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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11-29, (화) 5:4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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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비판적 고찰(4)
성원스님

한용운의 미국종교 소개
한용운은 세계종교를 주제로 원고를 써서 여러차례 걸쳐 월간 『불교』에 기고하였고, 그 일환으로 미국종교도 월간 『불교』에 소개하였다. 그가 기고한 세계종교와 미국종교 관련 글들은 본 논문의 주제인 미주 한국불교와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간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용운의 다른 글들을 간략히 소개한 이후,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용운이 프랑스 사회학자인 앙드레 지그프리트 (1875-1959) 의『미국의 성숙시대』 (America Comes of Age, A French Analysis) 를 요약하여 『불교』 제 105호 (1933년 3월 1일) 에 소개한 「현대 미국의 종교」 (pp. 2-6) 원문을 현대 한글로 다듬어 소개하겠다. 한용운은 얼마만큼 심도있게 그리고 정확히 지그프리트의 저서를 이해했는지는 학문적으로 검토할 사항이지만, 그는 그의 저서를 지극히 호평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용운이 1930년대 초반 그 저서를 통해서 어떻게 미국 기독교 (종교) 를 이해했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였다.

세계불교
스리랑카의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 (1864-1933) 가 창설하여 인도불교의 부흥운동을 왕성하게 전개하였던 인도의 마하보디협회는 1931년 부처님의 초전법륜지인 녹야원에 물라간다 쿠티 대성전을 건립하였고, 그 대성전의 개당식에 전세계의 불교도들을 초청하였다. 다르마빨라는 1913년 3월 한국을 방문하여 불사리 일과를 그 당시 한국불교 지도자로 유점사 주지인 김금담 스님에게 기증하였다. 그 협회는 조선불교의 유일한 월간 잡지사인 불교사에 1931년 5월 1일자 서신을 보내 조선불교 차원에서 그 대성전의 개당식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하였다. 인도불교와 한국불교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하면서, 한용운은 『불교』 제87호 (1931년 9월 1일) (pp. 36-37) 에 그 서신 전문을 소개하였다.
한용운은 『불교』 제88호 (1931년 10월 1일) (pp. 16-21) 에 「중국불교의 현황」을 기고하여 근대 중국불교의 현황을 소개하였다. 그는 우선 근대 중국불교 지도자인 태허 스님 (1890-1947) 의 개혁이론인 삼불주의 (三佛主義) 를 소개하였다. 태허 스님의 삼불주의는 불승주의 (佛僧主義), 불화주의 (佛化主義) 와 불국주의 (佛國主義) 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이후, 한용운은 오대산 보제불교회, 삼시학회, 화북 거사림, 여자불학원, 미륵원 불교학교, 광제 홍자불학원, 백림사 불학연구사, 등 근대중국의 각종 불교단체와 각종 불교활동을 소개하였다.
한용운은 또한 「중국혁명과 종교의 수난」을 『불교』 제 90호 (1931년 12월 1일) (pp. 12-21) 에 기고하여 중국불교의 당면과제인 묘산흥학 (廟山興學) 정책을 심도있게 검토하였다. 장지동 (1837-1909) 과 강유위 (1858-1927) 는 1894년 덕종 (재임 1875-1908) 에게 묘산흥학 정책의 실행을 상주하여 정부가 묘산을 이용하여 의무교육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원세계 (1859-1916) 는 1912년 「관리사묘조례」를 선포하여 전국의 불교재산을 사회공익사업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남경의 중앙대학 교수 태상추 (1897-1976) 는 1928년 한편의 논문을 작성하여 묘산흥학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고, 태허 스님은 불교의 입장에서 태상추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장개석 (1887-1975) 이 1931년 「보호사묘재산규정」을 공포한 이후로, 묘산흥학 정책은 대체적으로 종결되었다.
한용운은 태국불교를 주제로 쓴 한 편의 글을 『불교』 제89호 (1932년 11월 1일) (pp. 2-8) 에 기고하였다. 그는 그 글에서 태국불교의 역사, 승단 생활, 사원 및 승려, 교육, 관리, 국민교육, 등을 소개하였다. 그는 또한 『불교』 제 107호 (1933년 6월 1일) (pp. 2-3) 에서 1917년 혁명 이후의 러시아의 종교운동을 그리고 『불교』 신 제12호 (1938년 5월 1일) (pp. 2-7) 에서 나찌 독일의 종교를 소개하였다. 그는 『불교』 제 93호 (1932년 3월 1일) (pp. 2-7) 에서 그 당시의 세계 종교계의 동향을 회고하였고,『불교』 신 제11호 (1938년 3월 1일) (pp. 4-9) 에 공산주의의 반종교운동을 주제로 쓴 글을 기고하였다.

