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비판적 고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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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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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비판적 고찰(5)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19, (일) 1:07 pm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비판적 고찰(5)
성원스님

월간 『불교』의 미국불교 소개
일제 시대의 한국불교는 매월 1회 불교 종합잡지인 『불교』를 창간호 (1924년 7월 15일) 부터 제 108호 (1933년 7월 1일) 까지 발행하였다. 『불교』 제 108호가 발행된 이후, 월간 『불교』는 재정난과 편집원칙의 문제로 휴간에 들어갔다. 약 4년간 휴간 기간을 거친 이후, 월간 『불교』는 1937년 3월 1일 속간되었다. 월간 『불교』는 1944년 12월 1일 제 67집을 발행한 이후 폐간되었다. 필자는 일제 시대 한국불교 주요 월간지인 『불교』에 다루어진 미국불교 관련 내용을 본 논문에서 소개하겠다.
일제 시대 한국불교 주요 월간지인 『불교』와 1935년 8월호 (8월 3일 발행) 부터 1944년 4월호 (4월 15일 발행) 까지 발행된 또 다른 일제 시대 한국불교 주요 월간지인『불교시보』를 검토해보았을 때, 그 잡지들은 만주, 중국, 그리고 일본에 소재한 한국불교 포교당 기사들을 상당히 많이 소개하였다. 그렇지만, 그 잡지들은 미국 소재 한국불교 포교당 기사들을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 그 잡지들은 특히 재일 한국승려 유학생과 포교사의 활동과 일본불교의 현황을 다각적으로 그리고 매우 상세히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해방 이전 미국에는 한국불교 포교당이 없었다고 매우 쉽게 추정해볼 수 있다.
월간 『불교』 제 5호 (1924년 11월 15일) (p. 69) 는 미국불교와 관련된 두가지 소식을 소개하였다. 첫째, 그 월간지는 폴 케이러스 박사 (1852-1919) 의 미망인 메리 헤글러 케이러스 (1861-1936) 의 불교활동을 소개하였다. 독일계 미국인인 폴 케이러스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시카코에서 1893년 개최된 세계종교박람회에 참석한 이후, 동양종교에 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증대되었다. 그는 일본 임제종 소속인 카마쿠라 원각사 관장인 석종연 스님 (1860-1919) 을 종교박람회에서 만난 이후 그 스님과 친분을 지속하였고, 석종연 스님의 제자인 D.T. 스즈키 (1870-1966) 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그가 편집장으로 봉직한 오픈 코트 출판사의 사원으로 고용하였고, 그의 출판사를 통해서 스즈키의 저서 또는 번역물들을 출판하여 동양종교인 불교를 서구사회에 소개하였다.
케이러스 여사는5-6만불의 사재산을 출연하여 늦어도 1926년에는 범세계불교도대회를 미국에서 개최하려고 계획하였고, 그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여사는 우선 일본을 방문하여 경도여자고등전문에서 강연을 하였고, 그 강연에서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일본불교의 협조를 구했다. 그 당시 여사는 일본 방문 이후 중국을 방문하여 그 계획에 대한 중국불교의 협조를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이후, 인도와 구미 각국을 방문하여, 여사는 각국의 불교도들의 협조를 구할 예정이었다. 여사는 일본에 체재한 동안 그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종립 용곡대학의 22인 교수를 통해 일본불교연합회에 범세계불교도대회의 협조를 정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둘째, 그 월간지는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하와이별원의 불교청년회관 낙성식과 개관식을 소개하였다. 서본원사파 하와이별원은 오아후섬의 호놀루루에 위치하고 있고, 공사비 70만여 달러를 사용하여 불교청년회관을 낙성하였고, 1924년 10월 18일부터 일주일간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별원은 첫째날에는 불교식으로 개관식을 거행하였고, 둘째날에는 하와이 중학교, 여학교, 불교청년회, 각 학원연합 대운동회를 개최하였고, 세째날에는 병원과 감옥 위문을 다녀왔고, 그리고 네째날에는 별원 불교청년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만찬회를 개최하였다. 별원은 또한 다섯째날에는 불교 청년들과의 사교회를, 여섯째날에는 정구대회를, 그리고 일곱번째 마지막날에는 강연회, 전람회와 무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월간』 불교 제 16호 (1925년 10월 1일) (pp. 43-44) 는 하와이에서 전법활동을 하고 있었던 여성 영국인 불교포교사인 도로씨 헌트를 소개하였다. 상좌부 불교를 신봉한 도로씨 헌트는 그의 남편인 어니스트 헌트 (1878-1967) 와 함께 1915년 하와이로 이민을 왔고, 1921년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하와이교구 교구장인 이마무라 에묘의 격려로 불교학교를 개설하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불교를 포교하였다. 1924년 이마무라 스님은 헌트 부부를 위해 정토진종 승려 수계식을 거행하였다. 도로씨 헌트는 기독교 찬송가와 그레고리오 성가를 모방하여 정토진종의 의식용 영어 찬불가집을 만들어 하와이에서 출판하였다.

