 남북최고 지도자들이 우리민족끼리 손잡고 평화통일을 이루자고 합의하여 선포한 것은 정부간의 선언이었기에 우리 민족이 반드시 풀어갈 과제"라고 지적하는 한편,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근본적 문제-평화가 정착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전쟁분위기가 사라져야 한다. 미군이 주둔해 있고 남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선언만 가지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군사적 대결구도가 바뀌어야 한다. 해외동포들은 남북 동포들과 함께 이 일에 앞장서 나서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념갈등을 과감히 극복하고 폭넓게 대중운동을 벌여야 한다. 대중 속에서 민중 속에서 그 해결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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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름(외지 보도 도안스님)

외지에 보도 되었던,

김도안 스님의 조국통일 염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회의」(미국 LA 관음사, 1991.10.29-30)에는 남한의 불교대표로 서의현, 송월주, 전운덕, 박해륜 등 21명이 참석하였고, 북한의 조선불교도련맹 대표인 박태호, 홍화두, 심상련, 리동철 등 4명이 참석하였다. 한민족불교교류 미주불교협의회(회장 김도안)가 주최하여 민족통일문제에 있어서의 불교의 역할과 상호교류 등을 논의하였다. 남한의 불교대표들은 남북 상호교환 방문을 통한 공동법회, 불교유적지 공동 발굴, 세미나 개최 등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의 불교 대표들은 남한 주둔 미군철수 및 국가보안법 철폐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공동선언문이나 합의문을 내지 못하였다.

미주통일운동 원로 김도안 스님(6.15공동위 미국위원회 공동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미주본부 회장)이 06년 8월 28일 오후6시 지병을 치료 받던중 향년70세 일기로 타계했다. 입관식은 9월1일(금요일) 오후8시 한국장의사에서 열리고, 장례식은 다음 날인 2일(토) 오전10시 관음사에서 남가주사원연합회장으로 열린다.  
현재 관음사에는 고인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 고인은 1937년 4월7일생으로 전라남도 장성읍에서 부친 김기욱, 모친 강오순 여사의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포교활동차 1975년에 떠나 30여년 동안 관음사 주지스님으로 재직하면서 특히 북부조국 불교계와 교류하면서 남북 해외 불자들의 3자연대 운동과 민족의 화해협력, 자주적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또 남가주사원연합회 5대, 6대, 7대회장을 역임하고 2003년에 이임했다.


둘째가름(외지 보도 도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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