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강의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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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n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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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의 17

전체글 글쓴이: sohn3351 » (월) 02 25, 2019 3:05 am

유마경 강의 17
문수보살품 다섯번째 이야기

<병의 원인>
경(經)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대상을 좇는 것이 원인입니다.
무엇이듯 좇는 것이 있는 한 병의 원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좇는 것일까요?
세상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설(說) 우리 중생들은 삶에 있어서 어떠한 고난이 다가오면 그 고난의 사유를 좁게 한정지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괴로운것은 아들놈이 내말을 안들어서이다.
지금 내가 괴로운것은 저 못된 직장 상사가 나를 괴롭혀서이다.
지금 내가 괴로운것은 내 말을 안들어주는 꽉 막힌 남편(아내) 때문이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저 진상 손님 때문이다...
내가 지금 힘이 든것은 다 배려심없는 세상 사람들 때문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무언가 원인을 좇는 한은 그는 절대 병에서, 생사고해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내가지금 괴로운 것은 다 나의 배려심없는 마음과 타인의 말을 경청하기 싫어하는 나의 인색한 마음때문입니다.
타인에게 함부로 대하며 나의 편리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지 타인이 나를 괴롭히기에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두가 둘이 아니니 세상 모두를 대상으로 병의 원인을 찾는것은 바른 방법이지만 그 시작은 나로 부터 시작하여 나의 한계를 세상 모두에게 넓히는것이 최선의 수양입니다.

나와 세상을 구분지어 남탓을 하는 마음으로는 절대 병의 원인을 찾을수 없습니다.

경(經) 병의 원인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좇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말아야합니다.
보지 않는 다는 것은 대상을 좇지 않는 다는 말이고 내 안의 주관과 외부의 객관으로부터 훌쩍 벗어난다는 말이니 그러기에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說) 보지 않는다 함은 내 안의 부정한 욕망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며,
내 안의 무명에서 비롯된 아상, 인상으로 시작된 주관과 또한 무명에서 비롯된 중생상에서 시작된 객관을 따르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기존에 설한 금강경강의에 있으니 여기서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sohn3351/221255147389

경(經) 병에 걸린 보살은 자신의 병이 진실한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이 아닌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의 병 역시 진실한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꿰뚫어 알아야합니다.
그와 같이 꿰뚫어 알았을때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킴에 있어 오직 공덕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곤란합니다.

설(說) 공덕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행은 진정한 보살행이 아닙니다.
진정한 보살행이 아니기에 그에겐 참다운 복록(福祿)이 오지도 않습니다.
그저 작은 복록이 찾아올뿐입니다.
참다운 복록이 오지 않는다고 아예 보살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아프고 고된 회초리만이 기다릴뿐입니다.
참다운 복록을 원한다면 먼저 자비의 근거를 명확히 깨달아 알고 있어야합니다.
왜 자비심을 일으켜야하는지...
불경에 나오기를 만중생에게 자비심을 가지라고 하셨기에 그런것인지,
혹은 자비심을 가진자를 중생들은 존경하기에 그런것인지,
혹은 학창시절 배운 도덕 교과서에 나오기를 바르게 착하게 사는것이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며 궁극적으론 자신의 평온을 지키는 것이라 했기에 그런것인지....
그렇다면 자비심, 곧 보살행은 은행에 현금을 맡기고 이자수익을 얻듯이,
혹은 주식시장에서 오를만한 주식을 사서 배당금을 받듯이 그런 투자인것인지를 명확히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자비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위와 같은 조건적인 작은 명제가 아닌 보다 크고 당연시되는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 이유란 우리는, 세상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타인의 궁핍함을 외면하는 것은 곧 나의 궁핍함을 외면하는 것이기에 인과율은 나의 잘못된 마음가짐을 알려주기위해 더욱 나를 궁핍한 삶으로 몰아세우곤 합니다.
지금 내가 모욕받고 학대 받는것은 내 마음속에 타인 곧 나에 대한 자비심이 없고 상대, 곧 나를 외면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기에 인과율은 나에게 모진 시련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진 시련에 고통받는 약자들을 잘 관찰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과연 티없이 맑고 깨끗하여 세상의 부정함에 상처입는것이던지요?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힘이 없고 나약한 사람들을 선한사람이라 착각하곤 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단지 타인을 괴롭힐 힘이 없어서 악심(惡心)이 들어나지 않았을뿐이지 사실 그에게 힘이 생긴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악해 질수 있는 사람입니다.