월간 『불교』 제 41호 (1927년 11월 1일) (p. 47) 는 경도에 소재하고 있는 정토진종 동본원사파 종립 대곡대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던 그리고 미국 (구미) 에 선불교를 본격적으로 전파하였던 스즈키 다이셋쯔의 영문판 『선의 연구』 제1집의 출판을 소개하였다. 스즈키의『선의 연구』 제2집과 제3집은 런던불교협회 창시자인 크리스마스 험프리 (1901-1983) 의 편집으로 1933년과 1934년 각각 미국 현지에서 출판되었다. 스즈키는 『선의 연구』 시리즈를 통해서 서구사회에 선불교를 소개하였다.

월간 『불교』 제 49호 (1928년 7월1일) (pp. 50-51) 는 일본 경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중외일보의 보도를 인용하여 하와이 불교 신자수를 소개하였다. 기독교 (신교) 는 하와이에서 1819년 전도를 개시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는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소속의) 소류 카가히 스님에 의해서 1889년 하와이에 소개된 일본불교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발주자인 불교의 신자수는 선발주자인 기독교의 신자수보다 그 당시 하와이에서 훨씬 많았다.

그 당시의 하와이 총 인구 33만 3천인가운데, 불교 신자수는12만5천인이었고, 천주교 신자수는 10만3천인이었고, 몰몬교 신자수는 1만 4천인이었고, 기독교 신자수는 1만 1천인이었고, 무신론자 숫자는 8만인이었다. 불교 신자 전부는 일본인이었고, 전체 천주교 신자 가운데 2만 7천 170인은 포르투칼인이었고, 1만 3천 500인은 하와이인이었고, 몰몬교 신자의 절대 다수는 하와이인이었다. 기독교 (신교) 를 믿는 포르투칼인은 246인이었고, 기독교를 믿는 하와이인은 4천 500인이었다. 지난 6년간 하와이인, 포르투칼인 및 필리핀인 기독교 신자수는 감소하였고, 일본인과 백인 기독교 신자수는 증가하였다.

월간 『불교』 신 제20호 (1940년 1월 1일) (p. 54) 는 “미국인으로 당시 54세인 화이트씨는 일본 전역을 여행한 후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미본토 교구장을 역임하였던 종립 용곡대학의 마쓰야마 켄주 스님을 방문하여 6개월 동안 그 스님의 지도로 불교를 배웠고, 경도의 서본원사에서 지난 1939년 11월 득도식을 거행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마쓰야마 켄주는 불교학연구소를 1930년 경도에 설립하였고, 불교학연구소는 193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각종 교육 프로그램과 통신 강좌를 개설하였다.

