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청정 수행공덕 종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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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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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불성청정 수행공덕 종범스님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9-10-04, (금) 7:46 am

불성청정 수행공덕 종범스님

모든 것에는 본성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불은 불대로 뜨거운 본성이 있음. 또 물은 흐르는 본성이 있죠. 어디든지 물은 흐릅니다. 또 사람은 사람대로 본성이 있다. 사람은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사람의 본성을 말할 때 어질 인자로 설명함. 사전에 보면 씨알 인자로 되어있음. 근데 무슨 씨알이냐? 두 사람 속에서 나타나는 씨알.

두 사람 속에서 어덯게 나타냐면 두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어야 마음이 편해요. 안 도와준다던지 서로 해치면 마음이 괴롭다. 그래서 그 중국에 한 없이 전쟁을 하던 춘추 전국시대 진시황이 통일시키기 전까지 어마어마한 전쟁을 했는데 그때 느낀거에요. 이게 전쟁만 하다보니까 편치가 않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게 본성이 아니다. 거기서 발견함.

어진게 본성이다. 그럼 어진건 뭐냐? 두 사람이상 모였을 때 편한게 있고 안 편한게 있음.
서로 돕고 살면 편한데 싸움을 한다던지 안 돕고 살면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은 인이다. ‘인성’ 보통 그러죠. 사람의 본성을 게 인성은 ‘인’이다. 사람의 씨알(씨앗)이다. 근데 인류가 착하지 않게 살고 있는데 안 편하다. 근데 개인적으로 착하게 사는 사람은 편해요.

그래서 행복하려면 착하게 살아야 됨. 부자될려면 착하면 안 됨. 다른 사람이 벌어 놓은 걸 내가 좀 취득을 해야 함. 그렇치 않으면 갑자기 부자가 될 수 없다. 나무 재들은 그냥 먹고 사는거에요. 같이. 아주 놀란 건. 나무가 무슨 건강이 안 좋아서 수액 주사를 큰 나무에 투입을 하면 혼자만 먹는게 아니라내요.

주변에 작은 풀이라던지 나무를 몇 년 후에 조사를 해보면 그 큰 나무에 주입했던 그 약 기운이 작은 나무에 갔다는거에요. 혼자 안 먹어요. 왜냐하면 작은 나무가 살아야 자기도 사는 걸 애들은 아는거에요.

그러니까 뭐 사업을 하던지 뭘 하던지 다른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사는거를 알긴 아는데 그거보다 더 시급한게 자기 이익이기 때문에 이익을 취하고자하는 마음이 더 강해서 다른사람도 살아야 나도 산다는 마음이 약해져서 그렇지 인간은 돕고 살아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인이 사람의 씨앗이다. 그 씨앗은 어디다 갔다 심어도 그 씨알이 싹이 남.

보리에서 벼 싹이 날리 없음. 벼는 어디 갔다 심어도 벼 싹 나죠. 보리는 어디 갔다 심어도 보리가 나고 그래서 사람은 어디 갔다 놔도 다른 사람을 도와가면서 착하게 살아야만 마음이 편타는 것임. 착하게 안 살면 부자는 되는데 마음은 안 편함. 이게 문제임.

게서 마음 편한게 행복임. 행복하게 살려면 착하게 살아야 됨. 그게 본성이고 인성임. 물은 흐르는게 본성이고 불은 태우는게 본성이고 불은 어디가도 태움. 뜨거워가지고. 그런데 부처님은 중생의 특징을 아는 걸로 봤음. 아는게 覺인데 아는데서 본성이 있다하고 그걸 불성이라 함.

그러니까 인성뿐 아니라 일체 중생이 지각을 가지고 있음. 각을 가지고 있음. 느낌!
근데 그 무엇이 느끼는가? 느끼는 본성!
사람의 본성은 착한거라 하지만 느끼는 본성이 그게 뭐냐? 이거죠.
그 느끼는 본성(覺性-각성)을 안 것을 깨달음이라 함.
그걸 인제 사람의 인격을 포함시켜서 애기하면 불성(佛性)임.

