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시대적 요청과 불교의 역할

송희식(새문명아카데미 원장, 변호사)

1. 지금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문명의 전환

우리는 지금 작년 이맘때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처해있다. 바로 IMF 시대이다. 이처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10여년 전에 시작되었다. 1989년에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고 뒤이어, 공산권이 순식간에 붕괴한 것 또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미국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10년 후 또는 3년 후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대공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처럼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던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오늘 우리가 문명의 거대한 전환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전환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문명이 전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명의 전환은 상식적인 현실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이 잘 안 되는 그러한 변화이다.(우리의 상상은 대개 상식의 한계 안에 있다) 문명이 전환한다는 것은 이처럼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들이 모조리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문명의 전환을 우리 선조들은 한 번 겪었다. 구한말의 조선왕조시대로부터 지금 현재의 사회 즉 서구 근대문명사회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2. 근대 문명에로의 전환

1) 물질적 차원의 변화: 농업적 삶에서 공업적 삶으로

조선시대는 삶의 물질적 기초가 농업이었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양반계급이라고 하더라도 실은 농업에 종사하는 지주였다. 상업이나 공업은 극히 적은비율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것이었고 산업적으로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에는 농업이 우리의 삶의 성격을 규정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근대 서구문명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우선 삶의 물질적 차원이 완전히 바뀌어 진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장사를 하거나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집약적으로 1960년대 이후에 겪었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10%선으로 떨어졌다. 이제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공업적 제품, 물질적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따라서 부자라는 개념도 바뀌게 되었다. 농업사회에서의 부자는 천석꾼 만석꾼과 같이 쌀을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상업사회, 공업사회에서의 부자는 더 많은 화폐를 가진 사람, 더 많은 공업제품, 예를 들어 아파트나 냉장고, 승용차, 피아노 같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었다.

2) 정신적 차원의 변화: 도덕적, 수행적 정신에서 논리적 이성적 정신으로

문명의 전환은 인간의 정신적 차원도 변화하는 것이다. 근대이전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회가 종교적 도덕적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양반계급은 비록 불교도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 사고방식은 도덕적인 내용이거나 수행적인 것이었다. 삶에서 수행이나 종교적 행위가 중요한 것이었다. 도덕적, 수행적 정신이 비합리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합리적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을 포괄하는 총체적 인간정신의 중심에 도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근대이전의 정신이었다. 서구 중세에는 그 중심에 신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근대정신은 합리적 정신이고 이성적 정신이다. 가령 중세에 처음 화폐가 상용될 때 기사계급이나 영주계급은 투자라는 개념이 없었다. 100만을 투자하여 사업을 해서 20만원의 이익을 남긴다는 식의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화폐중심의 경제체제하에서 급격히 몰락하게 된 한 요소였다. 합리적 정신이라는 것은 기업을 하는 사람, 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화폐에 의한 계산적 정신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여기에는 도덕이나 수행은 전혀 중요한 측면이 아니다.

근대문명으로의 전환 속에서 인간의 신념이나 가치관도 이러한 합리적 정신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그것이 이데올로기였다. 현실에 대한 해석, 미래에 대한 전망, 전체 역사에 대한 해석, 경제에 관한 이론 등이 모여서 형성한 <합리적 이론의 총체>로서 이데올로기는 이성적 정신이 제공하는 세계관이고 가치관이었다. 이것이 근대의 정신이었고, 이제까지의 우리의 정신이었다.

3. 21세기의 새로운 문명?

이러한 근대문명 -공업적 사회, 이성적 정신-이 지금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문명의 전환이다.

산업사회(공업사회)의 종언은 오늘날 많이 언급되는 주제이다. 지식 정보사회의 등장과 함께 산업사회가 끝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종언이 우리의 삶의 물질적 차원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며, 그것은 서구 근대문명과는 다른 새로운 문명이 도래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 지식정보사회와 물질적 차원의 변화

아마존(https://www.amazon.com)이라는 홈페이지가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또한 인터넷 공간)에서의 서점이다. 이 홈페이지는 250만 권의 책에 대한 완벽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 있다. 방문자가 어떤 주제나 키워드를 넣으면 그에 관련된 책의 목록이 나온다. 가령 문명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그에 관련된 책으로 처음 100권이 나오며 동시에 너무 많은 책이 있으니 좀더 상세하게 검색해 달라고 하면서 검색방법에 관한 안내가 나온다. 이렇게 하여 책을 선택하고 신용카드를 통해 주문을 하면, 한 달 또는 2~3개월 안에 그 책이 배달되어 온다. 이것이 세계 최대의 서점이라고 자랑하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서점, 아마존이다.

