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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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화) 10 27, 2020 10:40 am

교차로에서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식의 지식이 각기 추구하는 목적을 정의해야 하며, 또 불교가 의미 있는 방식으로, 특히 과학이 공백으로 남겨 둔 윤리, 인격적인 변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진정한 정신적 통찰력의 분야에서 과학을 보완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투안: 왜 과학자와 대화하는 것인가?

마티유: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불교철학의 중요한 과업 가운데 하나인데, 과학은 우리 세계의 본성에 대해 강력한 통찰력을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투안: 연구를 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실재, 물질, 시간, 공간 등의 개념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이러한 개념들과 대면할 때마다 불교가 이러한 개념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실재에 대한 과학적 관점이 불교의 실재 관념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만나는가 대립하는가, 아니면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만한 불교에 대한 지식이 나에겐(경전을 공부한 일이) 없다.

마티유: 현상의 배후에는 확고부동한 실재가 존재하는가?
현상세계, 즉 주변에서 우리가 ‘실재’로 보는 세계의 기원은 무엇인가?
생물과 무생물,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시간, 공간, 자연법칙은 실재로서 존재하는가?
2,500년 전부터 불교의 형이상학자들은 줄곧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했다. 불교의 문헌에는 논리학에 관한 논문, 지각이론, 현상 세계의 다양한 차원을 분석한 글, 의식의 다양한 양상과 우리 마음의 궁극적 본성을 탐구하는 심리학적 논문들이 넘쳐날 정도로 많다.

투안: 당신은 불교를 일종의 마음의 과학으로 제시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음의 과학은 관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자연 과학과 같은 의미에서의 과학일까?

마티유: 과학의 확실성은 반드시 물리적인 측정이나 복잡한 수학적 등식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의 가설은 내면적인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엄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교의 방법에는 분석에서 시작되고 종종 ‘사고(思考) 실험’에 의존한다. 그것은 정신 속에서 수행되는 가설적 실험으로, 비록 물리적인 현실에서 실행될 수 없다 하더라도 반박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기법은 과학에서도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투안: 옳은 말이다. 사고(思考) 실험은 특히 물리학에서 대단히 유효하다.
아인슈타인과 다른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의 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몇몇 물리적 상황을 해석할 때 나타나는 역설적인 결과들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사고(思考) 실험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연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빛의 입자 위에 올라타 있다고 상상했다. 또 중력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자신이 진공 속에서 자유 낙하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다고 상상했다.
나는 현대 물리학에 의해 탐구된 문제들이 뜻밖에도 불교의 통찰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는 기술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으면서도 왜 현대 과학, 특히 물리학과 천체물리학에 관심을 갖는가?

마티유: 불교의 주요 관심사는 물론 현대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최근의 물리학이 제기한 문제들과 비슷한 문제들을 제기해왔기 때문에 현대 과학의 발견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분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입자들이 세계를 이루는 ‘기초 재료(블록재)’가 될 수 있는가? 그 입자들은 궁극적인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것을 돕는 개념에 불과한 것인가?
물리 법칙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피상적인 유사성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과학과 불교 사이의 차이와 합치점을 연구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를 둔 탐구이기 때문에, 경직된 교의에 얽매이지 않는다. 불교는 실재에 대한 어떠한 견해라도 그것이 확실하다고 이해된다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 불교의 주요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 그것들이 나타나는 방식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이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맹목적이고 독단적인 신앙의 위험에 대해 경계하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황금 원석을 돌에 문지르고 망치로 두들기고 녹이면서 그 순도를 조사하는 것처럼 내 가르침의 유효성을 검토하라. 단순히 나에 대한 존경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 받아들여라.”
그러나 단지 지식을 축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 스승인 키옌체 린포체는 이렇게 말했다.
“위세와 명성을 얻어려는 목적만으로 지식을 긁어모으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오로지 동냥을 받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같이 똑같은 정신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아무런 효용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속담에 “사람들은 지식이 많을수록 더욱 잘난 체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부정적 성향을 없애기 전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거만한 마음을 키우는 것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잔치에 초대하는 거지처럼 허풍에 불과한 것이다.