그러면 이 세상의 본질이 뭐냐? 아는거에요.
저 허공이 존재인데 허공이 그냥 존재하는게 아님. 저 허공이라고 인정하는 그 느낌의 작용이 있음. 허공이라는 걸 앎. 땅이라는 것도 땅이라고 아는 느낌는 힘이 있음.

사람이라고 아는 느끼는 힘이 있거든요. 그거에요. 이것뿐임. 느끼는거 그것뿐이에요.
지옥이라고 뭐 지옥가기 두려워하는 사람 많은데 가보지도 않고.... 그럼 지옥이라고 느끼는게 있다 이거죠. 그거에요. 느끼는거 떠나서 지옥이 없는 거에요.

극락이 있다 그러면 극락을 누가 느끼는거에요. 게서 하늘도, 땅도, 사람도, 지옥도, 천당도 느낌이고 전부 존재하기 위해서는 느낌이 있다. 느낌이 게 각임. 느끼는 본성! 그게 각성인데 불성이라 함.

그런데 왜 중생이 중생이라 하느냐?
느끼는 본성은 모르고 이걸 미했다 함.(迷性) 그 느낀 대상만 쫒아감. 이걸 집상(執相)이라 함.
상에 집착한다. 미성집상. 상을 집착하고 성을 모름. 미혹하다는 건 모르는 것임.

그러니까 내가 저기 뭐가 있다 그러면 저게 내가 느낀 상임. 근데 내가 느낀 본성이 있음!
근데 이 본성은 모르고 내가 느낀 상만 집착함. 게 그것을 사람이 물가에 가서 자기 그림자가 물속에 있으면 자기는 모르고 물속에 비추어진 그림자 쫒아가다가 빠져죽는 것임.

게서 내가 다 느껴 논(놓은) 거그던요. 내가.
뭐가 중요한거다 중요하지 않은거다. 이거는 아주 형편없는 거다, 이거는 좋은 거다.
이게 자기가 느껴놓고 자기가 느낀 대상 쫒아가다가 죽어버림.

인생이란 이런거에요. 누가 뭐 좋다 그랬어요. 자기가 좋다고 느낀 것임. 그게 상임.
그런데 물속에 그림자가 보여도 그냥 그림자니까. 내 몸이 중요하지 그림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거 그림자가 보여도 좋고 안 보여도 좋고 상관없잖아요. 몸에 그림자니까.

그럼 상관없는거죠. 그 느낌에 자재하면 되는데 느낌에 집착하니까 그걸 미혹중생 생사윤회 느낌에 자재하면 성불임. 자기 본성에서 자재하니까 근데 그 느낌에 집상(집착)을 집착하니까 미혹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거죠. 고 자기가 느끼는거 따라가고 또 따라가고

나쁜게 자기가 느낀 것임. 지옥을 내가 느끼는 것임. 좋은 걸 내가 느끼는거다 말이지!
느끼는게 본성이기 때문에, 본성. 느끼지 못하면 본성이 아니죠. 흐르는게 물이고 태우는게 불이듯 느끼는게 본성이라. 그래서 느끼는거에요.

하늘도 땅도 사람도 느끼고, 희노애락 생로병사 다 느끼거든요. 느끼는데 느끼는 그 본성은 모르고 느낀 상에 집착을 함. 미성집상(迷性執相)한다 했음. 그러니까 생사윤회 하는 것임.
요거 느끼다가 또 저거 느끼다가 돌고, 돌고, 돌고 돌아서 억만년을 돌고 돌아도 느끼는 행위가 끝날 날이 없음.

그러면 도데체 느끼는 상은 그렇게 많이 느낀다 하고 느끼는 본성은 뭐냐? 게 이걸 청정하다 함. 청정하다는 이게 무명무상절일체 해가지고 이름도 모양도 없어요. 그런데 온갖 것을 다 느낌. 이걸 불변수연이라 함. 인연 따라서 하늘도, 땅도 느끼고 못 느끼는게 없음.