이 서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서점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수많은 책을 꽂아 놓는 매장이 없다. 서점이라는 공간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장을 지키는 종업원도 없다. 그 서점에 책을 사러 온 손님도 없고 책을 주고 돈을 받는 카운터도 없다. 우리의 개념에서 이 사이버서점은 서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새로운 서점인 것이다. 또한 앞으로 성미 급한 사람을 위해서 홈페이지에서 바로 디지털로 책 내용 전부를 전송하는 것이 상업적인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 이것은 기술적으로는 지금도 가능한데 그렇게 된다면, 이 새로운 서점은 호스트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 데이터베이스에 책을 입력하는 종업원, 주문을 받아 처리하는 종업원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오늘날 서점이 얼마나 원시적인가 하는 느낌이 든다. 마치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당연했던 것을 보면 원시적으로 느껴지듯이, 오늘날의 서점은 50년 후 혹은 그 전환이 일어났을 때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원시적으로 보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식정보사회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근대 서구문명과는 전혀 다른 전망을 열어놓고 있다.

첫째, 농업문명에서 산업문명으로의 변화는 농업 인구가 전체의 80%에서 10%로 축소되는 농업인구의 변화였듯이 산업문명에서 정보사회로의 변화가 공업인구의 대폭적인 감소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선진국에서는 21세기 초 약 2010년경이면 공업인구가 10%정도로 축소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것이 앞의 전근대문명에서 근대문명으로의 변화가 같은 문명의 변화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둘째,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질이나 재화의 성격이 바뀐다. 농업문명에서 공업문명으로의 변화가 우리의 삶이 공산품으로 둘러싸이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처럼, 공업문명에서 지식정보사회로의 변화는 우리의 삶이 지식상품, 정보상품, 문화상품 등과 같은 비물질적인 가치들로 둘러싸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삶과 근대사회의 삶이 달라졌던 것과 같은 정도로 새로운 사회에서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물질적 삶의 모습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2) 정신의 변화: 영성, 깨달음, 종교적 정신의 부활

지금까지는 합리적인 정신이 우리들을 지배해왔다. 이데올로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 신념과 믿음의 내용이 되던 시대였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론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로서 종교를 대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성적 정신이 종교적 정신을 대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성적 이론이 믿음의 차원에서는 다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하나의 시대가 끝났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모든 합리적 이론들은 다만, 많은 지식 중에 하나의 지식, 많은 정보 중에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게 되었다. 냉전의 종식과 지식 정보사회의 도래는 합리적 이론들을 신념의 차원에서 정보의 차원으로 격하시켰다. 이제 아무리 고매한 학자의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론을 신념으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어느 학자가 제시한 이론이라는 정보일 뿐이다. 다른 학자는 그와는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도 역시 하나의 정보이다. 이제는 어느 이론을 신념으로 믿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론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는 게 중요한 그러한 시대이다. 지식정보사회는 간단히 말하여 일체의 합리적 이론들을 정보로 취급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그러한 모든 이론들이 제공할 수 없는 문제는 우리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 정신을 뛰어넘어 오히려 합리적 정신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진리를 구한다. 그 진리는 이성적 추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과 깨달음 또는 믿음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 종교, 영성, 수행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있다.

부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엄청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수행 끝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얻으려고 했던 죽음에 대한 해답-영생(永生)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 절망감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한잔의 우유죽을 받아 마시고 그 절망감을 넘어서 깨달았던 것, 즉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자아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 자아를 넘어선 곳에 처음부터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진정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이성의 세계가 아니다.

종교적 진리는, 신념과 믿음이 소멸한 마음의 공간에 유일한 대안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인류가 정상적인 정신으로 되돌아온 것이기도 하다. 오직 이성만을 떠받들던 시대에서 정신적 지평이 좀더 넓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21세기에는 이성을 넘어서는 정신, 깨달음의 정신, 종교적 정신이 다시금 인간의 정신세계가 될 것이다.

