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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12연기의 재해석

退翁 性徹 큰스님

1993년  가야산 해인사에서 입적

십이연기에 대한 해석의 문제인데, 시간적 인과(因果)관계로 보는 해석과 존재의 원리로 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연기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연기를 소승의  생멸(生滅)의 견해로만 볼 것이아니라 법계(法界)의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존재의 법칙인 까닭을 살펴 보겠습니다.

 

존자(尊者) 마하구치라는 존자 사리불(Sāriputta)에게 이렇게 물었다. “벗 사리불이여, 노사(老死)는 자기가 지은 것[自作]입니까, 노사는 남이 지은 것[他作]입니까,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또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벗 사리불이여, 생(生)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벗 사리불이여,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식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

“벗 구치라여,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名色)에 연(緣)하여 식(識)이 있습니다.”

“벗사리불이여, 이 말한 바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벗이여, 비유하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명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에 연하여 명색이 있습니다.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으며, 육처에 연하여 촉(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입니다. 벗이여, 만일 그들의 갈대 묶음 가운데서 하나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넘어져 버리며, 이로 인해 의지하던 묶음이 함께 쓰러져 버립니다.

벗이여, 그와 같이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식의 멸함이 있으며, 식의 멸함에의해서 명색의 멸함이 있으며,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육처의 멸함이 있으며, 육처의 멸함에 의해서 촉의 멸함이 있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입니다.” [南傳大藏經 13 相應部經典 2卷 pp. 164~166]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行)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行)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行)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 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있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즉 연기란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하여 생겨난다는 생성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모든 일체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연기를 만물이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 해석이 됩니다.  후대에 오면서 생성의 원리를 말하는 시간적 관계로 보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연기의 근본 성품에는 앞의 남전장경에서 본 것처럼 진여(眞如)의 의미도 포함되고 있는데,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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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욕지족少欲知足하라

晶湖堂 聲準 큰스님

1977년 설악산 신흥사에서 입적

노벨 경제학상 후보에 오른 독일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슈마허라는 사람이 있다.  검소와 절제를 기조로 하는  불교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저술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유명한 책을 썼다.

슈마허는 이 책에서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물질주의적 성장과 개발을 지향하는 현대경제학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불교도들의 생활양식을 보면 놀랄만큼 적은 수단으로 크게 만족하는 생활을 한다. 경제학자에게는 이 점이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학자는 언제나 보다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 적게 소비하는 사람보다 잘 산다고 가정하고, 연간 소비량에 의해 '생활수준'을 측정하려 한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이러한 방식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소비가 인간행복의 단순한 수단일 뿐이며, 목적은 최소한의 소비에 의한 최대한의 행복을 얻는데 있다고 믿는다."

슈마허의 지적처럼 불교도들은 소비지수가 곧 행복지수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욕심을 줄이고 소비를 최소화함으로써 정신적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들이 옷 세 벌과 밥그릇 하나를 전 재산으로 삼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다.  불교도들의 이러한 태도는 물질주의적 소비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몽상으로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물질주의 경제 논리가 추구해온 세속적 경제논리의 기둥이 결국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무제한적 재화의 축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소비 경제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극도의 긴장과 압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네 것도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으로 여기는 탐욕적 돈 벌레가 되지 않으면 극대화된 소비 경제의 구조에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없도록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경제적 소외와 좌절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는 마침내 재화의 축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태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비의 극대화가 최고의 미덕인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부모의 유산을 둘러싸고 일어난 형제간의 법정싸움은 바로 물질주의적 경제구조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부모도 살해하고 순결도 팔고 사기나 강도도 사양치 않는 반인륜적` 반인간적` 반도덕적 행위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개발과 성장, 그리고 소비의 극대화 만을 우선으로 하는 물질주의 경제학의 한계와 고민이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해 불교는 매우 특별한 처방을 제시한다.

많이 갖기 보다는 적게 갖는 것이 아름답고, 채우기 보다는 비우라고 권한다. 어떤 경제학자도 상상하지 못한 이 불교적 경제관이야말로 소비 경제가 불러온 현대사회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다.

"저 히마라야를 둔갑시켜 황금으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곱으로 늘린다 해도 사람의 욕심을 다 채울 수 없다. 욕심을 채울 수 없는 곳에서 분쟁과 정복과 슬픔이 끝없이 되풀이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버리고 비우는 곳에 행복의 길이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의 부자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받은 불교의 수행자들은 가난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간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렇다. 이것은 석옥청공이라는 선사가 쓴 게송이다.

白雲買了賣淸風 散盡家私徹骨窮

留得數間茅草屋 臨別付與丙丁童

하얀 구름을 사려고 청풍을 팔았으니 살림살이 바닥나고 뼛속까지 가난하네.

겨우 남은 건 두어 칸 띠집뿐이니 내가 떠난 뒤에 그마저 태워 버리게.

 

이는 수행자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물론 세속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배울 것은 만족을 얻기 위해 재화를 많이 축적하는 대신, 욕심을 줄임으로써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물질적 행복에 대해 결코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절제와 검소의 태도를 잊지 말라는 주문이다. 소유의 집착을 버릴 때 괴로움의 윤회바퀴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가르친다. 적은 것이 아름답다. 소욕으로 지족할 줄 알아야 한다..


본지는 LA 불교사찰과 연대하여 한인사회에 널리 불교포교지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