그런데 이건 무명무상절일체(이름도 모양도 일체가 끊어짐)이기 때문에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것임. 그래서 그걸 없다는 규정도 못 짓고 왜냐하면 느낌이 자재하니까 있다는 규정도 못 짓고요. 찾아보면 없으니까. 절일체임. 일체 생각이, 정의가, 판단이 끊어진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뭐든지 뭘 표현을 하면 그건 자기 느낌임. 이론도 뭐든지 학습도 가치도 풍속도 불성의 느낌임. 게 수연임. 물로 말하면 흐르는 모양임. 그게 물이 흐르다 보면 바다로도 강물, 샘, 수도로도 흐르고 그렇게 그게 흐르는 모양이지 본성은 아님. 그냥 흐르는 것 뿐임.

그래서 청정인데 이게 청정이라는게 이게 보이는 청정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청정도 아니고 규정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거를 구경청정이라 함. 상대적인 청정이 아니라 절대적인 청정임. 그래서 구경청정을 비유로할 때 경전에서 허공청정으로 비유 함.

게서 부처님의 마음을 알려면 부처님 마음은 깨달은 마음인데 불성을 깨달았기 때문임. 중생은 뭐냐? 불성을 못 깨달았기 때문임, 견성하면 성불임. 미성하면 이게 중생임. 견성이냐 미성이냐 성불하면 반드시 상에 자재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자재, 무애, 해탈이니 이런 말을 만날 함.

견성하면 상(모든 현상에)자재가 나옴. 근데 迷性하면 執相輪廻(상에 집착한 윤회)를 되풀이 하게 되어있음. 그래서 견성하면 자재하고 미성하면 집상한다. 그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임. 누가 시킨게 아니라. 가는 순서가 그래요. 견성을 딱 하면 그 구경청정을 보니까 자기가 느낀 모양 모양들은 자기가 느끼는 현상 그림자일 뿐임.

그래서 어떤 모양에도 집착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걸 ‘무상(항상함이 없다)하다’라고 함.
근데 왜 집착하느냐? 그 성을 모르니까 상에 집착하게 되어있음. 내 본래 몸을 모르니까 물 속에 비친 그림자를 쫒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오죽하면 쫒아가겠어요. 그것밖에 모르니까 할 수 없이 쫒아가는거지. 그런데 이 불성은 구경청정한데 비유로 말하면 제일 많이 드는게

허공청정! 허공과 같이 청정하다는 것임. 게서 부처님을 알려면 당정기의하고 마땅히 우리의 생각을 허공과 같이 깨끗히 하라. 게 허공은 뭐 일절도 여기에 붙지 않았거든요. 이걸 없애려야 없앨 수도 없고 이걸 허공을 만들래야 만들 수도 없고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도 없지만 허공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어요. 허공 한번 잡아보실래요? 그럼 허공에서 벗어나보실래요 한번?

이게 없는거냐 없다 해도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있다 해도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아주 이런게 허공임. 허공이 없나? 없다면 없다는 존재가 있어야할 것 아니에요. 그럼 있다면 있다는 뭐가 잡히는게 있어야 될거아니에요. 그래서 허공청정! 이 비유임.

두 번째는 보주청정! 보주라는게 인도말로 마니(보배구슬 - 합쳐서 마니보주)라 함.
아주 동그란데 아무 색깔이 없는 투명구슬임. 동그랗고 아무 색깔이 없음. 그런데 여기다가 물건을 갖다 대면 그림자가 비침. 또 빨강거(검은거)를 갖다 대면 빨강(검은)그림자가 비추는데 그 마니보주는 아무색깔이 없어요. 이걸 보주청정이라 하는데 우리 불성을 그와 같다 함.