4. 역사의 기로

21세기에는 위와 같이 물질적 차원에서 그리고 정신적 차원에서 문명의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21세기에는 물질적 상품에 대한 욕망이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한 동력도 아닐 것이며 주요한 가치도 아닐 것이다. 또한 정신적 차원에서도 합리적 이성적 정신이 모든 사람들의 신념, 믿음, 가치관을 지배하는 시기는 끝났다. 이러한 두 가지 점에서 21세기가 20세기의 물질문명과는 다른 성격의 문명이 될 것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다음 두 가지 점은 명백하지 않다. 이 부분에는 어떠한 역사적 필연도 없으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그리고 민족, 종교, 인류)의 선택과 창조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다. 그 하나가 사회체제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동서양 문명의 관계의 문제이다.

사회체제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동서양 문명의 문제는 21세기에는 미국, 유럽, 동아시아, 이슬람 중 어느 것이 문명의 중심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1) 자본주의는 유지될 것인가?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가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막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당연히 유지되고 심지어는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하루아침에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는 세계금융체제 문제이다. 현재와 같이 세계금융자본이 급격하게 이동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여러 개의 국가경제가 하루아침에 붕괴하는 상태가 지속될 수는 없다.

둘째, 이미 터키, 멕시코, 아시아를 거쳐 진행되고 있는 경제 불황이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 홍콩경제의 붕괴, 일본경제의 붕괴와 미국에 대한 채권의 회수, 미국경제의 붕괴 등의 과정을 거쳐 세계적 대공황으로 가고 있다는 유력한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셋째, 정보사회와 자본주의 경제가 서로 어울리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특히 노동의 종말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이다. 자본주의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다면 그러한 체제는 유지되기 어렵다. 다수의 실직자를 항상 안고 있는 사회와 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가?

현재로서는 미국경제의 호황에 힘입은 미국문명의 압도적 우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수많은 미국인들이 미국의 쇠퇴를 예측하고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5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또다시 어떤 예측이 난무할지 모른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만일 중국경제가 이제까지의 속도로 발전을 계속한다면 늦어도 2020년이면 미국경제는 중국경제의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미국은 인구, 영토, 문화적 유산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 문명의 충돌의 문제가 있다. 미국의 압도적 우위가 흔들린다면 세계질서에서 독립성을 유지하고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될 때, 그것은 자연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형상을 야기할 것이다. 헌팅턴은 이미 이러한 문명의 충돌이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헌팅턴의 논리를 차치하고라도, 미래세계에서의 충돌은 동질적인 국가단위의 동맹과 대립의 차원이 아니라 언어, 종교, 민족, 문화 등에 의한 문명의 충돌이며, 그것이 세계역사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종교의 중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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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개혁이냐 제도개혁이냐

왜 부처님께서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 vinaya)을 제정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문득 율장의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가 바로 제도개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계율이 제도개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았다.

만일 출가자 개개인의 의식개혁만으로 청정한 승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부처님께서 굳이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승려들이 사의법(四依法: 걸식, 분소의, 수하좌, 진기약)의 정신에 따라 출가자로서의 위의(威儀)를 지키고 수행에만 전념했다면, 부처님께서는 굳이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출가자 개개인이 양심에 따라 출가자로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만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는 굳이 강제적인 규정인 율(律)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의식개혁만으로는 청정한 화합승가를 이룰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개개인의 의식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아주 사소한 계율까지 제정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계율이라는 제도개혁 없이는 다양한 부류의 출가자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성스님 글에서>

 

5. 새로운 정신과 불교의 과제

문명이 경쟁한다는 것은 정신이 경쟁한다는 것이다. 21세기 불교에 대하여 논의한다면 이러한 정신적 경쟁이라는 것을 단순히 경쟁이라는 차원에서 볼 수만은 없다. 그것은 20세기의 근대적 문명을 넘어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려는 창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민족, 종교, 문화, 정신들이 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경쟁에서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한 정신이 다음 세기의 정신과 문명의 기초가 될 것이다.

