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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소중함을 깨달아

지혜로운 삶을 살아 갑시다

포교사 곽노영

우리가 인연, 인연 (因緣)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정작 그 인연이 지니고 있는 뜻이 무엇이냐고 반문해 보면 선뜻 그 답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즉 결과) 를 생기게하는 내적인 직접원인 즉 근본원인을 “인”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이를 도와주는 간접적인 원인인 보조원인을 “연”이라고 합니다. 인을 도와서 과를 맺게하는 것을 “연”이라고 합니다. 그 외부의 연(외연)은 바깥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뜻합니다.  꽃나무를 싹티여 자라게 하기위해서는 꽃씨를 땅에 심어야 합니다. 그 씨앗이 바로 근본원인 즉 직접적인 원인인 내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땅속에서 발아되어 땅위로 솟아오르려면 햇빛, 물, 습기, 바람, 온갖 거름등 모든것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어 주어야 그 돋아난  싹이 무럭무럭 성장할수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직접원인 즉 근본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 즉 보조원인을 연이라하여 이것을 합하여 인연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화합되지 않으면 어떠한 결과도 가져올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일러 곧 인연화합의 법칙이라 합니다. 즉 우리 불교교리엔 인, 연, 과라고 하는 인연법칙이 있어, 이 법칙을 따르면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되고 따라서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워하지 않을수가 없고 귀하게 여기지 않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러한 인연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면서 스치는 인연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반가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연법칙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삶의 지표로도 삼는다면 지금과 같은 물질문명의 발달로인해 인간성이 점점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우리 불자들만이라도 인간성을 다시 회복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이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변화무쌍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 바로 이 인연이라고하는 법칙이 있어 변화무쌍을 만들어 내어 인간도 태어나고 모든 사물도 발생하고 만나고 헤어짐도 이루어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물의 생멸변화(生滅変化)에는 인연화합(因緣化合)의 법칙이 있으며 존재와 존재사이에는 상호상관성(相互相関性) 법칙이 그리고 우리인간에게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처럼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시간속에는 무상無常의 법칙이 있고 공간속에는 무아無我의 법칙이 있습니다. 또한 업業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이, 우주의 법계에는 성주괴공 成·住·壞·空 법칙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만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 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인연도 중요하지만 헤어지는 인연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인연이 다가와 성숙해질때는 하는 일마다 순리대로 잘 이루어집니다. 가정도 평화롭고 질병 재난등도 오지않아 일체가 편안합니다. 인연은 변합니다. 늘 움직입니다. 인연은 모이는 성질과 흩어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지않고 움직이고 변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여러 인연이 모여 도와주어야 하는데, 한 인간의 생명이 탄생해서 한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런 수많은 인연가운데 어떤 인연에 의해 태어나고 죽는가? 그것은 바로 12 연기법 (緣起法)에의한 열두가지 과정을 통해서 생(生)과 사(死)가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현상은 인과(因果)의 법칙과 인연(因緣)의 법칙에 의해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으며 또한 이런 연기((緣起)법칙가운데 우리가 현재 존재하면서 현실로 나타나는 생과 사의 현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줘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12연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 이세상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하는가? 그것은 늙고 병들기 때문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어야하는 괴로움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태어난 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태어나는가? 태어나는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원인은 무엇으로 인하여 생기는가? 애착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애착하는 바가 있어서 태어난다고 했으니 태어난 후의 과정을 12 연기(緣起)의 법칙을 통해서 살펴 본다면, 현재의 삶은 과거 2인에 의해서 받는 것이며(즉 무명과 행 無明 行), 미래의 삶은 현재 3인에 의해서 받는 것입니다(즉 애 취 유). 현재 인생의 삶은 현재 5과에 의해 받는 것입니다(즉 식 명색 육입 촉 수). 이것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5가지 결과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회심곡은 서산대사께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시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위해 지으신 곡으로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용인즉, - 이세상 천지만물중에 사람 밖에 또 있는가? 여보시오 시주님네들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이세상에 나올적에 뉘 덕으로 나왔는가? 모든 인연 공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빌고 어머님전 살을 빌며 칠성님전 복을 빌어 이내 일신 탄생하니 한두살에 철을 몰라 부모님 은덕 알을 손가?-  이 얼마나 효심을 비롯해서 뜻이 있고 내용이 간절합니까? 여러분! 이 회심곡의 한두 구절만이라도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수만 있다면 불교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인생공부를 완전히 습득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7면에 계속>


(3)


Right view-the Place of Coolness 바른견해-아찬 차 법문(무념 옮김)

우리는 감각을 제어하는 수행은 하지 않고, 괴로움이 외부 대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은 습관과 충돌하고, 진리는 욕망을 충돌한다. 그래서, 수행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것이고,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우리의 마음은 어둠에 잠겨 있어, 진리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사람들은 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바른 것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완전한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정이, 계속 자신을 속이고 있다.