좋은(나쁜, 무서운, 뭐 친한) 것도 느끼고 하지만 그 느끼는 불성 자체에는 그런거 전혀! 없다. 없으면서 다 느낌! 아무 색깔이 없으면서 모든 모양 모든 색깔을 다 비추는 것이 보주다.
보주청정임. 우리 불성이 그와 같은 것임.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 이거는 죽음을 불성이 느끼는게 본성이다! 느낄 뿐이에요. 근데 느끼는 본성 불성은 죽는게 없는 것임!

비추되 색이 없다. 보주에는. 내가 좋다! 하는데 내가 느낄 뿐임. 느끼는 현상임. 근데 이 불성을 본 사람은 느껴도 아 느끼는구나, 좋구나 하고 마는데, 자재하는데 그 본성을 모르는 중생은 그 느끼는 상에 집착을 함. 근데 그게 자체가 없고 그림자이기 때문에 쫒아가면 없어져 버림. 그걸 무상, 허망하다 그래요.

허망, 무상하다는게 뭐냐? 쫒아가면 없어짐. 아주 미치는 것이죠. 이게. 가도 가도 만족 못함.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늘도, 땅도, 인생도 그림자고... 쫒아가면 없어짐. 그래서 가져도(채워도) 가져도(채워도) 없어짐. 허망함. 이게 집상중생의 생사고해임. 상을 집착한 중생의 나고 죽는 고통 바다다. 게 집상을 안 하면 절대 고통이 없음.

게서 성을 봐 가지고 상을 자재하면 저게 모두 불성에게 느끼는 그림자다. 이렇게 보면 느껴지는 모든 현상에 자재할 뿐이지 집착을 안 하고 집착을 안 하니까 고통이 없어요. 게 보주와 같다는 거죠. 아무리 많이 느껴도 보주 자체는 어떤 모양도, 색깔도 없음. 다 구경청정임.

그 다음엔 海印淸淨! 바다 해, 도장 인. 도장이라는 건 종이에 도장 찍혔듯이 도장찍힌걸 말함. 해인은 해영이라 해야 함. 그림자 영. 비유해서 종이에 도장찍으면 종이인데 도장 무늬가 딱 찍히잖아요. 근데 종이는 도장 무늬가 없죠. 그냥 종이일 뿐이지.

그렇듯이 바다에 많은 그림자가 비추어짐. 별, 해, 산 그림자가 비추어지는데 그게 종이에 도장 찍은 것처럼 비추어진다. 이래서 해인삼매라 함. 쉽게 말하면 해영(바다 그림자)임. 바다에 그렇게 일월성신 산하대지 그림자가 비추어졌는데 그 바닷물 퍼보면 없음. 없는데 비추는 것임.

그래서 우리 불성이 그 바다와 같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불성이 느끼는 것은 생로병사, 온갖 생사고락을 느끼고 그 흥망성쇠를 다 느끼고 하는데 그 느끼는 본성에는 생노병사 생사고락 흥망성쇠 없어요! 그냥 구경청정임!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느끼고 억겁도, 찰나도 느끼는데 그 불성에는 억겁도 찰나도 없음. 그냥 구경청정일 뿐임. 그러니까 인제 이런거를 알았기 때문에 역대로 도인들이 부모, 형제, 집안도 왕도 다 팽겨쳐도 절대 억울하지 않은 것임. 이런거 없이 나서 속아서 빈 몸으로 나와서 가 봐요. 아이고 완전 나는 속았내.
그래가지고 불교가 그냥 몇 사람 속고나면 벌써 다 없어졌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아요. 그거 참 희안해요. 이 해인청정임. 물 속에 북한산(관안산)이 비추지만 물에는 북한산(관악산)이 없음. 그냥 물일뿐임. 우리가 온갖 것을 다 느끼지만 우리 불성에는 그런게 없음. 그냥 청정할 뿐임.