불교는 그 합리성, 과학성의 차원에서 현재의 기독교보다 우월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불교가 미래문명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는 것이다. 불교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불교적 진리가 합리적 철학이 되어 세계의 철학적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에서 새로운 철학을 추출한 사람은 서양인들이었다. 근대이래 많은 서구인들이 불교에서 새로운 사상적 세계를 찾으려고 했다. 가령 쇼펜하우어는 불교에서 염세주의 철학을, 헤겔은 불교에서 전체성의 진리를 도출했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나 헤겔의 영향을 받은 사람과 철학이 불교적 진리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불교적 문명이나 불교적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적인 정신이 되었지 불교적 정신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적 진리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신을 창조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이하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적 진리를 몇 가지 검토한다. 간단히 검토하더라도 불교적 진리는 근대적 정신과는 정반대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점이야말로 불교가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정신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기초이다. 반대되거나 다른 것이야말로 현재의 정신(서구 근대적 정신)의 대안이 되고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하 불교적 진리에 관한 것은 사회적, 철학적 관점 또는 근대 서구정신과 비교해서 불교를 보는 것이고, 결코 불교의 근본진리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에게는 불교의 근본진리를 논할 자격이 없다)

1) 세계관

근대의 세속적인 사유들은 모두 <존재물>을 전제로 하고 <존재물>에 관한 철학이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는 입자설,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개인의 발견), 철학적으로는 <존재물>들로 가득한 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연기법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물>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물>들의 본질은 다른 <존재물>들에 의지해 있고, 다른 <존재물>들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물>들은 사실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는 결코 본질이나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아주 간단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이러한 <존재물>들을 포괄하는 <전체>이며, <전체>의 모습은 <존재물>들의 집합이나 <존재물>들의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그 법칙으로 모든 설명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이러한 <존재물>들에서 유추할 수 없는 <전체>인바 그것을 이름 붙이자면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은 비어 있거나, 피안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이다. 이것을 간단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연기법 그 자체의 내용이 아니라 연기법이 근대적 철학과는 정반대된다는 것이다. 근대철학은 세계에 근원적인 단위(가령 원자)가 있고 그 단위들의 관계를 형성하는 법칙으로 세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기법은 이러한 세계관으로는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종교(구원, 진리를 아는 것)는 삶의 방법이고, 삶의 목표이다. 이제까지 종교는 삶의 한 부분이었으며, 목표가 아니라 현실에서 힘과 위안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것-삶의 방법과 목표로서의 종교-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21세기의 불교의 역할이고, 바로 이러한 회복이 문명의 전환이다. 이것이 회복된다면 21세기 인류는 전혀 다른 정신을 가지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 인간관 / 사회관

이제까지 근대적 사고방식에서는 인간을 <개인>으로 보았다. 이것은 세계를 <존재물>로 보면 당연히 <나 자신><존재물>이고 그것은 바로 <육체와 정신을 가진 한 개인>이라는 것이었다.

중세의 <신분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에서 이러한 <개인적 인간>으로의 전환은 <개인의 발견>으로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사회는 이러한 <개인>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말하자면 모든 <개인>은 일체의 연대와 단절되어 오직 <>을 벌어야 살 수 있다. 이점은 <신분적 특권>으로 살 수 있던 중세와는 다른 것이다.

불교의 인간관은 이것과 정반대이다.

<육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은 바로 <연기법>을 모르는 것으로, 누구나 아는 상식적 <인간관>인 바, 진리는 그것이 <나의 진면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 <존재물>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하나의 <연기>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자아>라는 <의식, 개념>일 뿐이다. 혜가는 자아라고 생각했던 <불안한 마음>의 실체를 찾지 못했다. <개인>으로서의 <자아>라는 것은 그냥 상식이지만, 우리가 철학적, 종교적 반성을 가해 보면 그에 대해 회의에 도달한다. 그리고 <진정한 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의 기초적 의미는 바로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적 자아>를 넘어서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이고, 개인구원이며, 깨달음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나> 역시 깨달음을 통해 이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틀림없다. 사회가 이러한 <진정한 나>를 전제로 하여야만 한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진정한 나>에 도달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면, 사회는 <개인><경쟁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는 <진정한 나>들의 <만남의 장>, 깨달음을 향한 <인연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인간들의 삶의 구조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연대적 구조>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구조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불교적 진리에 정반대되는 사회이다. 불교적 사회는 사랑과 자비가 사회적 가치-종교적 가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가 되는 사회이다. 이렇게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불교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 21세기의 불교의 위상이 결정될 것이다. 결국 21세기는 물질주의 개인주의 경쟁과 투쟁의 현실에서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어떠한 종교가 구제할 수 있는가에 의하여 문명의 성격이 결정될 것이다.

