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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와 업(業=行爲) 그리고 무아(無我)의 관계

종교적 불교와 세속 불교 양립 가능한가?

무엇이 업(Karma)을 운반하는가?

무엇이 한 생에서 다음 생을 업의 종자를 운반하는지는 불교 초기부터 불교도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였다. 빠알리 전승은, 발견할 수 있는 자아가 있어야만 환생이 일어나고 다음 생에 업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환생은 식()의 연속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각 순간의 마음은 동일한 인과적 연속성의 구성원들처럼, 직전의 순간과 다음 순간으로 연결된다. 기억들, 습관들, 업력 등의 보존되는 것은 심상속(心相續, mindstream) 연속성을 통해서이다. 죽으면 심상속은 새로운 물리적 신체를 지원하는 일을 맡으면서 계속된다. 발견할 수 있는 자아가 없이, 이 비인격적인 과정이 일어난다. ()들의 인과적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명목상으로 확인된다.

빠알리 경전들과 주석서들은 업을 예시하기 위해서 종자의 비유를 가끔 사용하지만, 그들은 업이 어떤 실질적인 본성을 가진 종자를 남겨두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업은 잠복해 있다가 적당한 조건들이 합쳐지면 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행동은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어딘가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선율의 음표는 류트 속에 머물지 않고, 류트가 연주될 때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보다는, 류트와 공기와 음악가에 의존해서 선율이 생기는 것이다.

붓다고사(Buddhaghosa,佛音)는 이렇게 말한다.

한 연속체 안에서 결과가 일어날 때, 그 결과는 타인의 것도 아니고 다른()에서 온 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동일성과 절대적인 타자성(他者性)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동일성'은 업을 만든 때부터 그 결과를 경험할 때까지 지속되는, 변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타자성'은 한 사람이 행동을 하고, 그 삶과 전혀 다르고 관련이 없는 사람이 그 결과를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보다는 경험의 연속성, 즉 무상(無常)한 사람의 연속성이 있어서, 계속해서 변하고 있고, 업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하면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걸쳐 있다. 이 설명은, 행동을 만드는 사람과 그 결과를 경험하는 사람이 내재적으로 하나인 것도 아니고,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중관학파의 설명과 일치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온들에 의존해서 명칭이 붙어진 것이고, 따라서 ''라는 것은 단지 이름에 의해서 존재한다.

<삼매왕경>은 이렇게 말한다.

윤회의 상태는 꿈과 같다... 이 세상에서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가거나 이주하는 사람은 없다. 여전히 행해진 행동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결과들이 세상에서 무르익는다. 행동들은 영속적이지도 않고 허무로 떨어지지도 않고, 쌓이지도 않고, 지속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한 행동들의 결과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한 행동들의 결과를 당신이 경험할 수도 없다.

중관학파들은 업의 종자의 저장소를 두 가지로 기술하는데, 하나는 임시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지속적인 것이다. 우리의 생애 동안에 적용하는 심식(心識)의 연속성은 업의 종자들의 임시적 기반이다. '단지 나', 즉 온들에 의존해서 명칭이 붙은 ''는 지속적인 기반이다. 성자들의 공성삼매, 기은 잠, 죽음 과정 동안에도 존재하고 있는 '단지 나'는 업의 종자들을 운반한다. 그렇더라도 '단지 나'는 명칭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분석을 해봐도 그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빠알리 전승과 산스끄리뜨 전승에 따른, 무아(無我)에 대한 이 간단한 논의는 두 전승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이 놀랍지 않은 것은 두 전승이 모두 같은 스승인 부처님에게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