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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는 내생을 부른다.

동국대 김성철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의 저서 ‘승랑-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가 대한민국학술원의 ‘2012년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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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힌 모든 한이 풀려야만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다. 조금 전 나의 몸과 마음은, 지금의 그것과 같지[一]않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르지[異]도 않다. 앞의 몸과 마음에 의존하여 지금의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중도다.
우리가 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내가 그대로 내생으로 이어지지[常] 않는다. 그렇지만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는[斷] 것도 아니다, 불상부단(不常不斷 )의 중도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은 중도적으로 흘러가고, 우리가 죽는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은 중도적으로 흘러간다. 탐욕, 분노, 우치, 교만 등의 모든 번뇌가 끊어지지 않은 이상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정체는 ‘한 점 의식의 흐름’일 뿐이다. 주관적으로 보면 이는 ‘나의 주의력의 이동’에 대응된다. 나의 뇌 속의 신경세포를 훑고 있는 ‘한 점 의식의 흐름’이, 나의 모든 체험을 구성한다.

마치 ‘브라운관 TV’의 전자총에서 발사되는 ‘한 점 빛의 흐름’인 주사선(走査線)이 ‘평면 영상’의 착각을 만들어 내듯이. 불교적으로 볼 때 호킹이 말하듯이 ‘내생이 없을 수’ 있다. 다만 그가 아라한이 되었다면 그렇다.  탐욕, 분노, 우치, 교만 등의 번뇌를 모두 끊은 성인(聖人). 달리 말해서 세상에 맺힌 한(恨)이 모두 풀린 아라한이 되었을 때에는 그에게 내생은 없다.  아함경이나 니까야를 보면 아라한의 지위에 오른 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경구를 읊는다.
“나의 삶은 다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고,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다음 생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  예불문에서 향을 사르며 올리는 오분법신(五分法身) 가운데 해탈지견(解脫知見)이 바로 이런 자각이다. 해탈했다는 자각이다.  그러나 재물욕이나 명예욕, 성욕이나 식욕, 분노나 ‘종교적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를 모두 끊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우리에게 세속의 욕락에 대한 한(恨)이 남아 있는 한, ‘주의력의 흐름’과 동치인 ‘한 점 의식의 흐름’은 죽는 순간 컴컴해진 답답한 뇌 속에서 튀어나간다. 욕락을 찾아서…. 다음 생이 다시 시작된다.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박경준 교수

윤회는 오온과 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윤회방식은 여전히 궁금하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전생담은 말할 것도 없고 붓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인 宿命通 또는 宿命明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해탈의 가르침도 윤회를 떠나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윤회를 단순히 교화방편설로 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윤회’는 3세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일어나고, 한 찰나에도 일어난다고 종종 해석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첫째, 업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karma)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귀천 역시 오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바, 이것은 곧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며,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민정신이라고 하겠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공동의 노력은 물론, 그 무엇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일깨운다.

 

셋째, 불교 업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결과론적 윤리 사상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글로벌 리스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불교 업설은 단선[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평면[사회]적 차원, 그리고 공간[심리]적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심리적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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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불교 업보윤회설은 이미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과학의 발전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창조적 해석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善과 惡의 개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졌을 때, 업보윤회설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윤회는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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