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강의 3 제자품(弟子品)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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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의 3 제자품(弟子品) 두번째 이야기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수) 10 03, 2018 1:25 pm

유마경 강의 3
제자품(弟子品) 두번째 이야기
목련의 설법
경(經) 유마에게 병문안을 다녀오는 것이 어떠하냐는 세존의 질문에 제자 목련이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저 고매하신분을 문병할 능력이 없습니다. 문득 다음과 같은 일이 생각나서입니다.
<대덕이여, 법은 반드시 여래의 가르침 그대로 설해야 합니다.
법은 중생이 아니니 중생의 티끌을 벗어난 것입니다.
목숨 있는 것도 아니니 나는 일도 죽는 일도 벗어난 것입니다.
개아(個我)도 아니니 시간적으로 앞뒤가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법의 특징은 고요함에 있으니 욕망의 대상이 아니며, 상대에 의존하지 않으며, 문자로 그려낼 수 없으며, 모든 언어가 끊어진 것입니다.... 중략
내것이라 할것도 없고 심의(心意)라든가 인지(認知)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맞서 상대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비교 한다는 일은 있을수 없습니다.
필연적인 원인도 없고 연(緣)으로써 설정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설(說) 여기서 유마거사가 말한 법이란 진여를 말함이 아니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하는 듯합니다.
제가 앞서의 강의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대승 불경에는 특정 이치를 설명할때 그 이치의 주체나 전제, 대상등을 빠뜨리고 설명한 법문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마경을 강의할때 철저히 그 부연설명을 하며 설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연설명을 읽고, 듣고 나서 유마경을 읽게 되면 더욱 쉽게 경문이 머리속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실수 있을 것입니다.


진여의 한 성품에서 아뢰야식이 나오고 아뢰야식은 특정 방향성을 가져 그 방향성에 맞게 흘러가는 이치가 인과율이며, 그 인과율을 보다 더 원활히 유지해주는 매체가 바로 유정계(有情界), 무정계(無情界)의 모든중생이며, 그중 유정계의 중생은 육식(六識)을 근본으로 존재하며 성장하여 다시 아뢰야식으로 귀결되는 것을 목표로 진화해 갑니다.

<법은 중생이 아니니 중생의 티끌을 벗어난 것입니다.
목숨 있는 것도 아니니 나는 일도 죽는 일도 벗어난 것입니다.
개아(個我)도 아니니 시간적으로 앞뒤가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 법 곧 아뢰야식은 육식(六識)이 아닌니 당연히 중생의 티끌에서 벗어난 것이며, 목숨이란 육식으로 존재하는 중생의 관점에서 존재하는 것이니 당연히 나고 죽는 일도 벗어난 것입니다.
또한 아뢰야식은 모든 크고(함장식) 작은개아(육식:개별적인 나)가 모인 집합체이니 시간적으로도 앞뒤가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개아란 육체를 가지고 육식(六識)으로 존재하는 자아(自我)만이 아닌 모든 사물과, 동식물, 그리고 시간, 모든 공간 역시 개별적인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공간에 대한 자아는 요즘 가이아이론 이란 이론으로 많이들 증명하고 상상하지만 시간에 대한 자아에 대한 설명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과 공간도 모두 인과율의 흐름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개별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신학자들은 시간에도 인격을 부여하여 크로노스란 신의 이름을 생각했나봅니다.


<법의 특징은 고요함에 있으니 욕망의 대상이 아니며, 상대에 의존하지 않으며, 문자로 그려낼 수 없으며, 모든 언어가 끊어진 것입니다.... 중략
내것이라 할것도 없고 심의(心意)라든가 인지(認知)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맞서 상대할 만한것이 없으므로 비교 한다는 일은 있을수 없습니다.
필연적인 원인도 없고 연(緣)으로써 설정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 아뢰야식은 진여에서 비롯된 일세대 무명이라 할수 있습니다.
우리들 사법계의 모든 중생들은 상대에 대한 욕망으로 불이(不二)에서 멀어지나 이 욕망으로 인한 번뇌로 인해 다시 더욱 차원 높은 불이의 법칙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라밀의 완성이며, 번뇌 즉 보리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법, 곧 아뢰야식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망이란 인과율의 흐름을 육식(六識)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존재하는 특이한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법은 내것에 대한 집착도 없고 필연적인 원인도 없고 연으로써 설정할만한 그 어떠한 대상도 없는것입니다.