우리는, 이 마음(감정)과 견해를 가이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직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길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인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믿거나 믿지 않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모두 똑같이 들어주어야 한다. 부주의하지 않고, 중간쯤에서 머물러야 한다. 듣고 나서, 그것을 명상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바른 결과가 일어난다.

지혜로운 자는 들었던 가르침을 믿기 전에, 그 가르침에 대해 명상하고 원인과 결과를 스스로 보아야 한다.

스승이 진리를 말했다고 해도, 맹목적으로 믿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아직 스스로 진리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나는 일찍 수행을 시작했으며, 많은 거짓된 가르침을 보아왔다. 예를 들어 “이 수행은 매우 어렵다. 정말 어렵다”라고 하는 법문처럼. 수행이, 왜 어렵단 말인가? 이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많은 스님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올바른 출가생활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산과 숲으로 도망쳤다. 비구와 사미 대중들에게서 도망쳤다.

그들은, 나처럼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대충대충 살았다. 저 사람은 이 사람과 같았고, 이 사람은 저 사람과 같았다. 그것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거나 함께 있거나, 여전히 나는 평화롭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대중들과 함께 있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살고 있는 장소, 음식, 날씨 때문이라고, 이것 또는 저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끝없이,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 헤맸다. 두타행자로써,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다. 그러나 일이 여전히 바르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깊이 숙고했다.

“일을 바르게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도 불만스럽고, 몇몇과 함께 살아도 불만스러웠다. 왜 그러는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나는 불만족스러운가? 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도 좋지 않군. 저기도 좋지 않군.....”이렇게 계속 됐다.

붓다는, 자칼을 보았다. 그 들개는 자기가 살던 숲에서 뛰어나와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덤불숲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덤불숲에서 뛰어나왔다가, 다시 빈 나무둥치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러다가, 다시 굴속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나왔다. *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왜 그런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 자칼은, 구더기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시 서 있다가도, 구더기가 살을 파고들 때면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했던 것이다. 

“비구들이여, 오늘 오후에 자칼을 보았는가? 서있어도 몸이 괴롭고, 달려도 몸이 괴롭고, 앉아도 몸이 괴롭고, 누워도 몸이 괴롭다. 덤불숲이나 빈 나무둥치나 굴속에 있어도, 몸이 괴로웠다. 자칼은 서있음으로 해서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앉아있음으로 해서, 달림으로 해서, 누워있음으로 해서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덤불숲, 굴속 때문에 몸이 괴로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구더기에 감염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우리 비구들은, 자칼과 같다. 불만족은, 잘못된 견해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을 제어하는 수행은 하지 않고, 괴로움이 외부 대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왜 그런가?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들이 우리에게 (사물을) 바르게 보라고 가르칠 때도, 이와 같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저항하고, 그것이 불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모든 잘못된 견해에서 해로운 결과를 보게 된다면, 그때에서야 거기를 벗어날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실제 수행해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반대로, 바른 견해를 가지면 어디를 가든지 만족스럽다. 나는 수행을 통해, 이것을 확인했다. 비구, 사미, 재가자들이 나를 찾아온다.  바르게 머무는 곳, 냉정하고 객관적인 곳은, 바로 바른 견해이다. 그 이외, 다른 곳을 찾을 필요가 없다.

불행이, 그대의 ‘자아’인가? 주체가 있는가? 그것이, 진짜인가? 나는 불행이 진실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영속성이 있는가? 행복의 주체가 있는가? 느낌일 뿐이다. 사랑에, 영속성이 있는가?

미움과 분노는,  이런 감정들은, 마음속에 잠시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상일 뿐이다. 이것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지만, 어디에도 실체를 찾을 수 없다.

태어남, 살아감, 죽음의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무지한 자는 끊임없이 달리고 붙잡는다. 거기에 진실한 것은 볼 수 없고, 끝없는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이것을 모르면, 지혜보다는 생각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전혀 지혜가 없거나!

우리는 행위에 대한 해로운 과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포기한다. 우리가 수행의 진짜 이익을 보고 나면, 비로소 수행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마음에 ‘선’이 깃들도록 노력하기 시작한다.

만약 그대가 붓다께서 설해놓은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두 가지를 초월할 것이다. 양극단이다. 수행자의 길이 아니다.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과 괴로움에 몰두 하는 것이다.

이쪽은 행복, 저쪽은 불행이다. 마음이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가면서,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자아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행복과 불행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열반의 바다에 도달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양쪽에 침몰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진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수 있다. 행복과 불행(즐거움과 괴로움), 사랑과 미움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것들을 따르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과 괴로움에 몰두하는 것을 놓아버린다. 이것이, 바른 수행이다. 양극단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결국 평화에 도달할 것이다.  ★


위 글은 페이스북을 통해 널리 불법의 이해를 위해 소개하고 계시는 무념스님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