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무념스님 facebook 글을 담아 놓다.]

 

12연기

12연기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다.

즉 어떻게 괴로움이 일어나고 어떻게 괴로움이 소멸하는지 그 인과의 고리를 설명한다.
12연기는 불교의 핵심교리라서 불자라면 다 알고 있는 이론이지만 설명하는 사람마다 복잡하게 설명하다보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뻔하고 복잡한 해석보다는 심플하면서 쉬운 해석을 해보겠다.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무명 유신견
행 과거의 유신견의 활동
식-명색-육입 과거의 유신견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몸과 마음
촉-수-애-취 현재의 유신견의 활동
유 현재의 유신견의 활동으로 강화된 유신견 또는 변화된 유신견
생-노사우비고뇌 변화된 유신견으로 생겨날 미래의 괴로움유신견(무명)으로 하는 행위는 업을 형성(행)한다.
그 형성된 업이 현재의 몸과 마음[식, 정신과 물질(명색), 여섯 감각기관(육입)]을 형성한다.
현재의 몸과 마음을 기반으로 유신견이 활동하는데, 그것이 접촉(촉), 느낌(수), 갈애(애) 그리고 집착(취)이다.
즉, 접촉, 느낌, 갈애, 집착은 현재의 정신활동이다.
현재의 정신활동을 기반으로 새로운 업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존재(유)다.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유신견이다.
그 새로운 유신견이 미래의 생사의 괴로움으로 이어진다.'아니, 유신견은 하나의 법이고, 하나의 성질 아닌가요?'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교과서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유신견도 사람마다 제각기 다양한 것이다.
강인한 유신견, 나약한 유신견, 포악한 유신견, 부드러운 유신견, 원칙주의자 유신견, 타협하는 유신견, 의지가 강한 유신견, 비굴한 유신견, 카리스마가 강한 유신견, 의타적인 유신견, 성욕이 강한 유신견, 재물욕이 강한 유신견, 명예욕이 강한 유신견, 권력욕이 강한 유신견, 믿음이 강한 유신견, 지혜가 강한 유신견, 등등...
땅 같은 유신견, 물 같은 유신견, 불 같은 유신견, 바람 같은 유신견, 콘크리트 같은 유신견, 푸딩 같은 유신견 등등...
이렇게 사람마다 각기 과거의 정신활동의 결과로 다양한 성질의 유신견을 가지고 있고, 현재의 정신활동의 결과로 새로운 유신견을 형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12연기를 분석해놓고 보면 이해가 훨씬 쉬울 것이다.
어떻게 하면 12연기의 회전을 멈추고, 회전을 무너뜨리고, 회전에서 탈출할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무명(유신견)을 무너뜨리면 상황이 끝나는 것이다.
상황 끝, 뒷처리하고 해산이다.
뒷처리는 남아있는 잔당을 처리하는 보림을 말한다.
그래서 경전에서 12연기를 소멸시키는 정형구가 무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우비고뇌가 멸한다."

그래서 수행은
"유신견을 무너뜨려라. 유신견을 무너뜨리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유신견을 무너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신견의 활동을 잘 관찰해야 한다.
어떤 것이 유신견의 활동인가?
그것은 갈애와 집착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탐욕, 분노, 시기, 질투, 인색, 자만, 우월감, 열등감 등과 같은 번뇌들이 유신견의 활동이다.
그래서 갈애와 집착, 즉 번뇌를 관찰해서 유신견을 무너뜨리면 깨달음에 도달한다.
이것이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인 연기의 법칙,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다.

 

 

 

 

 

대승에서의 연기

대승불교에 들어오면 연기에 대한 전혀 다른 법문을 듣게 된다.
"중도가 공이고, 연기이고, 깨달음이다."
그럼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아니, 중도는 말 그대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길(中道)'이지, 어떻게 중도가 곧 깨달음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연기는 12연기이고, 12연기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명한 것인데, 어떻게 연기가 곧 깨달음이라는 말인가?
혹시 12연기를 이해하면 깨달음이 일어난다는 뜻일까?
그런데 12연기는 이해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이것은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초기불교는 항상 깨닫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 법을 설하다.
붓다는 항상 눈높이 교육, 유식한 말로 '근기 설법'을 하신다.
하지만 대승은 항상 깨달음 이후를 설명한다.
초기불교는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 항상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대승은 '그 너머(beyond)'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라도 사용처가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도 그 너머를 설명하는 법문이 있기는 하다. 극소수 상근기를 위한 법문에 가끔 등장한다.)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어떻게 깨달음에 도달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거기서 중도는 팔정도이다.
그러나 대승에서의 중도는 말이 중도일 뿐 사실은 '가운데 길'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냥 '깨닫고 보니 가운데더라.'라는 뜻이다.
"유신견이 사라졌어. 내면은 텅 비어 나라고 할 것이 없어. 텅빈 공이야. 그런데 여전히 감정도 있고, 느낌도 있고, 생각도 있어. 여전히 행위가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행위의 주재자가 없어. 그래서 텅 비었는데 텅 빈 것이 아니야."
그래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중간이다.'라는 뜻에서 중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초기불교에서 연기는 깨닫지 못한 자에게 어떻게 괴로움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소멸하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의존 연기>"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12연기>"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다.

반면에 대승에서 말하는 연기는 '깨닫고 보니 모든 현상들이 연기되어 일어나더라."라는 뜻이다.
"유신견이 소멸했어. 내면은 텅 비어 나라고 할 것이 없어. 텅 빈 공이야. 그런데 여전히 감각기관이 작동하고, 느낌도 작동하고, 생각도 작동해. 여전히 행위가 일어나고 있어. 그런데 행위의 주재자가 없어. 그러면 뭐가 행위를 하지? 뭐가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지?"(못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일어나는 의문.)
라고 했을 때,
"모든 행위가 연기되어 일어난다."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대승에서의 연기는 '원인과 결과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일어난다.'라는 뜻이다.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데에는 주재자가 없어.
볼 때 보는 자가 없어.
들을 때 듣는 자가 없어.
느낄 때 느끼는 자가 없어.
인식할 때 인식하는 자가 없어.
생각할 때 생각하는 자가 없어.
행위할 때 행위하는 자가 없어.
원인과 조건이 충족되면 행위가 일어나고 원인과 조건이 소멸하면 행위가 소멸해.
개아는 소멸하고 주재자도 없고 실체가 없는데 행위는 여전히 일어나."
이것을 '연기되어 일어난다.'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질 뿐!
그 안에 내가 없다.

이 이치를 알면 바로 깨달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생각이 많은 범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이것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번뇌가 다 떨어져나가고 생각이 정지되고 고요함만이 남아있는 상태가 최소한 한 시간 정도 지속되는 '현상에 대한 평온의 지혜'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이 이치를 이해하는 순간 깨달음이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