근데 느끼긴 왜 느끼냐? 인연 따라서(수연-隨緣)! 수연일 뿐 임.
그 불성은 불변임. 불변청정! 불변청정이 구경청정임. 변하지 않으니까 아주 구경 끝없는 청정임. 그러니까 이 불성으로 돌아가면, 참! 이게 말할 수가 없는거에요.

상에 자재하니까 相自在! 그러니까 도 닦으라는 것임. 이런게 있기 때문에, 이런게 전해지기 때문에 이런걸 알고 지도하는 사람에게는 힘이 나오는데 이걸 道力이라 함. 불성을 깨달은 데서 나오는 힘을 도력이라 함. 구경청정 임.

그러니까 허공청정, 보주청정, 해인청정! 이 청정한 것임. 그러면 수행을 하는데 수행은 노력하는(닦는) 것임. 이걸 무슨 노력이 가장 훌륭한 노력이냐? 이 불성을 아는 노력이 훌륭한 노력임! 불성을 몰라서 문제가 생겼으니까요.

예를들면 왕자인데 자기가 왕자인줄 모르고 떠돌이 생활을 했음. 그것도 뭐 여러 왕 중에 왕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가 아니라 유일 독자! 왕이 될 수밖에 없는 왕자가 있었음. 근데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단 말이죠, 그럼 이 왕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뭔가?

이 왕자가 뭐 어디 가서 돈 벌이하고 벼슬하고 그거 아님. 자기가 왕이 될 수밖에 없는 왕자라는 거를 빨리 알아채는 것임. 빨리 알아채면 가자마자 왕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왕자인줄 모르고 헛고생하는 왕자한테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왕자라는 걸 빨리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는 없다. 게서 이 불성, 본성을 몰라서 헛고생하는 중생들에게는 가장 중요한게

그 불성, 본성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거는 없다! 이거죠. 근데 이 불성, 본성을 알아가는 쪽으로 노력하는 걸 수행이라 함. 그래서 일체가 다 불교는 불성, 본성을 아는 쪽으로 공을 돌려요. 그게 회향임. 중간에서 뭐 그걸로 만족하는게 아님.

뭐를 이루었어도 그 이룬 공을 불성, 본성을 아는 쪽으로 돌림. 그래서 회향삼처실원만(回向三處悉圓滿) 이렇게 아주 딱 규칙적으로 축원을 하는데. 그게 보리회향임. 깨닫는 쪽으로 중생제도회향. 그 불성청정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회향. 이게 삼처인데요.

부자되는것도 좋은데 부자되는데 머무르라 하지 않음. 그 부자되고 불성으로 돌아가라. 부자 그대로 불성으로 돌아가라! 그게 수행임. 모든 것은 따라가 보면 없어요. 따라간다고, 지킨다고, 없어져서 힘들고 이게 중생임. 게서 마지막에는 인생은 종착역에는 눈물임. 왜냐?

이룬다고 힘들고 지킨다고, 없어져서 힘들고 내가 이런 법문할 때 어디 가니까 스님말씀 들어보니까 할 일이 하나도 없내요. 이래요. 그럼 내 말이 틀렸어요? 그러니까 아 그건 좀 따져봐야 알겠고요. 이 세상 결과가 그래요. 이룬다고, 지킨다고, 없어져서 허망해서 힘들어요.
그런데 이룰 때 모르죠. 지킬 때 모르죠. 그게 눈물인줄 전혀 모릅니다. 그게 인류의 역사임.
진시황이 이룬거 지금 어디 갔어요? 참 혁명가도 많았고 업적을 세운 것도 많았는데 지금 있는 데가 하나도 없음.

그러니까 이제 깨달음이라는게 바로 뭐를 해도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깨닫는데로 돌아가라! 이게 회향임. 그럼. 수많은 것이 이게 수행인데 모든 것은 깨달음으로 돌리기 때문에 그래요. 수행인데 근간에 보면 기본적인 것을 서너 가지로 보면

첫 번째가 보시 수행임. 게 보시바라밀임. 바라밀이라는 건 불성으로 돌아간다는 말임. 보시가 바라밀보시임. 그럼 보시수행. 보시바라밀이라면 보시수행의 공덕으로 깨달음을 이룬다.
이 말임. 그러면 뭐냐? ‘百年貪物一朝塵 慈悲布施法王者’ 절에 오자마자 가르치는 것임.