월간 『불교』 신 제 21호 (1940년 2월 1일) (pp. 59-60) 는 두가지 소식을 소개하였다. 첫째, 그 월간지는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미 본토교구는 현지 승려 양성과 현지 포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현지에 불교대학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서본원사파 본부에 건백서를 제출하였고, 그 교구의 주도로 서본원사파 본부에서 북미 지역 현지 불교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간담회도 개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참고로, 서본원사파 승려들이 1893년 최초로 가주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동 교단의 사원이 1899년 최초로 가주에 개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 이후,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미본토 교구는 영어를 모국으로 사용하는 성직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엔료 시게후지 교구장 (b. 1958) 은 1948년 현지 성직자 양성 목적으로 시노부 마쓰우라 여사의 가정집에서 불교강좌를 시작하였다. 그들이 칸모 이마무라 스님이 봉직하고 있었던 버클리 포교당으로 1949년 그 프로그램을 옮긴 이후, 이마무라 스님의 주도로 불교연구센터를 설립하였다. 미본토 교구는 1958년 교구 차원의 성직자 양성기관의 설립을 의결하여 이마무라 스님이 관리하고 있는 불교연구센터를 교구의 공식 성직자 양성기관으로 삼았고, 이마무라 스님을 센터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마무라 스님이 센터 소장으로 1958년 공식적으로 임명된 후 곧 바로 마사미 후지타니 스님은 1958년 센터 소장직을 맡았고 1962년까지 센터 소장으로 봉직하였다. 이마무라 스님은 후지타니 스님의 후임으로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센타 소장으로 봉직하였다. 그 센터는 1969년 불교대학원으로 발전되었고, 그 대학원은 현재 석사과정을 개설하고 있고, 미국 현지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성직자 양성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대학원은 1985년 12개 신학대학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는 종합신학대학에 소속되었다.

둘째, 그 월간지는 하와이 호놀루루에 위치하고 있는 법화경사 주지 고바야시 니치슈가 1936년 인도로부터 불사리를 봉대하여 온 이래 세계평화탑을 건립하고자 노력하였고, 최근에는 평화탑 부지를 구입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법화경사는 1931년 창건되었고, 사찰의 이름을 1954년 묘법사로 변경하였다. 묘법사는 1979년 일련종 소속이 되었다. 법화경사는 1939년 본격적으로 평화탑 건립을 시작하였고,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후, 법화경사는 폐쇄되어 평화탑 건립을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1945년 8월 15일 종료된 이후, 법화경사는 다시 문을 열었고 평화탑 건립을 재개하였다. 1936년 하와이로 이운된 불사리는 일본으로 옮겨져 더 이상 호놀루루에 없었기 때문에, 묘법사는 자와하랄 네루 수상이 평화운동가인 후지이 니치타쓰 (1885-1985) 스님에게 기증한 또 다른 세트의 불사리를 1954년 하와이로 모셔왔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묘법사는 1966년 평화탑 기공식을 그리고 1968년 평화탑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도진호의 개종과 초기 미주 한국불교의 굴절
도진호는 초기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에 두가지 논란거리를 제시하였다. 첫째, 도진호의 종교적 삶은 초기 미주 한국불교의 굴절을 의미한다. 도진호의 개종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미주 한국불교는 기독교 사회인 미주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굴절되었다. 도진호가 미주 최초의 한국 사원인 고려선사를 하와이 호놀루루에 세웠는 지 아닌 지의 사실 여부를 우리는 확증할 수 없다. 설령 도진호가 고려선사를 세워 교민 포교를 했다고 해도, 도진호는 그 사원을 지속시키지 않았고, 본인 자신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도진호의 개종은 기독교 미주사회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초기 미주 한국불교의 굴절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다.

둘째, 도진호의 사회적 삶은 일제 강점기 동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한국 역사의 굴절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다. 도진호는 1931년 하와이로 오기 전 불교청년운동의 지도자로 항일운동을 열심히 전개하였고, 1940년대에는 하와이를 중심으로 조국의 독립과 사회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이로 온 이후, 도진호는 계속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을 받았고, 미국정부는 도진호를 요시찰 인물로 감시했고, 일본에 부역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도진호의 친일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 도진호의 삶은 일제 치하의 미주 한인사회의 굴절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다.