명상적인 삶이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표시들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달이나 몇 년 후에 틀림없이 자신의 이기주의가 줄어있고 이타주의가 성장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 증오, 거만함, 질투가 예전만큼 강하다면 시간을 허비한 것이고,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반대로 자연과학으로 인해 얻은 지식은 건설적이든 파괴적이든 세계에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에 대해서는 별 효과를 갖지 못한다. 과학지식은 본래 선성(善性)이나 이타주의와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명상과학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고통을 만들어온 근본적인 환상을 없애기 위해 마음 자체가 마음을 연구한다.

투안: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부처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인생의 주요 목적은 우주의 기원이나 물질적 본성이라는 문제로 고심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개선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티유: 어떤 사람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부처에게 우주의 기원이 무엇이냐고 묻고 정신적 발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또 다른 질문들로 그를 괴롭혔을 때, 그는 침묵을 지켰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지식들, 특히 매우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별 소용이 없는 지식과 두움을 주는 지식 사이에 자연적인 등급을 매긴다.

투안: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티유: 그것은 최고의 지식 상태로, 무한한 자비심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의 축적이나 현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깨달음은 상대적 존재 양식(사물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궁극적인 존재 양식(그 현상들의 진정한 본질)의 이해이다. 이것은 외부세계와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포함한다. 이러한 앎은 무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독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무지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사물들이 영구적이고 확고부동하며 우리의 자아가 정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실재’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념 때문에 덧없는 쾌락과 고통의 완화를 항구적인 행복과 혼동한다. 우리는 자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에 집착하고 자아에게 해로워 보이는 것에는 반감을 갖는다. 이렇게 해서 점차 혼란이 생기고 점점 증대하여 결국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기에 이른다. 무지는 반복되고 내면의 평화는 파괴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앎이란 고통의 궁극적인 치유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별들의 밝기나 별들 사이의 거리를 아는 것이 유용성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투안: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왔다. 불교는 ‘우리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발전과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행동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식은 무시한다.
우주와 우주의 운명에 대한 지식 혹은 시간과 공간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우리가 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티유: 우주론에 대해 부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던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부처는 한 웅큼의 나뭇잎을 들고는 방문객에게 물었다.
“내 손의 나뭇잎들이 더 많습니까, 숲속의 나뭇잎들이 더 많습니까?”
“물론 숲속의 나뭇잎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나뭇잎들은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지식을 상징합니다.”
부처는 이런 식으로 몇몇 질문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계는 무한한, 이를테면 숲속의 나뭇잎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연구 영역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그 목적에 전념하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지식들만 모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지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외부 세계와 자아의 본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경험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부처는 그러한 이해를 그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또한 우리가 현상을 지각하는 방식과 그것의 진정한 본성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강조했고, 잘못된 지각으로 인해 해로운 결과를 강조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끈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은 근거 없는 공포를 낳는다. 그러나 끈에 빛을 비추고 그 진정한 본질을 알자마자 두려움은 사라져버린다. 불교의 탐구는 개별적인 자아와 세계의 외적인 현상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와 ‘타자들’ 사이의 구분이 순전히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불교는 실재의 진정한 상태를 ‘공(空)’ 혹은 고유한 실체의 부재라고 부른다. 가장 커다란 오류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에 확고부동한 실재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확고부동한 실재라는 관념은 2,000년에 걸쳐 서구의 철학적*종교적*과학적 사유를 지배해왔다.

투안: 그렇다. 19세기까지 고전 과학은 사물이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으며 엄격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발전한 양자물리학은 물질의 기본적 구성 요소가 명확하고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다는 관념을 심각하게 뒤흔들어놓았으며, 이 세계가 엄격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공의 불교적 개념은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실재에 대한 개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공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는가?