심리학에서 규명하길 강자의 폭력보다 약자의 다른 약자에 대한 폭력을 더욱 집요하고 히스테리적인 잔인한 폭력이라 규정하는 이론도 있습니다.
깨끗해 보이는 흰색은 청정한 투명함과 비슷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유색인지라 언제라도 무명에 오염될수 있는 어리석은 이들을 대변하는 색깔일뿐입니다.

진정으로 선한이는 그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기에 극도(極度)의 고난에 처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바르고 청정한 이가 굶어죽고 모진 학대에 고문받다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내것을 타인에게 나누어 준다고 내가 가난해져서 처자식을 굶기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내것을 헐벗은 이에게 나누어주고,
힘들어하는 이웃을 돌봐준다고 내 삶이 망가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웃은 곧 나와 둘이 아니기에 이러한 자비심을 가지는것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인과율의 법칙이 가장 인정하는 바른 마음이기 때문에 그에게 한없는 복덕(福德)과 복록(福祿)을 주기 때문입니다.

경(經) 세존께서는, 스스로 얽메여 있으면서 남을 고삐로 부터 풀어주는 일은 불가는하다.
먼저 해탈한 다음 남까지 해탈시켜 주는 일은 도리에 맞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먼저 해탈을 이룬 다음 윤회 가운데 뛰어들어야 비로서 다시 속박당할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설(說)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그리고 현대의 일부에서는 불교는 강자, 부유한자, 귀족들을 위한 종교라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북아(東北亞)의 불교에서는 주로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롱 불교가 전파되었나봅니다.
(그 당시 문자를 알던 지식층들이 왕족과 귀족이었기때문에 그렇다는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지금 올리는 강의는 학자의 관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불법의 일부 구절을 오해한 것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바라문만이 위대한 신에 이를수 있다고 주장하던 원시 바라문교에 대한 비판적시작에서 시작된것이 불교이거늘 불교가 귀족만을 위한 불교일리가 없습니다.
단지 어리석은이들, 곧 전세에 하층민으로 고된 삶을살며 받은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잠시 좋은 조건의 삶을 받은 어리석은 귀족들의 선민사상이 스스로의 전생을 왜곡하여 자신은 전생에도 위대한 귀족이었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를 한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자기 합리화이며 희망사항일뿐 사실 그에게는 내세의 더욱 빈천(貧賤)한 삶이 기다릴뿐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귀족들은 평생을 금전(金錢)으로 인한 고통은 아닐지라도 다른 고통으롱 한평생 한 많은 삶을 살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런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을 저는 강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강자는 가장 자비롭고 인자하며 부유한 존재입니다.
그는 보살심(菩薩心)으로 만중생을 돌보며,
만중생을 아들처럼, 어버이처럼 섬기고 받들어주는것에 삶의 보람을 느끼곤합니다.
그는 세상 모든 중생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닳아 알고 실천하기에 인과율은 그에게 한없는 큰 공덕을 돌려줍니다.

그는 황금에 대한 집착이 없기에 인과율은 그에게 끝없는 황금을 주곤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를 운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곤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운(運)을 다른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하고 다른 이들도 그처럼 운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그의 설법을 들어도 그의 의도와는 달리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그는 특별한 혈통을 타고났기에,
혹은 그는 학연이 뛰어나기에 그런 큰 행운을 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하는 설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생들은 모두 그처럼 큰 복락을 누릴수 있건만 대부분의 중생들은 그가 아무리 보물창고의 문을 열어주어도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여래께서는 최고의 행운을 가지신 분이며 만 중생이 모두 끝없는 복락을 누리길 바라고 수없이 많은 설법을 했것만 어찌된것이 후대로 내려가면 갈수록 중생들의 중생상(衆生相)은 더욱 복잡해지고 교묘해졌습니다.

벗님들께 아룁니다.
부디 모두가 성공하시고,
부유하고 건강한 행복한 삶을 즐기시길 기원드립니다.

불법을 따르는 이가 빈곤에 고통받고 병고에 시달린다면 그는 참 불자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최소한 극단적인 삶의 고해에서는 벗어나야 타인도 벗어나게 해줄수 있는법입니다.
저 상불경은 언제나 현실에서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마음가짐을 설하고 있고 앞으로도 설할것입니다.
미래, 내세에서의 행복을 위해 현실을 희생하는것은 참 불자가 아니랍니다.
오늘은 조금 기존 불경 강의와 다른 형태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꿈꾸는 상불경입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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