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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개혁이냐
제도개혁이냐
왜 부처님께서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 vinaya)을 제정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문득 율장의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가 바로
제도개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계율이 제도개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았다.
만일 출가자 개개인의 의식개혁만으로 청정한 승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부처님께서 굳이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승려들이 사의법(四依法: 걸식, 분소의, 수하좌, 진기약)의 정신에 따라
출가자로서의 위의(威儀)를 지키고 수행에만 전념했다면, 부처님께서는 굳이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출가자 개개인이 양심에 따라 출가자로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만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는 굳이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의식개혁만으로는 청정한 화합승가를 이룰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개개인의 의식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아주 사소한 계율까지 제정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계율이라는 제도개혁
없이는 다양한 부류의 출가자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성스님 글에서>
화엄연기사상에 의하더라도 내적인 의식개혁과 외적인 제도개혁은 같이 가야하는 것일 것이다. …… 집단의 의식은 인정하지 않고 개인의 의식만
인정한다면 이것이 바로 ‘아트만 사상’이다. 따라서 개인의 의식개혁과 정치?경제?사회?교육?복지제도 등의 집단적인 (의식)개혁은 더불어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쪽의 개혁을 완벽히 이룬 다음에서야 다른 쪽의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밀고 당기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중도연기일 것이다. 불교승단이 그나마 이정도로 수천 년 동안 유지된 것도 불교승단이 갖춘 훌륭한 제도 덕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불교계의 타락과 혼란은 개인의식에만 치중하여 극도로 몸집이 커진 집단의식(제도)을 소홀히 대하고 방치한 책임이
크다. 변하는 세상에 맞추어 변하고 개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유아사상이다.
<강병균 교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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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1일 ******** <문서포교 이메일 NewsLetter> ********
<제 4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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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최후의 당부
"아난다야, 비구 승단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이냐? ...........................
아난다야,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열반에 든 후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수행자는 열심히 정진하는 최상의 수행자가 될 것이다."
일아스님 역편 / 빠알리 경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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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과 위빠사나(vipassana)의 다른 점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도구로 화두참구를 들고 있고 위빳사나에서는 해탈의
방법으로서 법을 수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화두는 고정된 대상이고 법은 변화하는 대상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참구를 통해서 언로와
심로가 끊어져 주와 객, 심과 법을 초탈한 성을 즉각적으로 볼 것을 다그치고 위빳사나에서는 법을 매순간 무상/고/무아로 꿰뚫어 궁극에는 공하고
모양을 여의었고 일체 의도가 끊어진 해탈을 성취할 것을 가르친다. 화두참구는 직관에 바탕하고 수관은 분석에 바탕한다. 비록 참구의
대상은 다르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을 사마타에 걸린 수행으로 간주하거나 위빳사나를 적정처를 닦는 선정
수행정도로 치부하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리고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무시하고 대신에 인가를 중시한다. 한편 해탈을
주창하는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한 분석지를 중시하며 대신에 인가는 중시하지 않는다. <각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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