3) 가치관: 욕망 / 집착으로부터의 해방(해탈)

근대사회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긍정하는 사회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근대적 가치관의 전제이다. 공리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전제로 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최대다수의 최대행복-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경제성장, 사회의 발전, 선진국 등의 이념은 바로 이러한 <인간 욕망의 충족>을 지상의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경문제, 자원문제, 정보화 사회의 충격 등은 바로 이러한 욕망긍정, 욕망충족의 문명이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가치관은 이러한 근대적 가치관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불교적 가치관의 토대는 욕망 / 집착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불교적 진리는 인간이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욕망이 야기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이야말로 행복(또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욕망을 죄악시하거나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금욕주의는 아니다. 욕망의 문제는 그 욕망이 야기하는 집착의 문제이다.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무명(진정한 자아의 상실)을 낳는다.

욕망은 개인(상식적인 자아)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자아>의 한 내용이다. 그러나 욕망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진정한 자아>는 욕망이 야기하는 집착에서 자유로운 데에 있다. 따라서 욕망을 노골적으로 긍정하고 욕망충족을 목표로 하는 인간 / 사회는 사실은 <진정한 자아 -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사회인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욕망이란 무한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가 그보다 못하다고 느끼고 그에 자극될 때, 욕망은 자꾸 생성되고 커지는 것이다. 욕망긍정, 욕망충족의 사회-근대서구문명-는 진리에 반하는 사회이다.

오늘날 이러한 욕망긍정-욕망충족의 사회는 그것이 야기하는 집착 / 무명에 의하여 병들어 가고 있다. 인간이 <개인>으로 <욕망충족>을 위해서 살 때에 <정신병적인> 상황에 빠진다.

결국 <정신병>이란 본질적으로 <집착><자아>가 되어 버리는 현상이다. 가령 어떤 욕망의 충족을 간절히 바라게 되어 마음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편집증이다. 또 어떤 욕망의 충족을 간절히 바라는 데 그것을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그 욕망충족을 향한 집착이 또 하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이 <정신분열>이다. 욕망충족이 현실적으로 되지 않아 마음속으로 그것을 그리고 추구하는 상황이 지속될 때 그것이 <망상: 과대망상, 피해망상>이다. 현대는 바로 이러한 정신병적인 상황에 의하여 많은 범죄들이 야기되고 있다.

욕망충족을 자극하는 사회 환경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것-욕망 / 집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불교의 역할이다.

기독교신도는 전지전능한 신에 의지함으로써 욕망충족을 향한 경쟁에서 힘을 얻는다. 이것이 기독교의 강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욕망 / 집착으로부터의 해탈이 아니기 때문에 인격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6. 불교적 정신과 포교사의 역할

오늘날 많은 정신들이 있다. 세계 4대 종교는 새로운 시대에서 다시금 개화를 기다리는 중대한 정신들이다. 그밖에도 많은 영성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들 중에 하나가 다음 21세기의 인류의 정신과 문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불교적 정신도 유력한 대안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가 다음 세기의 정신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현실은 제도불교의 전근대성을 느끼게 한다. 제도불교는 여타의 종교들 중에서도 가장 뒤떨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교에 지금도 남아 있는 전근대성이란 종교가 사회적 기능을 배제 당하고(근대의 정치와 종교의 분리 때문에) 일반인들의 정신적 위안물로 자리 잡는 것이다. 근대의 모든 제도종교들은 경제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법문(설교) 등을 하고 그것에 대해 헌금을 받거나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이자로 조직이 유지된다. 이렇게 될 때, 종교의 역할은 항상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근대시대에 종교가 정치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서 남은 잔여기능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오히려 다른 종교들보다 더욱 전근대적이라고 할 것이다.