도진호는 하와이를 향해서1931년 8월 21일 한국을 출발하였다. 조선불교청년총연맹 동경동맹은 기관지인 『금강저』에 원고를 기고해달라고 도진호에게 청탁하였고, 도진호는 원고 청탁을 정중히 거절하면서 1932년 2월 29일자 서신을 『금강저』 편집실로 보냈다. 그 서신의 마지막 부분은 『금강저』 제 20 호 (1932년 12월 8일) (p. 63) 에 수록되어 있다. 『금강저』 편집실은 도진호의 서신에 근거하여 도진호가 하와이에 고려선사를 창설하였다고 보도한 것 같다.

만약 도진호가 하와이에 도착하여 하와이 호놀루루에 고려선사를 창설하였다면, 도진호는 본인의 서신에 본인의 주소지로 적은 호놀루루의 301A School Street에 고려선사를 창설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진호는 본인이 임대하여 살고 있는 가정 집을 고려선사로 그 서신에서 주장했을 수도 있다. 자료와 증인의 부족으로, 필자는 현재로서는 도진호가, 사실상, 얼마 동안, 그리고 얼마나 자주, 고려선사의 법회를 주관하였는 지를 증명할 수 없었다.

하와이 주립대학 사학과 명예교수인 최영호는 1978년 7월 5일 도진호와 인터뷰를 하였고, 그 내용을 2 페이지 분량으로 수기하였다. 삼우 스님 (b. 1941) 은 최영호의 그 인터뷰 기록을 그의 논문에서 상세히 인용하고 있다. 도진호는 “1932년 1월 기독교계의 주요 인사인 동지회의 김진호와 감리교의 현순 목사 (1880-1968) 가 주동이 되어 조선총독부가 하와이 한인 교민들의 동향 파악을 위해 본인을 하와이에 보냈다고 주장하였고, 약 800명의 한인 교포들이 중국 레스토랑에서 만나 본인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국 이민국은 본인을 불러 그 혐의를 조사했고 무혐의로 본인을 처리했다.”라고 주장하였다.

도진호는 역경 속에서 그리고 무급으로 이승만 추종단체 (동지회) 기관지인 『태평양 주보』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태평양 주보』의 창간호는 1930년 12월 13일 발행되었다. 그렇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필자는 도진호가 언제부터 이승만과 밀접한 정치적 관계를 맺고 동지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였고, 『태평양 주보』의 편집인으로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했는 지를 아직 파악할 수 없었다. 도진호는 “한인교회에서 한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쳤을 때, 본인은 한국사의 맥락에서 불교를 설명했다. 상당수의 한인 기독교 신자들은 본인이 한국사 강좌를 빙자하여 불교 포교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곤 하였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필자는 도진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느 한인 교회에서 한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쳤는 지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미국 행정부는 의회와 공동으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주제로 청문회 (1945년 11월 15일-1946년 2월 6일) 를 개최하였다. 우리는 그 청문회의 보고서 (제8권) 에서 도진호 자신의 주장과 매우 다른 내용을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보고서 내용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도진호는 (본인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세가지 다른 이름을 썼고, 1933년 5월 22일 하와이 일본영사관으로부터 미화 80 불을 받았고, 상당 기간 동안 미국정부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았다. 1931년 불교 승려로 하와이를 통해 미국에 입국했지만, 분명히 말해서 도진호는 하와이에서 불교 활동을 한 적은 결코 없었다. 도진호은 일본에서 수학했다. 도진호는 당분간 (호놀루루가 위치하고 있는 오아후 섬의) 군사기지 몇 군데에서 양복 직공으로 일했고, 그 후 (오아후 섬에서) 몰로카이 섬으로 이사를 해서 그곳에서 개인 비지니스를 했다.”

