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강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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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n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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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강의 13

전체글 글쓴이: sohn3351 » (화) 12 11, 2018 12:01 am

유마경강의 13
<문수보살의 병문안> 첫번째 이야기
경(經) 그때 유마가 문수보살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문수보살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정말로 잘 오셨습니다.
전혀 오신바가 없이 이렇게 오셨군요.
전혀 만난바도 없이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요.'

설(說) 유마거사는 문수보살께 진여의 관점에서 대화를 걸고 있습니다.
또한 편재의 관점으로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 가득한 존재이며 곧 세상이 바로 나이니 나는 이동하는 일도 움직이는 일도 없습니다.
A라는 공간에서 B라는 공간으로 이동할때 중생의 육안(肉眼)으로 볼때는 이동 경로와 변화가 나타나겠지만, 세상 모든 것이 나임을 깨닫는 편재를 깨달은 이에게는 그는 이동한적도 없고 그가 이동하는 거리도, 그가 이동하여 머무는 공간도 모두가 그이기에 그에게는 움직임이 없는법입니다.

경(經) 문수가 답했다.
'그대의 말씀대로입니다.
온바가 없다면 나중에 다시 돌아갈 일도 없겠지요.
이미 돌아갔다면 새삼 다시 올 일도 없겠지요.
왜냐하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은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미 가고 없는것은 오는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이미 두번씩이나 본것은 다시 볼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說) 1)유마거사의 선문답에 문수보살 역시 선문답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선문답이란 견성을 한 이가 다른 견성자와 대화할때 사용하는 언어이지 알반 대중에게 자신의 특별함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견성자의 선문답을 견성에 이르지 못한 일반 대중들은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만한 견성자들은 자신의 견성을 진리에 목마른 일반대중들을 호도하는 용도로 사용하며 신분상승, 혹은 대중의 존경을 받기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는 했습니다.
저는 그런이들을 파충류선사라 규정합니다.
파충류선사들은 절대로 인과율의 고통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오욕(五欲)과 탐진치(貪瞋癡)를 버리지 못하고 네가지 상역시 버리지 못합니다.
오늘 페이스북을 보니 먼저번 강의에서 비유를 들은 대표적인 파충류선사인 오쇼 라즈니쉬가 말년에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더군요.
어떤 수행자는 평생을 참선에 몰두했는데 견성에 이르지 못했는데 어떤 파충류선사는 온갖 기행 괴각을 일삼으면서도 견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그 파충류 선사가 위대해서가 아니고 그의 궁리(窮理)의 힘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어서 가능했을뿐입니다.
견성이란 오직 궁리의 한계를 넘어설때 찾아옵니다.
참되고 바른 견성이란 자비심(바라밀)로서 자비심의 한계를 넘어설때 찾아오지만 중생의 어긋난 관념의 한계를 넘어설때 역시 견성은 찾아옵니다.
대중들은 초월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초월적인 지도자에게 의지하고 싶어합니다.
비록 그 의지가 헛된것일지라도 그들은 잠시라도 자신의 마음의 의지처를 원하기에 이러한 파충류선사들이 세상을 혹세무민 할수 있는것입니다.
부디 벗님들은 대단치 않은 파충류선사에게 의지하며 인생을 낭비하며 만들어진 중생상(衆生相)으로 고통받지 마시고, 바른 수행정진(六波羅蜜)을 하여 행복하고 온화한 인생을 영위하시길 기원드립니다.

2) 오늘 한 스님(석OO)께서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런말을 하셨습니다
<페북에서 누군가가 자꾸 '성욕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을 하더군. 그래서 그 말도 안되는.... 아니 말이 되긴 하는 건가? 낮은 깨달음에서는 말이 되긴 하지. 어쨌든 그 주장에 반론을 하느라 말이 길어졌네 그랴. 그래도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그런 주장은 불교의 기본 이론조차 모르는 주장이다. 생각 좀 해봐라. 마음을 좀 깊이 관찰해봐라. 성욕이 일어나는 순간 자아(개아, 에고, 아상)가 같이 일어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나에게 욕망이 있다고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무슨 수행을 하는 것이야?>
부처님께선 수없이 반복되는 표현인 '보살은 그 어떠한 견해에 있어서도 단견(斷見)에 치우치지 않는다.'를 강조하셨지만, 여기서의 깨달음이란 그저 근기가 낮고 하찮은 이들의 깨달음이기에 단정을 내려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단정을 내려 말씀드린다면 아라한의 작은 깨달음 곧 견성에서는 굳이 성욕이나 물욕은 크게 의미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견성한 이의 작은 깨달음이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때 찾아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성욕을 참을 필요도 없으며 물욕, 명예욕, 식욕을 참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궁리의 한계만 넘어서면 그 누구라도 깨달음을 얻을수 있습니다.
소잡는 백정도, 사람 목자르는 망나니도, 몸파는 창녀도 온갖 범죄자들도 누구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견성은 찾아옵니다.
다만 이러한 견성이란 최상의 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닌 그저 낮고 하찮은 작은 깨달음이기에 그들은 견성을 하더라도 불보살님들 같은 자비심을 가지지 못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파충류선사가 될뿐입니다.
파충류선사는 생사를 해탈했다고 착각하는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온갖 인과율의 고통속에 고통스런 고행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오직 자신의 신도들 앞에서만 의미없는 초월자 행세를 할수 있을뿐입니다.
아라한, 벽지불의 깨달음 곧 견성이란 욕망과 상관이 없습니다.
대승불자라면 이러한 작은 아라한의 견성에 안주하려 하지말고 바라밀수행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하며 용맹정진해야할것입니다.

경(經) 이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 역시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혹시 모든 사람들이 ㅇ병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제 병도 씻은듯이 낫겠지요. ... 중략
중생들의 아픔이 나을때 보살의 아픔도 따라 낫게 되는 것입니다.
제 아픔의 원인은 바로 대자비가 그 원인입니다.
설(說) 드디어 유마경사상의 정점인 모든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거룩한 법문이 나왔습니다.
보살은 그리고 부처님은 세상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닌 이치(不二)의 실천을 통해 한계를 초월하신 위대한 성인(聖人)이십니다.
위대한 성인의 자비심은 세상 가득한 대승적(大乘的) 큰 나에 대한 사랑이며, 가장 바르고 가장 완벽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대한 공감능력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성인에게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기에 중생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지만 중생의 시각으로 성인의 자비심을 판단한다면 위대한 공감능력이라는 표현이상 다른 표현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중생이, 많은 중생들이 불이(不二)의 이치를 실현하려 노력할때 세상에는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열릴것이요.
인류는 많은 병고와 고난에서 해방되는 경지에 이를것이며, 몇단계 진정한 도약을 하게될것입니다.
부디 어리석은 파충류선사들의 견성에 메이기 보다는 자비심으로서 자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정한 바라밀수행으로 참되고 바른 견성에 이르러 보살도의 경지에 이르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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