경(經) <법계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은 평등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은 원래 뒤를 좇음이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진여의 뒤를 좇습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궁극에까지 도달합니다.
여섯가지 감각의 대상에 의지 하지 않는 까닭에 부동(不動)이며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오지도 않고 어디로 가지도 않습니다.>


설(說) < 그것은 원래 뒤를 좇음이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진여의 뒤를 좇습니다>
 진여의 한 성품에서 아뢰야식이 나왔으며 그 아뢰야식은 다시 여러 무명과 그 무명의 영향으로 존재하는 육식(六識)에 의해 더욱 진화 성장하여 다시 진여로 돌아가는 이치를 유마거사께서는 간략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경(經) <법은 공성(空性)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고 무상(無相)으로 나타나며 무원(無願)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별함도 없고 부정하여 물리치는 일도 없습니다. 버리는 일도 없고 내세우는 일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설(設) 법, 곧 아뢰야식은 공한 성품 가운데에 집약되어 있으나 여기서의 공은 텅빈 공함이 아닌 가득찬 공함입니다.
텅 비어 있는것과 가득차 있다는 명제는 사실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본것일 뿐입니다.
사바세계의 그어떤 천재 물리학자도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공기가 모두 사라진 진공의 상태라 해도 그 진공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공간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기때문입니다.
공을 터득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버려서 텅빈마음을 만들려하는 것은 1차원적인 해석이며, 여래께서 하근기 수행자들의 근기를 키우기 위해서 설하셨던 흑백논리에 적합한 소승불교의 수행자들이나 할법한 어리석은 수행입니다.
있는 것을 버리려 하기 보다는 그 있는 것을 더욱 높게 진화 성장시켜 번뇌를 보리로 바꾸는 수행이 진정한 대승 보살을 지향하는 위대한 수행자의 갈길입니다.


경(經) 대덕 목련이시여, 이러한 법을 설할 때 과연 어떻게 해야 법답다 하겠습니까?
법을 설한다는 것은 정작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증광(增廣)시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문 듣는 사람들 역시 증광되어진 것을듣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증광된 말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법을 설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없으며 이해하는 자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허깨비로 나타난 남자가 허깨비인 남자에게 법을 설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대는 먼저 사람들의 근기를 잘 헤아려야만 합니다. 지혜의 눈으로 능히 꿰뚫어 보고 대비심을 일으키며 대승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떠올리며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저 법의 말씀을 환히 깨달아 삼보의 맥이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대는 법을 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說) 증광이란 과거 조선시대때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불규칙 적으로 열린 과거시험을 의미합니다.
법, 곧 아뢰야식을 설한다는 것은 육식(六識)으로 존재하는 중생들에게는 인지될수도 없고 인식할수도 없는 현상을 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이 불규칙적인 과거시험인 증광이란 표현을 쓴것입니다.
증관되어진 말이란 여기서는 아뢰야식을 말하며 그 아뢰야식이 실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뢰야식에서 비롯된 우리 유정계 중생들도 실제 할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법을 설하는 자도 듣는자도 없으며 이해하는 자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마거사께서는 그래서 이러한 대승법문을 설할때는 중생의 근기를 꿰뚫어보고 그 중생에게 맞는 단계의 법문을 설하라는 뜻에서 이러한 말씀을 목련존자에게 한것이며, 목련존자는 그러한 위대한 보살의 경지에 이른 유마거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유마거사께서 많은 법문을 설할수 있도록 청법자의 역할을 하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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