자료의 부족으로, 필자는 도진호가 얼마 동안 오아후 섬에서 살았고, 언제 오아후 섬에서 몰로카이 섬으로 옮겼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필자는 또한 도진호가 몰로카이 섬에서 얼마 동안 살았고, 무슨 개인 비지니스를 했는 지도 알 수 없었다. 1941년부터 오아후 섬의 호놀루루를 중심으로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도진호는 일정 기간 몰로카이 섬에서 산 이후 몰로카이 섬에서 오아후 섬으로 다시 옮겼다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도진호가 언제 몰로카이 섬에서 오아후 섬으로 다시 이주하였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필자는 도진호가 언제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 지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승만의 영향 아래에서 동지회의 핵심멤버로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을 할 때, 도진호는 이승만이 세운 무교파의 한인기독교회의 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1943년 이승만과 정치적으로 결별한 이후, 도진호는 한인기독교회에서 오아후섬 호놀루루에 소재하는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 또는 오아후섬의 다른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자료의 부족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온 1931년 이후 1940년까지의 도진호의 하와이에서의 구체적인 활동을 추적할 수 없었다. 중일전쟁이 1937년 시작됨에 따라, 미주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 연합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생겼다. 하와이의 6개 단체 대표들이 1940년 10월 13일 모여 미국의 국방활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연합한인분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도진호는 10월 20일 그 분과위원회의 조사부 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보수, 중도, 그리고 진보를 망라한 총 9개 한인 단체 대표들이 1941년 4월 16일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 준비회의를 열고 그 대회의 규정을 기초하였고, 도진호는 그 대회의 서기로 선임되었다.

도진호는 1941년 4월 20일에서 27일까지 8일 동안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이승만 추종 세력인 동지회 중앙부의 대표 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석하였고, 총 16명으로 구성된 의사부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43년 7월 15일 구성된 한미승전후원금모금분과위원회 (위원장 정덕흥)의 위원으로도 참여하였다. 그는 1943년 12월 12일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과 독선적 독립운동 방식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성명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동지회를 탈퇴하였다. 그 이후로 도진호는 하와이를 무대로 이승만의 반대 진영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진호는 1944년 4월 2일부터 8일 사이에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최된 한미연합분과위원회 전체대회에서 그 분과위원회의 워싱턴 사무소의 사무위원으로 김원용 (b. 1896), 전경무 (d. 1947), 그리고 김용중 (1898-1975) 과 더불어 선정되었다. 한족연합회의 워싱턴 사무소는 1944년 6월 10일 공식 개설되었다. 김원용은 위원장으로서 사무소의 운영과 한인사회의 연락관계 임무를 맡았고, 전경무는 선전부장으로서 대외교섭 업무를 맡았다. 김용중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워싱턴 사무소의 사무위원으로 복무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고, 도진호는 하와이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워싱턴으로 떠날 수 없었다. 필자는 자료의 부족으로 도진호가 무슨 혐의로 하와이 당국의 조사를 받았는 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미 정부의 청문회 보고서의 내용에 견주어서 미국정부는 도진호을 일본 스파이로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도진호는 1944년 5월 21일 개최된 한국독립당 호놀루루 지부 창립 발기회에서 창립 준비위원 5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도진호는 1944년 8월 20일 한국독립당 하와이 총지부의 모임에서 집행부의 서기로 선임되었고, 1945년 4월 15일 한국독립당 하와이 총지부의 사무소에서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피선되었다.

한국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한 이후, 도진호는 1945년 10월 24일 14명으로 이루어진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대표단의 서기로 선임되었다. 도진호는 1946년 2월 12일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하와이 대표단 8인의 한 명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고, 1946년 2월 21일 외교협회가 한미호텔에서 주최한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는 불교계 잡지인 『신생』 제3호 (1946년 8월 1일) 에 원고를 기고하여 미국과 국제 정치상황을 소개하였다. 도진호는 1948년 하와이 교포들의 생활상을 현지에서 촬영한 34분짜리 기록영화인 “무궁화 동산”을 총지휘하였다. 도진호는 1949년 하와이에서 본토로 간 이후 미국 본토를 두루 살펴보았고, 1950년 3월 29일 본토에서 하와이로 출발하였다.