새로운 세기에 종교가 가장 필요로 하고 사회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 3섹터이다. 3섹트란 우리 사회에서 국가부문과 사회부문을 제외하고 남은 부문이다. 넓게는 비영리적 활동 일체가 제 3섹터이다. 문제는 앞으로 자본주의가 모든 인간에게 직장을 제공하지 못하게 될 때(, 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직장을 제공하지 못할 때) 사람들에게 이 제 3섹터는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학교와 대학, 병원 등이 있지만 그 외에도 사회 서비스 조직, 봉사조직, 수도원, 여성클럽, 청년단체, 시민권단체, 사회정의조직, 환경단체, 동물보호단체, 극장, 오케스트라, 화랑, 박물관, 모든 시민단체, 모든 봉사단체, 공동체 단체, 시민소방수, 시민경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조직들이 성장하게 될 것이다. 실로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사회적 힘은 이러한 제 3섹터에 얼마만큼 기여하고, 그것을 통하여 얼마만큼 사회적으로 평가를 받고, 보편화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간단히 말하면 제 3섹터는 앞으로 종교에게는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쟁터에서 현재는 제도종교보다 새로운 영성 단체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한다. 이 전쟁터에서 정신으로서 그리고 실천으로서 얼마만큼 사회적 신뢰를 축적하느냐 하는 것이다. 포교사(*불교의 사회적 활약)의 역할도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따라 포교사의 역할에 대해 몇 가지 방향을 설정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시회단체, 시민단체, 봉사단체, 기능적 단체 등에 포교사들이 얼마나 참가하고, 또 그러한 단체를 얼마나 창립할 수 있는가에 관한 활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찰은 사실은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버려져 있다.(전근대적 활동공간일 뿐) 앞으로 산업 사회적인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깃이고(심지어 자본주의가 붕괴한다면 제 3섹터적인 성격이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한 경우 이러한 사회단체, 봉사단체, 3섹터적인 삶-가난하지만 삶의 보람을 가지는 삶-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의 삶의 양식이 될 것이다. 종교인이 이러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해내는데 성공한다면, 그 종교야말로 다음 세기의 인류의 정신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둘째, 구체적으로 우리의 경우를 보면 실업문제가 있다. 실업문제는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실업을 당한 사람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진다-이고 삶의 문제이다. 이러한 실업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새로운 삶을 찾는데 함께하는 활동들이야말로 단순히 낙오자 구제가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인 삶의 양식으로서 제 3섹터적인 삶(무소유의 삶)-새로운 시대와 정신을 창조하는 최초의 출발-이 될 것이다.

셋째, 일체의 봉사활동이 있다. 미국에서는 자원봉사가 일상적이다. 미국 인구의 50%가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청교도 정신에서 유래하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방향도-아니 모든 국가의 방향도- 이러한 모든 분야에 걸쳐 자원봉사활동이 증대하는 것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정보사회로의 전환에 의하여 이러한 자원봉사활동이 전국적으로 나아가 세계적으로 유기적 연결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이러한 자원봉사활동에서 불교가 얼마나 그 몫을 할 수 있는가는 아마도 포교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넷째, 사회문제의 분야가 있다. 과거에는 민중운동, 재야운동, 시민운동 등으로 이어져온 사회문제에 대한 활동이, 이제는 특정 항의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문제가 되었다. 가령 통일운동,, 환경운동, 생태보호운동, 소비자보호운동 등 수많은 분야의 사회문제, 나아가 정치적인 문제에까지도 종교적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를 리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그 이유는 냉전의 종식 때문) 폴란드의 변화에 카톨릭세력과 추기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종교가 그 힘을 발휘하는 시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지식운동이다. 지금 모든 사회, 전 세계는 아이디어 워(사상의 전쟁) 시대이다. 과거와는 달리 지식화 되지 않으면 그 존재성이 퇴화하는 시기이다. 반대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식화 되면 그것이 바로 전 세계를 순식간에 장악하는 시대이다. 하나의 개념이 전 세계에 퍼지는 경로를 보면-특히 경영분야가 가장 빠른데 가령 리엔지니어링- 알 수 있다. 불교적 교리도 과거의 낡은 개념표현을 다시 재정리하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개념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신이 되는 관건이다. 인류의 정신이 된다는 것은 다음 시대의 인류가 사용하는 몇 개의 개념들, 그리고 그 개념들의 체계를 전파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가장 구태의연하다. 전혀 매력적인 개념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시도도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불교의 숫자가 가장 적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986월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 20년이 지난 오늘의 불교계는 그간 인터넷 정보 교류를 통해 많은 변화에 이르고 있음을 본다.)

<20043LA관음사 30년사 총연감>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