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강의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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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n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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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의 24

전체글 글쓴이: sohn3351 » (금) 06 05, 2020 2:19 am

제 7 장 천녀의 가르침(관중생품 觀衆生品)

경(經) 중생은 실재하지 않는다.
문수가 유마에게 물었다.
‘보살은 중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유마가 답했다.
‘ 문수 보살이시여, 예를 들어 지혜로운 사람이 물속의 달을 보듯이 보살은 중생을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법사가 자신이 만들어낸 허깨비를 보듯이 보살은 중생을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듯이, 아지랑이에 떠오른 물과 같이 되돌아 나오는 메아리 같이, 허공에 모여든 구름과 같이…중략’



설(說) 문수는 육식(六識)의 관점에서 질문을 했고 유마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관점에서 답변을 했습니다.
육식의 관점으로는 세상은 실제 하지만 아뢰야식의 관점에서는 세상은 실제 하기도 하지만 실재하지 않기도 합니다.
사바세계의 모든 존재는 아뢰야식에서 시작된 함장식의 한 발전성에서 나온 무명으로 부터 시작되고 그 무명에서 서로 다른 개아(個我)를 자각하는 곧 중생이란 존재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개아, 곧 중생은 둘이 아니기에 필경에는 다시 원 아뢰야식으로 돌아가야 하건만 개아를 지난 중생들은 아뢰야식(불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탐욕과 시기, 질투…의 온갖 삿된 감정을 일으키기에 그러한 삿된 감정들을 정화하여 다시 신성한 불성으로 돌려주기 위해 인과율이란 법칙을 중생들은 스스로 만들어 낸것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육식으로 본다면 중생은 실재하지만 아뢰야식 함장식의 관점으로 본다면 중생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경(經) 중생에 대한 사랑
유마 왈(曰)
문수보살이시여 이와같이 어떤것도 진정 무아라는 점을 명심하고 보살은 중생을 보아야 합니다.
문수가 말했다.
‘보살이 모든 중생들을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일체 중생에 대한 그의 자애심(自愛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유마가 답했다.
‘문수보살이시여, 이와 같은 관찰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의 본질을 깨달은 보살은 그 도리를 다시 모든 중생들에게 깨우쳐주고자 생각하며 그 결과 일체 중생들의 진정한 귀처인 자애심을 일으키게 됩니다.’



설(說) 여기서 참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애심(自愛心) 곧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서구의 종교에서라면 타애심(他愛心)이라는 표현을 썻을 것입니다.
일체 중생 곧 타자(他者)에 대한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표현? 이상하죠?
불경에는 사소한 문구 하나하나부터 의미 없이 그냥 하는 소리는 단 한 단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체 중생 역시 타자(他者)가 아닌 나와 둘이 아닌 존재이기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란 표현입니다.
단 이 표현은 아뢰야식 함장식과 공감할수 있는 보살의 관점에서의 표현일뿐이지, 일반 중생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성불이라는 생각에 타인을 업수이 여기고 오직 나만 위하는 그런 육식(六識)의 관점에서의 표현은 절대 아니라는 점 꼭 잊지 마셔야합니다.

세상엔 어리석은 사람이 참으로 많아서 불경의 한 구절을 가져다 자기식대로 재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이들이 정말 많습니다.



경(經) 그것은 집착을 벗나났기에 적정한 자애심이며, 번뇌를 여의었기에 달아오르지 않는 자애심이며,번뇌 따위에 시달리지 않기에 걸림이 없는 자애심이며, 안과 밖을 혼동하지 않기에 둘이 아닌 자애심이며, 철저하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애심이며, 금강석과 같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결단이기에 견고한 자애심이며, 본래 깨끗하기에 청정한 자애심이며, 생각이 한결 같기에 평등한 자애심입니다.



