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시대적 맥락과도 비슷하게 ‘포스트 LA 합동법회 1991’은 1950년대에 전후 복구라는 시대적 과제와 분단이라는 민족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던 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교류와 통일을 위해 남북불교계가 내딛은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의 이전과 그 후를 살펴보는 것은 향후, 불교 교류의 필요성과 지속성에
관한
과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화석화된 냉전 이데올로기의 낡은 틀에서 진행된 첫 번째의 만남과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본다. (이지범-남북불교 비망록)
첫 만남, 설전하다
1991년 10월 말, 미국 LA 관음사에서 개최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대한 뒷담화는 1990년대 말까지 분분하다가 지금은 잊어진 이야기다. 그것은 기록의 미흡과 개인의 기억으로 비롯한
것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기록은 마치 ‘자기검열’이라도 하듯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과 없이 투영된 채로 작성된 바 있다.
1991년 10월 25일 종단협의회 명의로 작성된 ‘연석회의 자료’에서는 종단협의회・통일원・문화부・안기부 등 정부기관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또한 그때 실무를 맡았던 분들은 “내가 다 한거야”라고만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때 자료가 거의 사라지고, 보물처럼 부여안고 있는 자료를 공유하지 않는 가운데에서의 기록은 단편적이거나 시각차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