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을 설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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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을 설한 까닭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수) 05 01, 2019 8:39 am

우리 불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는 다른 불교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기독교, 회교 등, 다른 모든 종교들은 타력(他力)의 종교입니다. 곧 신에게 매달리고 신의 힘과 은총을 희구합니다. 동시에 신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을 강요합니다. 신에게 헌신하고 복종하면 행복이 깃들고, 그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릅니다. 자력(自力)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힘에 헌신하고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과연 인간이 남이나 다른 존재의 힘, 곧 타력만을 구할 경우에 참다운 행복과 깨달음이 생겨날까요?
아닙니다. '나'를 중심에 둔 채 의지하고 매달리면 점점 더 중생의 자리로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나'의 욕심으로 기도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면 언제까지나 중생의 세계를 맴돌고 윤회할 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인도 브라흐만교도 이러한 타력의 형태를 벗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에게의 헌신이 행복의 척도가 되고, 신에게 기도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신이라 할지라도 생로병사 등의 근원적인 고(苦)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신에게 기도하고 헌신할지라도 근본 괴로움을 해결하여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석가모니께서는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참된 해탈을 이루고자 홀로 정진을 하셨습니다. 피나는 고행을 체험하고 깊은 선정도 닦았습니다. 신을 비롯한 바깥의 모든 것에 의지하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찾아들어갔습니다. 밖에서 구하지 않고 진짜를 향해 스스로 찾아들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법의 진실한 모습을 체득하여 부처님이 되셨고, 부처님이 되신 바로 그 순간에 혼잣말로 제일성(第一聲)을 던졌습니다.

- 아! 기특하도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지혜(智慧)와 덕상(德相)을 갖추었건만, 오직 번뇌 망상에 집착되어 스스로 체득하지 못하는구나. 만일 이 망상의 집착만 여읜다면, 곧바로 일체지(一切智), 자연지(自然智), 무사지(無師智)를 얻게 되는 것을! -

일체지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일체의 진실한 모습을 아는 지혜입니다. 자연지는 자연 그대로의 지혜, 스스로가 그렇게 간직하고 있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무사지는 스승없이 아는 지혜입니다. 곧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일체지는 언제나 그렇게 있는 자연지요, 스승이 가르쳐줘서 체득할 수 있는 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체득할 수 있는가? 스스로가 일으키는 번뇌 망상에 대한 집착을 떠나면 체득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모든 중생이 다 갖추고 있는 부처의 지혜와 덕상을!

이러하거늘 어찌 타력에 의지하여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곧 자력(自力)이라야 자각(自覺)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해탈을 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후 불교에서는 이 부처님의 제일성을 더욱 함축성 있게 줄여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표현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즉불....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는 식으로 표현을 바꾼다면 '네 마음이 곧 부처야, 네가 바로 부처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곧 부처, 마음이 곧 부처! 이것이 불교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종교의 명백한 차이점입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이 말을 해보십시오.
"내가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이 부처다."
이 말을 하면서, '아! 그렇구나', '틀림없이 그렇다'는 확신이 생깁니까? 확신이 생긴다면 공부가 많이 된 분이요, 자력으로 자각(自覺)의 길을 걷고 있는 불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불자들은 어떠합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는 확신을 구하기보다는, 누가 관세음보살을 불러 소원을 성취했다고 하면 그쪽으로 끌려가고, 누가 금강경을 많이 읽어 업장을 소멸했다고 하면 또 그쪽으로 따라갑니다.

