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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평화는 침묵과 무관심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와 수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국익과 보복을 명분으로 전쟁을 통해 자기 뜻을 성취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회피와 침묵이 평화를 지키는 자의 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가 전쟁보다 더 큰 이익이 돌아온다는 것을 모두에게 설득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자비를 가르치는 우리 종교인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을 계속해 나갈 때 머지않아 우리 조국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끝으로, 미주평불협회가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이와 같이 귀한 종교인학술대회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값진 의견들이 도출되고 형성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신 것에 대해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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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넷째가름(특별기조 연설-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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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인간이 자기존재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있는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든지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특정체제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며 삶의 본질적 질문에 답을 주는 것이므로 특정체제 안에 갇혀있을 수 없습니다.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포교와 성직자양성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으며 종교인구가 이미 전체인구의 10%인 1억 인구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동시에 종교 활동의 자유로움은 사회의 경직성을 해소 시키고 도덕성을 향상 시키며 개인의 창의성을 극대화 하여 기술개발과 자본축적의 속도에 있어서 현재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가 체제의 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실증적인 예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 우리 종교인들이 조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힘써온 역사가 있기에 종교에 대한 관심 역시 우리의 관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각 종교 지도자들이 이와같은 사항에 대해서 함께 논의하고 토의할 수 있는 기구나 채널이 있다면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사업을 보장하고 이를 토대로 서로간의 평화적인 통일작업들이 진행되는데 크게 공헌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넷째가름(특별기조 연설-이승만)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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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처절한 우리 민족의 불행한 씨앗이 이렇게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1945년 일제에서 해방이 되었으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을 뿐입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자인 김구 선생님을 안두희가 암살했습니다. 남북의 영구적인 분단을 원한 미국은 이승만을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지세력이 없었습니다.

미군정은 일제의 총독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군정을 실시하려 했고 미군정 한인요원 90%가 경험자라는 이유만으로 일제 총독부 관리들로 재임용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에 가담한 고위공직자들과 경찰들의 70~80%를 다시 공직에 채용했습니다.
친일은 호떡을 뒤집듯이 친미로 바뀌었습니다. 친일파들에게는 미국이 최고의 은인이었습니다.

숙청당하지 않고 권력의 요직과 공직에서 떵떵거리게 되었으니 죽도록 미국에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친일청산과 민족통일을 주장하는 진보세력은 물론 독립운동 가담자들과 독립투사들까지도 좌익과 빨갱이로 몰아 철저하게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의 비호아래 친일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사무실을 무장경찰들이 기습하여 강제연행, 무자비한 고문으로 적반하장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만행은 과거 친일행적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자기방어이었고, 출세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징병, 징용, 정신대마저 앞장서서 일제에 충성했던 반민족적인 자기변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188)

넷째가름(기조강연-최종수 신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종교인 역할

기조 강연(최종수 신부)

최종수 신부: 캐나다 피터부르그 한인성당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로마9:3)

모든 종교, 지금 우리시대의 화두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 등 모든 종교는 평화를 지향합니다. 하느님께서 부처님께서 전쟁을 원하십니까? 평화를 원하십니까?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하시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다시 여드레 뒤에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제자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요한 20:19-26) 인사를 나누십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과 인류에 대한 평화가 얼마나 간절하셨으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평화의 인사를 하셨을까요?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마태 5:37) 하신 말씀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가슴 깊숙이 박히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넷째가름(기조강연-최종수 신부)

(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