설(說) 네가지 상, 곧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집착을 벗어나면 중생은 불이(不이)의 참된 이치를 깨닫게 된답니다.
집착을 여의었기에 중생은 더 이상 중생이 아닌 보살의 지위에 오르고
번뇌를 여의었기에 중생은 남보다 더 가질 생각, 남을 이기려는 생각 따위를 하지않기에 걸림이 없는 자애심을 가질수 있으며
안과 밖을 혼동하지 않는 다는 말은 청정한 법신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동일성을 가지기에 안과 밖을 구분할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기, 이곳에서 저곳, 안쪽에서 바깥쪽과 같은 양 극단의 표현은 불법에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모든 양극단은 둘이 아니기에 보살은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질수 밖에 없습니다.




경(經) 적을 쳐부수는 것이기에 아라한의 자애심이며, 계속해서 중생들을 성숙케 하기에 보살의 자애심이며, 진여를 깨닫는 것이기에 여래의 자애심이며, 정신이 혼미한 이들을 깨워주기에 눈밝은 이의 자애심입니다.


설(說) 좀전 글에서 불법은 양극단의 표현을 하지 않는다 했는데 양극단인 나와 다른 적을 쳐부수는 아라한의 존재를 경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법화경의 화성유품의 추가 설명과 같은 내용의 부연설명이라고 봐야합니다.
아라한은 절대 생사를 여읜 경지가 아니라는 증명 또한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라한이 생사를 초월한 절대 경지에 오른 이라면 적을 쳐부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애심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면 중생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보살이 나오는데 그러한 보살님도 중생에게 고문을하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은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악한 외모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고작 병아리, 혹은 그보다도 못한 파충류단계의 아라한이 이러한 보살을 흉내내어서는 절대 안되며 그는 인과율의 호된 채찍질에 울부짖고 괴로워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필연입니다.

사실 이러한 논란은 이미 2500년전에 끝이난 논란이건만 세상을 혹시 무민하는 파충류 아라한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렇게 저역시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역시 과거에는 그리고 현재 역시 이러한 파충류 아라한의 단계에서 못벗어난 중생이기에 벗님들께 설하며 제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위해 제차 삼차 언급하는 것이랍니다.
또한 그 아라한들에게는 자신이 체득한 경지가 너무도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대단한 경지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정을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과학이 더욱 발전하여 아라한들의 견성을 과학으로 밝히게되면 사라지리라 봅니다.
머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것이라 저 상불경은 생각합니다.
그때가 불교의 재 부흥기 일것이며 전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경(經) 공과 무아의 도리를 알기에 시달림을 모르는 자애심이며, 스승의 주먹이 아니기에 법을 보시하는 자애심이며, 파계한 중생을 거두어 주기에 지계(持戒)의 자애심이며, 나와 남을 모두 소중히 하기에 인욕의 자애심이며, 모든 사람들의 짐을 짊어지기에 정진의 자애심이며, 중략.



설(說) 세상을 보면 정의를 수호한다고 하며 타인에게 주먹질을 하는 사람들을 흔히들 볼수 있습니다.
타인을 비난하면 자신은 비난 받는 타인 같은 악당이 안될것이라 생각하는듯합니다.
제 예전 페이스북 벗님중에서도 그런분이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누군가가 저를 비난하면 같이 욕하며 싸워주시는 어찌보면 고마운 분이셨지만 너무 심해서 친구 차단했던 분이 있습니다.
타인을 대신해서 비록 상대가 악당일지라도 그에게 분노하는 모습이 절대 선량한 모습은 아닙니다.
파계한 중생을 거두는 것을 지계라함은 지계의 목표는 중생의 성불이기에 파계한 중생도 그 본바탕은 기억상실증에 걸린부처님이라서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덕목은 보살의 단계에 있는분들의 덕목이며 보살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서 찾아볼수 있는 덕목이지 파계승이 다른 파계승에게 보이는 덕목은 절대 아닙니다.
마치 범좌자 출신 목사가 또다른 범죄자에게 죄사함을 남발하여 종교단체에 범죄자들이 넘치게 만드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이들은 바르지 못한 이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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