필자는 1950년 이후 1977년까지 도진호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고, 도진호가 1977년 하와이에 살았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었다. 최영호가 1978년 도진호를 하와이에서 인터뷰를 하였기 때문에, 도진호는 1978년에는 하와이에 살았다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도진호는 자녀(들)이 살고 있는 로스엔젤레스로 말년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료와 증인의 발굴을 통해서, 우리는 도진호의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삶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심도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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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본 조선불교 유학생들은 『금강저』 창간호를 1924년 5월 1일 발간하였고 제26호 (1943년 1월 25일)까지 발간하였다. 우리는 『금강저』를 통해서 재일본 조선불교 유학생들의 활동과 현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북경 조선불교 유학생회는 1924년 3월 『황야』를 창간하였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잡지를 아직 발굴하지 못해 재북경 조선불교 유학생들의 활동과 현황을 검토할 수 없었다.
필자는 자료의 부족으로 메리 케이러스 여사가 범세계불교도대회를 언제, 어디서, 누구랑, 그리고 어떻게 개최하였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 없었다. 『불교시보』 제 54호 (1940년 1월 1일) 는 정토진종 동본원사 종립 오타니 대학 교수인 스즈키 다이셋쯔가 1939년 10월 21일부터 카마쿠라 원각사에서 구미 백인의 불교학인들을 대상으로 선학강의를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필자는 자료의 부족으로 미국인 화이트씨의 기초 정보를 확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불교시보』 제54호 (1940년 1월 1일) 에서 동일한 내용의 보도를 볼 수 있다. George J. Tanabe and Willa Jane Tanabe, “My?h?ji Nichiren Temple (Honolulu My?h?ji),” in Japanese Buddhist Temples in Hawaii: An Illustrated Guide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3), pp. 79-80. 법화경사의 고바야시 니치슈 주지는 1936년에 인도로부터 불사리를 봉대하여 가져왔기 때문에, 필자는 고바야시 니치슈 주지가 불사리를 인도에서 호놀루루로 가지고 온 연도를 1939년에서 1936년으로 월간 『불교』의 오기를 수정하였다. 필자는 도진호의 개종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스님 호칭을 제거하고 도진호로 호칭하였다. 박윤진은 도진호의 하와이 행 목적을 두가지로 이해했다. 도진호는 해외의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한국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그리고 하와이 한국동포들을 대상으로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고 박윤진은 주장하였다. 박윤진, 「도진호師 布蛙行을 듯고」, 『불교』 제87호 (1931년 9월 1일): pp. 53-54. 「업경대」, 『금강저』제 20호 (1932년 12월 8일): pp. 64-65. 도진호는 『신생』 제3호 (1946년 8월 1일) 에 기고한 본인의 글 (pp. 10-13) 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려정사의 이야기를 다음에 소개하겠다고 하였지만, 필자는 도진호가 고려정사의 이야기를 소개한 글을 보지 못했다. 필자는 고려선사와 고려정사의 관계성을 자료의 부족으로 검토할 수 없었다. Samu Sunim (Sam-woo Kim), “13 Turning the Wheel of Dharma in the West: Korean Son Buddhism in North America,” in Ho-youn Kwon, Kwang Chung Kim, and R. Stephen Warner, eds., Korean Americans and Their Religions: Pilgrims and Missionaries from a Different Shore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01), p. 228. 이승만과 그의 추종 세력들은 국민회를 탈퇴하여 1921년 7월 14일 동지회를 조직했다. 