마티유: 불교에서 공이 사물의 궁극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사물, 즉 세계의 현상들에 독자적이고 영속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를 해설한 최초의 서구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공은 결코 현상들의 부재 혹은 비존재(非存在)가 아니다.
불교는 어떤 형태의 허무주의도 신봉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실체만 떼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비존재만 떼어 그것에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지혜의 완성론(般若心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들은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왜 고칠 수 없는가? 공에 대한 명상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관념과 확고부동한 실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치유책이기는 하지만, 이 치유책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된다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혜의 완성론(般若心經)>은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공이라고 부르는 실재의 진실한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입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불교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적인 비실재성을 이해하는 것은 구도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리고 현대 과학은 이를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의 정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서로를 깨우치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 이 두 가지 지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을 근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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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안: 나는 과학자들이 자기 연구의 결과에 대해 방관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정치가들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업가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의 연구를 이용할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마티유: 부유한 국가들은 종종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위선적인 일을 하는데, 무기 거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 무기의 95%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에 의해 제조되고 판매된다. 이 일도 역시 윤리와 책임감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부유한 국가들이 자원을 낭비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60억 달러면 전 세계인의 기초 교육을 보장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런데 매년 유럽과 미국에서 향수를 사는 데 120억 달러가, 전 세계적으로 마약 소비에 4,000억 달러가, 군사비로 7,000억 달러가 지출되고 있다.

투안: 그렇지만 인간의 지성을 나무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식에서 벗어난 행동들 때문에 기초 연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

마티유: 물론이다. 연구 결과를 해롭게 혹은 쓸데없이 사용하는 것은 결국 윤리의 빈약함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과학 연구를 응용한 것들 가운데 몇 가지(예를 들면 유전학과 원자력)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윤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전문 위원회들이 반성할 일기긴 하지만, 일상생활에 있어 그 위원회들이 내리는 결정은 영향력이 미미하다. 정치적 기회주의와 신성불가침한 시장의 법칙이 지배력을 갖고 있다.

공식적인 추정에 따르면 내가 살고 있는 네팔에서 인구의 5~10%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데, 아무도 삼중요법에 의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약품들은 심지어 수입조차 되지 않고 있다. 글락소가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요법은 한 달에 약 500달러가 드는 반면, 근로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은 15달러이다. 나는 정직한 과학자라면 이 정도로 역겨운 사업 전략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히 말하면 그것은 인명구조 태만죄에 해당된다.
또 다른 충격적인 예는 인류의 생활환경이 대기 오염가스로 인해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대기 오염가스 방출을 제한하는 일에 대해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이다. 각 개인의 결단에 의지한 전 세계적인 운동만이 이러한 현상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불교와 같은 비교조주의적인 정신적 태도가 유효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이러한 상황에서일 것이다.

투안: 어떤 방식으로?

마티유: 내가 말하는 ‘비교조주의적인’ 태도는 순진하게 과거의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명분을 내세워 ‘발전’을 비난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간 경제 성장이나 기술적 업적에 의해 평가되는 발전이 우리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의 목적이 만족스런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러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고 없어도 무망한 것들도 있다. 우리는 불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우리의 목적과 활동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우리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 행복과 고통의 메커니즘에 대한 불교의 분석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빚어내는 서로 다른 결과를 분명히 보여준다.

투안: 그것이 어떻게 윤리에 이르게 되는가?

마티유: 사실 윤리의 기초는 매우 단순하다. 그 자체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없다. 단지 우리와 타인들에게 주는 행복과 고통에 의거해서 선과 악이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우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이타적인 태도를 채택할 때 판단의 가장 확실한 지침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행위가 더욱 많은 행복을 만들고 어떤 행위가 더욱 많은 고통을 덜어 줄 것인지 훨씬 더 쉽게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이론이나 미리 설정된 규칙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이다. 이것은 동기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을 식별하여 인식하는 정신(識)은 놓이는 장소에 따라 그곳의 색깔을 띠는 수정에 비유된다. 그것은 중립적이다. 우리의 의도야말로 행위의 겉모습이 어떻든 진정한 성격을 결정한다.