‘백년동안 재물을 탐하면 하루 아침의 티끌이다.’ 하루아침은 뭐냐? 그 재물 모아놓은 사람 죽는 순간에 다 날라가는거에요. 그거 희한하지. 돈을 모아놓고 죽으면 어디로 가던지 다 날라감. 근데 ‘자비로 보시를 하면 법왕이(부처가) 된다.’ 또 그런거를 비유를 함.

‘퇴비와 과일’ 퇴비를 그냥 산더미 많큼 쌓아놓았는데 그냥 놔두면 그냥 퇴비일 뿐임. 그걸 사과나무에다 자꾸 거름을 주면 퇴비가 사과가 되는 것임. 게서 재물을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죽으면 티끌일 뿐인데 자꾸 베풀어서 보시를 하면 이게 어마어마한 공덕이 된다. 이거죠.

퇴비가 과일되듯이 이것이 보시수행임. 두 번째는 염불수행.
부처님의 명호를 내가 자꾸 부르면 부처님의 명호가 내 이 여기저기 상에 집착하는 상에 환히 밝혀지는 것임. 내 마음은 항상 상에만 집착해요. 그래서 머리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부 기억이 나타나는게 전부 사람 만난거 바다, 땅 본거 뭐 어디서 돈 받은거 돈 꿔주고 못받은거 사랑에 속은거 정에 울은거 뭐 이런 것만 꽉 차있음. 저 머리속에 뭐가 들었을까? 궁굼할거 하나도 없음. 전부 뭐 온갖 인생살이에서 보고 들은거 다 들었다. 보고 들은거 들었지 안 보고 안 들은거 거기 들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꿈에서는 늘 보고 들은거 나오죠. 재는 뭔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그거 하나도 궁굼할거 없다. 지금까지 지가 보고 느낀거 다 들었음. 그러니까 이 마음이 항상 복잡하고 어둡고 바쁜거에요. 이걸 암실과 같다 함. 캄캄해요. 온갖 생각으로 뒤덮여가지고, 그런데 여기다가

서가모니불 서가모니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이 부처님 명호를 외우면 그런 잡념이 쏵!~ 없어지고 환하게 밝아짐! 게서 염불수행은 暗室明燈(암실에다 등을 밝힘)이다. 게서 고 명호 뭐 부처님 명호 부르는 순간마다 그게 밝아진 것임. 그게 염불수행임.

그러고 염불수행은 탁수정주라고도 하는데 혼탁한 물에 맑은 구슬을 탁 넣으면 그 맑은 구슬힘으로 탁수 혼탁한 물이 맑아짐. 염불수행은 암실명등이요 탁수정주라! 게 염불임. 내 마음을 맑히는게 염불임. 내 마음 맑아지면 내 본성을 내가 볼 수 있음. 그 다음엔

‘淨心修行’ 내 마음을 내가 맑힌다. 그래서 이걸 自淨其心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맑혀라!
이러잖아요. 게 내 마음은 나밖에 못 밝혀요. 자정 못해요. 딴 사람이 나를 맑혀줄 수 없음. 아버지가 아무리 힘이 세도 아들 마음 맑혀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아들에게 집착하는 것도 헛 고생임. 아버지가 그걸 모름. 아들에게 집착하는게 얼마나 허망한지 모르는 것임.

그러니까 세상에 아버지들 보면 어리석다. 내가 아들노릇 한거 가만히 보니까 진짜 아니었음. 그러니까 이런 아들을 위해서 평생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면 그 아버지 노릇도 할게 아님. 그러니까 이 인생살이가 그런 것임.

