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강의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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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n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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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강의22

전체글 글쓴이: sohn3351 » (일) 05 10, 2020 5:44 pm

유마경 강의 22

부사의해탈품(不思議解脫品) 세번째 이야기



<불가사의한 해탈>
경(經) 유마가 말했다.
'대덕이시여, 여래와 보살에게는 상각으로 헤아릴수 없는 이라는 이름의 해탈. 곧 불가사의 해탈(不思議解脫品) 이 존재합니다.
이 불가사의해탈에 들어 있는 보살은 그처럼 높고 크고 그처럼 거룩하고 장중한 산 중의 왕인 수미산 덩어리를 겨자씨 안에 통째로 집어 넣을수도 있습니다. 물론 겨자씨의 크기가 늘어나는 일도 없고 반대로 수미산의 크기가 줄어드는 일도 없이 말입니다.
심지어 그 산중의 사천왕에 속하는 여라 신들과 삼십삼천의 천자들조차 자신들이 어디에 들어와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이지요.'


설(設) 경문의 이 내용은 이전 유마경강의 21편에서 말씀드린 시간의 상대성, 그리고 공간의 상대성에 대한 상세 부연설명에 해당합니다.
과거 불가의 선종에서는 이러한 양자이론의 감성적 접근을 견성이라 일컫코는 했었습니다.
대다수의 우매한 대중들은 견성한 선사의 알아들을수 없는말들.
예로 들어 유마경 21편 강의 에서 댓글을 달아주셨던 한 벗님의 글과 같은 '온대지를 틀어쥐어 좁쌀을 만들었다는 성봉산사 공안'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할수 없는 위대한 선사의 위대한 깨달음이라는 명목하에 무한한 존경심을 보이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양자물리학이라는 학문이 나오고 그 학문을 통해 선사들의 견성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양자물리학은 이제 겨우 그 초입부분에 해당하는 학문인지라 아직은 과학이 불교 철학의 깊이를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아직은 선사의 견성이 과학보다 우위에 있어 신비주의 컨셉이 통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과학이 불교철학의 감성을 넘어서게 된다면 아니 엇비슷 한 수준까지라도 도달하게 된다면 인류는 한차원 더욱 큰 도약을 할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불교철학은 신비주의 철학이 아닌 가장 현실적이며 누구나 접근할수 있는 보편적인 철학입니다.


제가 선종의 선사들, 특히 하찮은 견성따위로 부와 명예를 얻으려하며 괴각을 일삼는 선사들을 혐오스러운 표현인 파충류 선사라느니 바퀴벌레 선사라느니 그런 비하의 표현을 사용했던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들이랍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견성자의 예시가 바로 백장야호이야기랍니다.
https://blog.naver.com/sohn3351/221256644363 제가 기존에 올렸던 글이니 한번씩 읽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선종의 견성자이나 초심을 잃지 않고 끝없이 탐구하여 덕행(德行)과 나눔의 마음을 잃지 않은 진정한 수행자는 이러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견성이란 것이 절대 하찮은 경지는 아닙니다.
이론적인 물리학적 접근이 아닌 참선(參禪)과 참오(參悟)를 통해 견성을 얻은 것은 정말 대단한것입니다.
다만 그들 견성자들의 오만하고 초심을 잃은 태도를 비난하여 하찮은 견성자라 일컫는것뿐입니다.
견성자는 이제 겨우 아라한의 초입에 들어선것에 불과하답니다.
그러한 견성자는 단언컨데 절대 중생을 벗어난 자가 아니며,
윤회를 벗어난 자 역시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은 윤회에서 벗어난 참된 해탈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그냥 증상만(增上慢)에 빠진 착각 도인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높이 우러르고 숭상하는 견성이란 경지는 양자물리학으로도 충분히 도달할수 있는 세속의 경지에 해당한답니다.

그 세속(世俗)의 경지를 넘어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닦음(修行)으로서 참다운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보살의 경지야 말로 우리 모든 불자님들이 지향해야할 참다운 목표가 되어야합니다.


경(經) 대덕이시여, 한없이 윤회를 거듭해야만 비로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중생도 있지만 반대로 짧게 윤회하는 동안에도 쉽사리 깨달음에 도달하는 중생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없이 윤회를 거듭해야만 비로소 깨달음에 도달할수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불가사의해탈에 들어 있는 보살은 7일을 1겁의 길이로 늘여 보이지만 반대로 짧게 윤회하는 동안에도 쉽사리 깨달음에 도달할수 있는 중생들에 대해서는 1겁을 7일의 길이로 줄여 보입니다.



설(設) 한없이 윤회를 거듭해야만 깨닫는 중생과 짧게 윤회하는 동안에도 쉽사리 깨달음에 도달하는 중생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거창하고 합당해 보이는 명목으로 말을 길게 이어갈수도,
짧게 표현해서 설명할수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거창하고 합당해 보이는 명목으로 말을 길게 이어가야만 인정하는 중생은 무명(無明)이 너무도 깊어 스스로 만든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는 중생이며
간단한 표현으로도 받아들이고 성불에 이를수 있는 중생은 스스로 무명을 걷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중생입니다.
제 글을 읽고 계시는 벗님들은 모두 간단한 표현으로도 받아들이실수 있는 분들이라 생각해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고 또한 벗님들에 비해서 많은 인생사를 겪은 사람도 아닌 경험이 일천한 어린 중생에 불과하나
제가 삶을 영위하면서 보았던 수많은 제 주변의 이들은 결론보다는 그 결론에 이르는 사연과 과정에 더욱 많은 중심을 두어 세상일을 해석하고는 하더군요.
어떤 견성자가 있다면 그 견성자의 견성보다는 견성에 이르는 과정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합당한가를 먼저 따지고 드는 이들을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스님이 견성에 이르기위해 촛불에 자신의 손가락을 다 태우는 대단한 고행을 통해 견성에 이르렀다고 하면 그들은 너무도 큰 감동을 가지곤합니다.
어떤 스님이 40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통해 견성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면 이 경우에도 그 스님의 견성을 중시하는게 아니라 40년간의 장좌불와를 거쳤다는 낭만적인 표현에 매혹되어 우상시하고 맹신하는 모습역시 보이더이다.

견성은 한순간 다가옵니다.
견성에 이르기 전엔 견성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한없이 높게 보고 범부는 도저히 도달할수 없는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막상 견성을 하고 나면 견성에 큰 의미를 찾을수 없게 되고는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세소적인 가치, 세력을 키운다거나 부와 명예를 얻고자 노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견성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도 간단해서 누구나 쉽게 견성에 이를수 있고,
견성에 이른다면 현대물리학중 최고의 경지로 일컷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보다 고차원적인 이해도 순식간에 이룰수 있습니다.

하지만 견성을 한다고 벗님들이 불경에 나오는 보살님들처럼 다양한 신통력을 얻는 것도 아니고,
초능력, 영능력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한사람의 견성자가 될뿐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진듯합니다.

그 쉽게 견성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글은 다음 글에서 올리겠습니다.
이 또한 견성에 이르는 결과보다 과정과 사연을 중시하시는 벗님들이 혹시나 있을까하여 조금 과정을 연출하려는 의도이니 큰 오해는 하지마시고 다음글을 기다려 주십시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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