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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깨달음은 ‘환상’이다

▲ 김광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한국불교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그 중요 원인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최고의 목표가 깨달음에 있다”고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 깨달음?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無我)사상을 깨닫는다는 것이고, 공(空)사상과 연기법(緣起法)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반야지혜를 닦는다든가, 선정 참선을 닦는다든가, 교학을 한다든가, 육바라밀을 한다든가, 여러 가지가 있겠다.

“그래, 그게 수행이지, 그렇게 깨달아서 부처가 되면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 열반을 얻는 거지. 그런데 뭐가 문제란말인가?” 여기까지 나는 당연한 불교의 기본을 말하였다. 그리고 열반의 정의는 “탐진치의 불길을 불어서 끈다.”이다. 그것이 곧 성불이고 불교의 목표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자. 탐진치(貪瞋痴)의 불길이 과연 깨달음만으로 꺼지는가?

“깨달음 그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깨닫는다고 해서 저절로 탐진치의 불길이 꺼지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깨달아서 쉽게 꺼진다면 그것을 “세 마리 독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치로써 깨닫는다고 해도, 마음의 갈애심은, 마음의 탐욕심은, 마음의 증오심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즉,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은 우치(愚癡)라는 한 마리 독사만 잡을 뿐, 나머지 두 마리 독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깨달으면 자연히 (혹은 쉽게) 貪과 瞋은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깨닫더라도 마음 밑바닥에 있는 갈애심, 애욕, 소유욕, 자기집착, 자기애(自己愛) 이런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바로, 자기 마음(욕애와 갈애)을 조복 받지 못하고, 참선해서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할 일을 다 했다고 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도 이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우치(愚癡)를 극복하여 해탈한 것을 혜(慧)해탈이라고 하고, 갈애와 증애심을 극복한 것을 심(心)해탈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그것은 생각 머리의 해탈과, 마음 본능의 해탈이다.

그래서 원효(元曉)도 마명(馬鳴)도 해탈로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우리를 결박하는 장애(障碍)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고 했으니, 그것이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이라고 했다. 논서에서 말하는 소지장이 법집을 일으키는 장애라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머리의 장애이다. 그보다 더 무섭고, 더 어려운 것이 가슴의 장애인 탐심과 진심이다. 탐심은 실제로는 raga를 번역한 말로, 그것은 물질적인 탐욕보다는 “애욕의 근본”을 말한다. 그러니 그것이 단지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단박에 없어진다는 것은 공허한 억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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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면 어찌해야 탐진치가 조복되는가

탐진치를 조복 받으려면 일단 육바라밀이나 8정도를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한국의 선종이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고 하면 6바라밀이나 8정도는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바라밀에서도 <보시, 인욕, 지계>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정, 지혜”만  내세운다. 8정도 중에서 선정만 중요하다면 어째서 “성스러운 도”가 8가지나 된다고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 하셨겠는가.

 

대승의 초기 성자들은 소승적 깨달음 수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매우 노력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보살사상이고 이타사상이다.

3. 참선할 자격

사람들은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을 열심히 한다. 그러나 참선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6바라밀의 네 가지를 잘 수행한 사람이다. 그 네 가지란 보시, 인욕, 지계. 정진이다. 선방에 들어가 앉을 자격은 보시 인욕 지계를 잘 수행해 마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경전도 충분히 공부해야만 선방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그것이 곧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의미이다. 사회, 이웃생각 안하고, 정치 경제에도 관심 없고, 사회 도덕성에도 관심 없고, 사회 교육문제, 가정문제에도 관심 없이, 그저 참선만 한다고 깨달음이 저절로 이루어지는가? 깨달음이란 그런 게 아니다.

4. 부처가 되고 나서는?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성불(成佛)한다고도 한다. 열반(涅槃)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깨달은 후의 즐거움, 그것을 선종에서는 극찬한다. 한(閑)도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도인이 한가한가? 도인이 한가해도 되는가?그럼 깨닫고 나서는 뭘 해야 하는가? 당연히 보살행을 해야지. 보살행이 한가한가?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을 온 인도 대륙을 헤매고 다니시면서 왜 고생하셨나?

코삼비에서 제자들이 속 썩일 때 괴로워하시고, 제바달다의 모함과 종단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왜 그리도 동분서주하셨나?

유리왕(위두다바)이 석가족을 멸망시키려고 군사를 몰고 오셨을 때 세 번이나 유리왕께 왜 간청을 했나?

자신의 일족이 멸망하고, 왕이 된 사촌동생 “마하나마”가 물속에 빠져 일족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바위덩어리를 몸에 묶고 물에 빠지는 비극을 왜 목도하셨나? 불교를 마가다국의 국교로 발전시킨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그 아들 아사세 왕(아자타사투)을 달래서 조복시키기 위해 그리도 애쓰셨나? 잘 생각해 보자. 그것이 깨달은 후 도인의 한가한 모습이던가. 그래서 당신께서는 세수 80에 지친 몸을 이끌고 고요히 열반하고자 해도 수많은 제자들의 만류를 당하여 어찌 하셔야  했나?

깨달은 후의 보살행, 이타행에 관심이 없고, 그저 깨달으면 한도인(閑道人)이 된다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은 매우 이기적인 깨달음이고, 매우 암적(癌的)인 깨달음이다.

 

5. 올바른 깨달음?

그럼 어떤 깨달음이 올바른 깨달음인가? “잘못된 깨달음”으로 넘어가 버린 온통 그릇된 깨달음은 모두 환상이라는 주장을 계속 해야만 한다.

다시 정리하자.

① 불교의 목적은 해탈, 성불이고, 인생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② 그것을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을 조복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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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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