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강의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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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n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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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의 18

전체글 글쓴이: sohn3351 » (월) 02 25, 2019 3:05 am

유마경 강의 18
문수보살품 여섯번째이야기
<지혜와 방편>
경(經) 보살에 있어 속박이란 무엇이고 해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적절한 방편을 무시한체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보살에 있어 해탈이 아닌 속박입니다. 그와 반대로 방편을 지닌체 윤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보살의 해탈입니다.
방편 없이 선정과 삼매와 명상 등에 탐닉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이고, 방편과 함께 선정 및 삼매의 맛을 즐기는 것은 보살의 해탈입니다.
방편이 뒷받침 되지 않는 지혜가 속박이고, 방편이 뒷받침되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가 뒷받침 되지 않는 방편은 속박이고, 지혜가 뒷받침 되는 방편은 해탈입니다.

설(說) 여기서 방편과 지혜의 두 단어를 먼저 설명해보겠습니다.
방편은 바라밀이며 지혜는 이치적인 깨달음 곧 불이(不二)의 깨달음입니다.
아마도 애초 불교가 처음 성립되던 시기의 범어 경전에서는 그렇게 표현했을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이 구전되는 형태의 고대 전승스타일에 의해 조금씩 변형되고 한자문화권을 거치며 변화 되어 지금처럼 일반인들은 한눈에 이게 무슨말인지 이해할수 없는 수수께기처럼 변화된것입니다.
제가 비록 범어(梵語)에 대한 일자 무식인 중생이나 원문(原文)이 무엇인지를 예측할수 있는 깨닳음을 얻은 자인지라 여래의 경문을 재해석하는 것이 아닌 여래의 원래의 원문으로 돌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1. 방편 곧 바라밀 행을 무시한체 윤회의 세계로 벗어나는 것은 해탈이 아닌 속박입니다.
- 사실 더욱 정확한 표현은 해탈이 아닌 고행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는 절대 윤회의 세계를 벗어날수 없습니다.
불이(不二) 둘이 아닌 이치를 그저 물리학자나 수학자처럼 학문적인 지식으로 깨닳고 실천하지 않는 다면 그는 인과율의 호된 채찍에 아파하며 울게될것입니다.
어떤이는 또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나는 참선과 고행을 통해 불이(不二)의 이치를 깨달았지 책을 보고 깨달은것이 아니오...
이런말을 하시는 벗님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이가 없는 분이십니다.
책이란 과거의 지자(智者)의 경험치를 쉽게 얻을수 있게 해주는 산물이며 참선이나 고행역시 이치적인 깨달음의 경험치를 보다 쉽게 깨닫게 해주는 도구와 같은 산물이기에 같은 의미입니다.
책을 보고 깨달은것과 가부좌하고 참선을 하다 깨달은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벗님들은 사물의 용어와 정의를 다시한번 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2. 방편을 지닌체 윤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보살의 해탈입니다.
- 바라밀행을 통해 불이, 곧 둘이 아닌 이치를 실천하고 항상 되새기는 보살에게는 윤회의 세계의 혹독한 회초리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굳이 야단치지 않아도 스스로 잘알아서 공부하는 학생을 스승(인과율의 의인화 명사)이 굳이 아픈 관심을 주어야할 이유가 없기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한없이 큰 복락과 행운이 언제나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윤회의 세계에 들어가더라도 고난이 따르지 않고 언제나 행복한 중생놀음을 할수 있기에 그는 작은 의미에서 해탈을 늘상 경험하게 되는것입니다.
성공하고 싶으시거든 부디 내 이웃을 돌보고 어렵고 힘든 다른 중생을 돌보셔서 적덕(積德)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3. 방편 없이 선정과 삼매와 명상 등에 탐닉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이고, 방편과 함께 선정 및 삼매의 맛을 즐기는 것은 보살의 해탈입니다.
- 바라밀행이 없이 선정을 탐닉하는 것은 현실 도피자들의 행위이고 이는 인과율의 자연스런 이치에서 벗어나는것에 불과하기에 그에게는 끝없는 구속과 속박만이 다가오게 됩니다.
바라밀행과 함께 선정을 즐기는 것은 바른 보살의 행이기에 그는 한없는 여유로움과 안정만이 기다리게됩니다.

경(經) 공성과 무상(無相), 무원(無願) 등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뛰어난 상호로써 자신의 몸을 꾸미는 일과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과 중생을 성숙케 하는 일에는 정작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바로 그것이 방편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혜이고 속박인 것입니다.

설(說) 상당수의 법사님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공성, 무상, 무원을 하나의 위대한 이치인듯 신성시 하여 강의하는 것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세상은 공하니 그무엇에도 집착하지말라.
세상은 원래 그 근본 상이 없는 허망한것이니 상에 집착하지말라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집착이 생기는 것이니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세야 말로 참다운 보살의 마음가짐이다...
다 옳은 소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치를 에초에 설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것에도 집착하지말고 일체의 원을 갖지말라는 것은 내가 집착하는 그 대상과 관념 역시 모두가 나인데 나와 대상을 차별하여 집착과 원을 내니 이것은 모세가 그리도 말했던 우상숭배이며 대승적 큰 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이치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큰 不二를 터득하라는 과도기적 명제에 불과한것입니다.

그런데 무명이 더욱 심한 수행자들은 이 과도기적인 명제를 신격화하여 그 명제를 미분적분으로 분석하고 그 작용을 살피는데에 일생을 다 허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부좀 했다고 주장하는 불교인들은 하나 같이 참나에 이르는 법이라느니, 진여를 터득하는 법이라느니 공의 세계에 들어가는 참선법을 가르친다느니...등의 말을 하고
그 법사들보다 더욱 무명에 빠진 중생들은 그러한 이치를 터득하게 하기위한 도구로서 만든 수행법을 신격화하여 군다리니를 일깨우면 참나가 깨어난다느니, 소주천 대주천을 완성하면 위대한 진여에 이를수 있다느니, 특정 주문을 1억번 외면 관세음보살님이 현신하신다느니.... 이런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나 할법한 말을 다른 중생들에게 이야기하며 중생들을 더욱 무명에 빠뜨리곤합니다.

뛰어난 상호로서 자신의 몸을 꾸미고 불국토를 장엄한다함은 스스로의 마음을 갈고 닦아 아름답고 온화한 모습을 만들라는 의미로도 해석될수 있습니다.
외모는 마음의 표상(表象)이란 말이 있습니다.
몸을 명품과 보석으로 꾸미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진여에 이르게 하라는 말이며, 진여에 이르게 하라는 말은 곧 모두가 하나인 대승적(大乘的)인 큰 나(自)에 이르라는 말이기에 다른 중생들에게 큰 자비심과 안쓰러움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상으로 유마경 문수보살품 여섯번째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성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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