이승만은 본인이 직접 1913년 9월 20일 하와이에서 창간한 『태평양 잡지』를 변경하여 1930년 12월 동지회 기관지인 『태평양 주보』를 만들었다. 『태평양 주보』의 창간호는 1930년 12월 13일 발간되었다. 미국정부는 태평양 전쟁의 발발 이후 1942년 1월 12일 외국어 신문 발간을 전면 금지하여, 『태평양 주보』는 잠시 동안 정간되었다. 『태평양 주보』는 1942년 1월 21일부터 1944년 2월 2일 사이에는 『국민보』와 합동으로 『국민보?태평양주보』의 제호로 발행되었다. 『태평양 주보』는 1944년 2월 2일 『국민보』와 분리하여 다시 발행되었다. 『태평양 주보』는 1970년 2월 6일자를 마지막호로 폐간되었다. 필자는 도진호가 얼마 동안 『태평양 주보』의 편집인으로 『태평양 주보』를 편집했는 지에 관한 정보를 『태평양 주보』를 통해서 검토하지 못했다. US Joint Committee on the Investigation of the Pearl Harbor Attack, ed., Pearl Harbor Attack: Hearings, Nov. 15, 1945-Feb. 6, 1946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46), volume # 8, page # 536. 전게보고서 참조. 『신생』의 기자는 「16년만의 귀국후 첫 사자후: 도진호 선생의 講談」라는 이름으로 『신생 』제3호 (1946년 8월 1일) (pp. 10-13) 에 도진호의 기고문을 수록하였다. 도진호는 1941년까지 오아후 섬의 호놀루루에서 자영업을 하였고 1941년도에 사업을 정리하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도진호가 언제 몰로카이 섬에서 오아후 섬으로 돌아와서 언제부터 1941년까지 오아후 섬의 호놀루루에서 무슨 자영업을 하였는지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었다. 도진호의 동지회 탈퇴 선언문은 『국민보 ? 태평양 주보』 (1943년 12월 15일) 참조. 도진호는 『국민보?태평양 주보』 (1944년 2월 2일) 에 「재미 한족과 정치적 훈련」이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하여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과 독선적인 독립운동 방식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이승만을 추종하는 동지회를 탈퇴하였다. 『국민보』 (1944년 4월 19일) 의 「제3차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참조. 독립기념관 소장 문서 도 1002 ; 그리고 홍선표,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연구 (1941-1945)』,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02, pp. 116-121 참조. \n 『국민보』 (1944년 5월 24일)의 「호놀룰루 지부 창립 발기회」 참조. 『국민보』 (1944년 8월 30일)의 「한국독립당 임시대회」 참조. 『국민보』 (1945년 4월 18일)의 「한국독립당 제4회 전체 분과위원회」 참조. 『국민보』 (1946년 12월 18일)의 「재미한족연합분과위원회 조선파견대표단 김원용 보고(Ⅰ)」 참조. 『국민보』 (1946년 3월 27일)의 「한국 대표단에 보고」 참조. 김도안, p. 186. 김도안의 전게논문 (pp. 185-196) 과 김삼우의 「한국불교 미국개척사」 (한미동포재단 편, pp. 197-218) 는 미주 한국불교를 잘 조망하고 있다. 필자는 상기의 두 논문에 비해서 좀 더 비판적으로 본 논문에서 미주 한국불교를 조망하였다. 이재명이 “무궁화 동산”을 기획하였고, 안철영이 그 기록 영화의 각본을 썼고 감독을 하였다. 일본과 독일에서 영화를 공부하였던 안철영 (b. 1909) 은 6.25 전란 중 납북되었고, 서울영화사가 제작한 그 기록 영화는 한국 최초의 16 mm 천연색 기록 영화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미군정은 중앙영화배급사를 통해 그 영화의 상영을 금지시키도록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종화, 『한국영화사』 (서울: 한국영상자료원, 2008), p. 87 참조. 『신한민보』 (1950년 4월 13일 발행)의 「도진호 하와이 도」 참조. 『LA 중앙일보』 (2011년 3년 9일 발행) 의 「14. 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 2. 초기 이민자들의 애국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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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0일; 옮긴이-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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