이 마음을 맑힌다. 마음을 닦는다. 이 수심이라, 정심, 자정기심, 수심수행, 수심정심. 그러잖아요 마음을 맑힘은 내가밖에 못해요. 누가 대신 해줄수도 없고 내가 마음 맑혀줄 수도 없고 이게 수심수행임. 이 내가 내 마음 맑히는게 그게 나의 본성을 아는 지름길임.

염불수행, 보시수행, 수심수행. 그럼 수심수행을 할려면 djejg게 해야하냐? 첫 번째는
만날 상에 집착해서 돌아다니는 마음을 불러들여야 됨. 이게 攝心(섭심)임. 이 마음이 뭐 지금도 부산 갔다 대구 갔다 뉴욕, 북경 갔다 어디 갔다, 10년 전에 헤어진 사람에게 갔다,

또 뭐 한다 젊은애들 보니까 얼마나 마음이 여러군데 돌아다니는지 연애하는 방송국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보니까 애들 진짜 복잡하게 살더라고 뭐 이게 나를 좋아하는 건가요 안 좋아하는 건가요? 아니 직접 사귀어보면 될 걸 왜 방송국에 갔다 질문을 하냐고. 산에 가도 그래요.

이미 건강을 위해서 산 타려고 왔으면 길이 있으면 가보면 알거아녀. 가지도 않고 딱 서서 저리로(요리로) 가면 어디로 가는데요. 이게 묻는 사람들 많아요. 그냥 가봐! 가보면 자기가 한 번 가본 길은 확실하게 앎. 그 사람 사귀는 것도 그냥 사귀어봐라. 방송국에 알아보지 말고.
이렇게 마음이 탁해진 것임.

그래서 이런 마음을 섭심 거두어들여서 이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마음이 뭔가? 반조를 함.
그 마음을 돌이켜 보는 것임. 섭심반조. 내가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상으로 쫒아가지 말고
화나는 대상에서 거두어 들여요. 그래서 화내는 이 마음이 뭔가? 돌이켜 보면 반조임.

그러면 반조를 하면! 구경청정심을 바로 볼 수 있음! 아무 것도 없이 억만년이 지나가도 세월도 없고 천지 만물이 다 비추어져도 거기에는 어떤 모양도 없고 시방삼세가 그냥 청정! 하나뿐인 거에요. 금방 보게 된다고! 이게 반조를 안 해서 못 봐요! 구경청정심을 바로 보는거에요.

그럼 그게 견성이고 그럼 일체 상에 자재하게 됨. 어떤 상도 구경청정의 마음에 비추어진 그림자니까 그게 수심수행임. 마음을 닦는다는 건 ‘섭심반조’하는 것임.

내가 지금 따분하다 그러면 따분하다는 생각을 가둬!
게 이 따분하다고 느끼는 요놈이 뭔가? 이렇게 반조하면, 환한 청정심을 바로 보게 됨!
이걸 自證自己[스스로 자기 청정심(본성)을 봄(증명함)]라 함. 이건 자기밖엔 할 수 없음.
섭심반조하면 자증자기임. 이게 수심수행임.

이 수심수행은 비유가 두 가지가 있음. 양목상개라고 나무 둘을 서로 비벼요. 이게 상개임.
그럼 卽能生火 여기서 불이 남. 그럼 火生之時에 불이 날 때에 還自燒木 이 두 나무를 다 태워버려! 그러면 여기에 뭔 말이냐면, 처음에는 밖으로 나가는 마음, 안으로 들여다보는 마음!

두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이 밖으로 나가려는 마음을 자꾸 끌어들여서 자꾸 안으로 돌아다보면 확 밝아짐. 그게 불 난거에요. 거 밝아지다 보면 뭐냐? 온갖 생각을 안으로 돌아다보는 마음
밖으로 나갈라는 마음 두 마음이 다 타버려서 아무것도 없어져 버림.