자력으로 자각을 하는 이들은 남 따라 공부하거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적절한 한 가지 공부를 꾸준히 닦아가 즉심즉불을 체득할 때까지 나아갑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그것이 법(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꾸더라도 남 따라 바꾸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공부를 꾸준히 계속하다가 향상의 새 인연이 스스로 다가오면 그때 공부방법을 바꿉니다. 또, 꼭 참선을 해야만 즉심즉불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 주력, 참회, 보시, 인욕, 관법 등을 통해서도 체득할 수 있고, 반야심경, 금강경, 유마경, 원각경 등의 여러 가지 경전 중 하나만 열심히 공부해도 체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부처님께서 '부처되는 길'이라며 열어 놓은 가르침들입니다. 이들 중 하나를 붙잡고 얼마동안 꾸준히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부처', '마음이 부처'라는 뜻을 완전히 체득하지는 못할지라도 이해는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곧 부처! 화엄경에서도 분명히 설하셨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부처=중생=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며, 중생이 부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집니까? 아마 타력에 빠져있는 분이라면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둥근 원[0]을 크게 하나 그려보십시오. 이 원을 마음이라고 할 때, 깨달으면 원 전체가 부처요 밝음이 되고, 깨닫지 못하면 원 전체가 중생이요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으면 중생심(衆生心)이 그대로 불심(佛心)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왜? 원래 부처와 중생은 한마음(一心)이 어떻게 있느냐에 따라 구분된 것일 뿐입니다.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께서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의 첫머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들으니,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사람은 땅을 의지하여 일어난다' 하였다. 그러므로 땅을 떠나 일어나려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한 마음 미(迷)하여 가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요, 한 마음 깨달아 한없이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는 부처다. 미함과 깨달음은 다르지만 모두 한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마음을 떠나 부처를 이루려는 것은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이 말씀 그대로, 한 마음(一心)에 대한 미함과 깨달음이 중생과 부처의 갈림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신 그날까지 ‘즉심즉불을 깨달으면 원래의 일체지·자연지·무사지(無師智)가 발현되고 부처가 된다’는 것을 한결같이 가르쳤을 뿐, 신이나 남에게 매달리는 타력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열심히 공양물을 바치면 복을 많이 받게 된다. 나에게 절 많이 하고 나를 위해 봉사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의지하고 나에게 헌신하며 살아라. 타력으로 살아라.”
이와 같은 가르침은 절대로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부처님께서는 자력의 길, 자각의 길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심즉불이야, 현재 중생의 모습으로 있는 네가 바로 부처야.”

반야심경을 설하신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마음이 부처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을 갖춘 존재가 바로 너다. 네 자신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을 갖춘 부처님이다. 네 마음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다이니라.”
이것이 반야심경의 골격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엉뚱한 쪽으로 갑니다. 옆길로 옆길로 자꾸만 빠져듭니다. 진짜 나 진짜 마음 아니라, 엉뚱한 나 엉뚱한 내 마음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이를 고쳐주고 깨우쳐주기 위해 부처님께서 반야심경을 설하신 것입니다. 진짜 나를 회복하고 부처인 내 마음을 회복해 가지도록 하기 위해 반야심경을 설하신 것입니다.

잠깐 여러 경전에 등장하는 ‘양의 무리 속에서 자란 사자새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젖먹이였을 때 어미를 잃고 양의 무리들 속에서 자란 새끼사자가 있었습니다. 새끼사자는 양의 젖을 먹고 양과 같이 잠을 자고 양의 울음소리를 내며 뛰어놀았습니다. 물론 순한 양들도 모습이 다른 새끼사자를 구박하거나 내몰지 않았습니다.
차츰 성장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양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새끼사자는 양떼들과 함께 언덕 위로 올라간 어느 날, 갑자기 호기가 생겨나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는 소리로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우왕....!”
그 포효가 울려나오자 순간적으로 모든 양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고,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양이 아닌 사자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지는 어디에 살던 사자임을 깨우쳐주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지금은 양의 무리들과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고 있지만, 원래가 사자요 어떤 계기가 오면 원래 사자임을 깨닫게 된다는 비유담입니다.

이 사자새끼처럼 진짜 ‘나’, 진짜 마음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만리 바깥의 공간에 가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간직하고 있는 원래의 불심(佛心)을 드러나게 하고 나타나게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불교는 자력에 의한 자각의 종교입니다. 즉심즉불의 종교입니다. 불교의 핵심경전인 반야심경 또한 내 마음이 마하심(摩訶心)이요 반야요 바라밀이며 부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반야심경을 뗏목으로 삼아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밖에서 구하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한산시(寒山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밥을 말해도 끝내 배부르지 않고 옷을 말해도 추위를 면하지 못한다
배부르고자 하면 밥을 먹어야 하고 옷을 입어야 추위를 면할 수 있네
깊이 생각하여 이해하지는 않고 부처 구하기 어렵다고만 하는가
마음 한번 돌리면 곧 부처님이니 아예 멀리 밖에서 구하지 말라-
說食終不飽 說衣不免寒
飽喫須是飯 著衣方免寒
不解審思量 祇道求佛難
廻心卽是佛 莫向外頭看

“자력(自力)! 밖에서 구하지 말고 그 마음을 돌려 깨달아라.”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불자는 이 자세부터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읽고 배우는 초점을 불심(佛心)에 두어야 합니다.
“나도 반야심경을 통하여 자력으로 자각(自覺)하고 불심을 회복하리라. 마하반야바라밀다심을 회복하리라.”
이러한 결심이 있으면 반야심경의 뜻을 훨씬 빨리 체득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시기를 두 손 모아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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