증오, 탐욕, 자만심 혹은 질투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파괴적 감정을 피할 수 없는 삶의 요소로 용인하자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들을 노력하면 제거할 수 있는 병의 증상들로 대하는 것이다. 불교의 태도는 간단히 말해서 매우 실용적이다. 과학 연구는 우리에게 정보는 주지만, 정신적 성장이나 내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반대로 정신적이고 명상적인 해결 방법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방식을 심오하게 변화시킨다. 예를 들면 양자물리학에서처럼 의식이 현상 세계의 총체적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이러한 총체적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이론적인 지식에서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행하는 것이 윤리의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윤리가 우리의 내면적인 자질을 반영하고 행동의 지침이 될 때, 우리의 생각과 말, 행위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투안: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론과 경험이 합치되는 것이다.

마티유: 물론이다. 이론이 합치되어야 경험의 힘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신의 의식이 실재 전체와 본질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정신은 이러한 발견이 함축하고 있는 결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우리의 삶은 그로 인해 변화되어야 한다. 성숙한 불교 수행자는 자신이 세계와 상호의존적임을 지각할 때 그것이 모든 중생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자비심으로 나타나고, 자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달라이라마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와 함께 보냈던 잠깐 동안의 시간이 사랑과 자비심에 대한 수백 회의 연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걸 알고 있다.

발견과 변화의 불교적 방법은 보통 점진적인 성격을 갖는다. 말씀을 듣고[聲聞] 공부하는 것[獨覺]부터 시작하여 지적 성찰로 이어지고, 명상을 통해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행동을 우리 존재 안에서 통합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이 경우에 명상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친숙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현명한 사람들을 거의 배출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는 위대한 사상가들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를 만든다. 그러한 위원회에 인간적 자질을 갖추지도 못한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짓 따위는 내가 살고 있는 티베트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 구도의 가르침에 있어 뛰어난 정신적 스승들이 이기주의적이고 화를 잘 내고 거드름을 피우고 허영심이 많고 나쁜 가장(家長)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상의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투안: 서양에서 ‘현자들의 위원회’의 회원 선정 기준은 그들의 직업적인 성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적인 자질은 그보다 덜 중요하다. 그런데 진정한 현자는 정신과 마음의 자질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적 접근방법이 삶의 행동방침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윤리 영역에 속하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21세기에 더욱 확산될 것이다. 예를 들면 핵무기의 확산, 환경 파괴, 유전자 복제, 유전자 조작 등이다. 또 어쩌면 어떤 유형의 인간을 선택하는 문제가 제기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연구를 통제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창작과 연구의 자유도 역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구속받지 않고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력은 죽어버린다. 예를 들면 중국과 구(舊)소련에서 전체주의적 체제가 과학 활동에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미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다. 구소련의 린센코 사건은 충격적인 예이다. 프로핌 린센코는 스탈린과 공산당의 지지를 받아 모든 반대를 억압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32년부터 1964년에 걸쳐 어떤 실험적 증거도 없이 유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강요했다. 그로 인해 소련의 생물학과 유전학 발전이 수십 년이나 늦추어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 몇몇 유형의 연구가 예기치 않게 탈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회는 알아야 한다. 유전자 ‘조작’은 이른바 ‘우수한’ 인종을 보존하고 ‘비정상인’ 혹은 ‘열등한’ 인간을 도태시켜야 한다는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다시 부상시킬 수도 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는 아이큐에 근거한 불임수술 계획을 추진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내 생각에 과학자는 그 연구로 인해 비롯되는 도덕적 문제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결정기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타주의와 보편적 책임감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과학자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자기 연구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를 실천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과학자가 자기 연구의 파급효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이론에 대해 작업하면서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성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러한 발견이 원자탄으로 이어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주민을 몰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티유: 또 다른 예로 복제양 돌리에 대한 지나치게 격렬한 항의를 들 수 있다. 유전학이나 원자물리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미국 대통령 출마자였던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1952년에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은 중립적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거나 사막에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을 얻어냈다. 악은 원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정신에 있다.”

과학은 생명을 보호할 수도 있고 생명을 파괴하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 연구의 자유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니라-이는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연구자들과 정책 결정권자들의 정신적인 자질에 더욱 큰 중요성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지적 능력, 부, 물리적인 힘, 아름다움, 권력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도구이지만 좋은 목적이나 나쁜 목적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수행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가 이타주의의 계발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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