그냥 구경청정 하나만 환히 남음! 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임. 갈려고 하는 마음, 잡으려고 하는 마음 없어요. 그냥 청정심 하나 뿐인거에요. 그러고 또한 비유는

빙상연화 비유인데 그 願成解脫이면 해탈을 이루려는 거는 氷上燃火다. 빙상연화라 하는거는 얼음위에다가 불을 피우는거에요. 그러면 火猛氷液(화맹빙액)을 함. 불이 맹렬하면 얼음이 액체가 됨. 그러면 빙액이면 그 위에 무슨 일이 벌어져요? 火滅 불이 꺼져요. 요런 비유를 함.

염불 수행을 강조한 도작법사가 가르치신 법문임. 이 극락세계도 해탈극락임.
집상극락이 아니라 이게 본성극락임. 상에 집착하는 극락이 아님. 불성극락임. 그러니까 불성으로 돌아가는게 극락인데 그 불성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는 이게 원성해탈이다. 해탈을 이루려고 원하는거다. 그거는 뭐와 같냐? 빙상연화와 같다.

그러면 화맹빙액이라. 빙액화멸이라. 그럼 뭐 번뇌의 불이나 집착의 불 또 극락가려는 불 싹!~ 다 꺼져버려! 그 일체가 구경청정세계 하나 뿐인거에요. 그렇게 되면 본래 불성이 청정한데 청정을 이룬 것이 수행이잖아요. 그러면 수행한 것이 공덕이 있느냐 없느냐?

이게 수행공덕을 이야기하는 것임. 불성이 청정(구경청정)했잖아요. 게 수행을 해서 청정을 이루었어 이루고 보니까 불성은 청정한거에요. 그러면 본래 청정한거를 수행으로 본래 청정한거 안 것뿐인데 그 수행이 무슨 공덕이 있나? 어덯게 생각하세요?

거 뭐 어떤 사람이 나는 죄가 없다. 죄가 없어. 게서 재판을 했어요. 재판했는데 이제 재판하는 기술이 없어가지고 변호사 선임해서 변호사가 재판을 대신 해주었거든요. 근데 처음에 주장한데로 무죄판결을 받았음. 무죄판결 받고나니까 본래 내가 죄가 없다. 그래서 무죄판결 받았 으니까 너 변호한건 아무 짝에 쓸데없다. 이래가지고 돈을 안 주었음.

그러면 그 사람이 옳은 짓 한거에요? 그 무죄를 무죄로 증명받은거 그게 공로임. 그러니까 공로가 있는 것임. 이래서 이게 수행공덕이라는 겁니다. 그럼 청정을 청정으로 안게 그게 공로죠. 수행을 안 하면 청정인데 청정을 모르잖아요. 그게 공로임. 그게 보시공덕이고 염불공덕이고 그것이 수심공덕이고 그런 것임. 게 그 공덕이 어마어마하고 말할 수 없다는거죠.

또 광부공덕이 있음. 수행은 광부와 같다. 금이 모래 속이나 돌 속에 있음. 금이 본래 있었잖아요. 이거를 이제 깨서 금을 캤잖아요. 근데 금인데 본래 있던 금을 캔 것임. 금 캔 사람은 아무짝에 한 일이 없다 이래가지고 공로를 인정 안 하면 아 그게 옳은 생각이냐 이거죠.
이게 있긴 있었는데 그것이 금으로서 나타나도록 노력한거는 분명히 있는거다.
금이 달라진 건 아님. 금을 증명한 공로가 있다. 이거에요. 그런거에요. 그래서 본래 정정한 불성을 청정으로 증명하는 공로가 그게 수행임.

그래서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이 모두가 부처다.

그거는 자기 혼자 나는 죄가 없다. 이렇게 주장할 뿐이지 정말 법원에 가서 무죄판결을 받았느냐? 이거에요. 그냥 죄 없는건 아는데 무죄증명이 안되었다 이 말임. 판결을 받아봐서 정말로 인제 죄가 없으면 그 죄가 없이 판결 받은 노력은 있는 것임.

마치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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