현대 미국의 종교
『영국의 위기』(England’s Crisis) 를 저술하여 명성을 얻은 프랑스 사회주의자 앙드레 지그프리트는 최근 『미국의 성숙시대』를 저술하여 미국문화를 비판하였고, 그는 그의 저서로 호평을 받았다. 그는 그 책 중에 현대 미국종교를 매우 흥미롭게 관찰하였고, 독자들은 그 책을 통해 미국주의 정체와 현대 미국종교의 본질 및 그 동향을 엿볼 수 있다. 지그프리드 박사는 사회학의 관점에서 그리고 매우 넓은 시야로 그 주제를 (훌륭히) 고찰하였다.
미국의 유일한 국교는 기독교 신교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주의의 원천을 알고자 하면, (우리는) 17세기 영국의 청교주의에 돌아갈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미국은 오직 신교와 (장로교의) 칼뱅주의를 중심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독일 이민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주의는 루터주의의 정반대가 되었다. (프랑스의) 장 칼뱅 (1509-1564) 은 어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의) 교의를 생각하였고, 개인의 의무는 개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사를 확대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협동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칼뱅주의는 사회생활을 정화하고 국가를 향상시킬 사명을 가졌다. 기독의 감화는 생활의 각 방면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까닭에, 칼뱅주의는 행동과 분리되는 그 어떤 다른 방면을 믿을 수 없었다. 칼뱅주의 교도들은 과거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삶을 벗어났다. 그들이 (독일의) 마르틴 루터 (1483-1546) 의 준중세주의에서 미국인의 실제적 이상주의로 전향하였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다. 영국인의 전형적인 사회적 의무감은 칼뱅주의에서 나왔다. 스스로의 개성이 끊임없이 압박을 받는다는 관념은 라틴인에 있어서는 실로 고통이었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고 단체인 사회적 단위가 종교의 근거가 된다는 칼뱅주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고립의 경로를 밟는 사람을 충심으로 증오하였다. 사회는 다수의 소유권 및 사회적 권력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이러한 상태에서 벌써 인간의 정당한 권리가 아니고 도덕적 제한의 세목으로 존재할 뿐이다. 청교도의 민주주의는 권리인 동시에 의무를 포함한다. 청교도의 민주주의는 개인적이고 부정적인 라틴의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두번째의 상이는 소위 사회 정화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정신적 귀족주의의 개념이다. 우리가 사회에 대한 의무심으로 판단하여 볼 때, 전형적인 영국의 전도적 정신이 미국의 신교도들에 삼투했고, 미국의 신교도들은 저들 자신의 사회를 철저히 기독교화할 필요를 느꼈다. 그들이 영국인들과 같이 담배, 술, 빈민굴, 여권주의, 평화주의, 반생체해부론, 이민의 미국화, 우생학 및 산아 제한의 복음을 적극 원조한 것은 그들의 전도 정신이었다. 만약 이것이 영국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미국은 개혁과 향상에 대한 열정을 독점하였다. 미국인들은 충심의 전도자들이였다. 토마스 우드로 윌슨 (1856-1924) 도 그러하였고,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1860-1925) 도 그러하였고, 존 D. 록펠러 (1839-1937) 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미국인들을 방임하여 두지 않고 미국인들이 부단히 그리고 열심히 전도를 할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신의 선민이라는 그들의 자기만족을 실로 저지할 수 없었다. 사회의무에 대한 이러한 경향의 결과, 그들은 인간평등에 관한 진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확실히 흑인, 지중해 연안의 인종 및 다른 인종을 경멸하였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 측면에서 인류의 평등을 믿었을지라도, 그들이 정의하는 인류는 실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 각도로 보면, 미국의 신교는 천주교보다도 훨씬 비민주적이었다.
루터는 그 제자들과 투기장에 가서 투기장의 사람들에게 국가 (독일) 를 위하여 그들의 육체적 근육을 바치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들의 혼을 전쟁에 바치라고 주장하지 아니하였으니, 그의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는 허령한 양심을 가졌고, 그들이 세속적 행복과 권력의 향락을 가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뱅은 최초부터 종교와 일상생활을 결합시켰다. 그는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행사에서 신의 광영을 입고 있었다고 믿었다. 항상 부호와 제휴할지라도, 천주교는 가난한 사람은 자기 정신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까닭에 일층 신에 친근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천주교는 부를 경신의 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청교도들은 그들의 부를 명예로 간주하여 순익을 축적하는 때는 부를 신성한 속죄의 표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의무적 활동과 자리적 활동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진보를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서 종교적 갈구심과 부의 추구를 구별할 수 없었다.
식민지 시대 이래 미국이 이룩한 육체적 인내와 물질적 성취는 현재의 미국에서 가장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미국인들은 신비주의와 같은 것을 백해무용이라고 생각하였고, 종교도 일부분 물질화되어 생산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그 힘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금전은 창조력의 표상일 뿐 아니라 도덕적 사죄의 일종이 되었고, 그 능률은 기독교의 도덕과 같이 되었다. 사람들은 신에 대한 완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공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에 매우 유행되는 봉공의 사상은 노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부를 신성시하는 청교도의 사상에서 유래하였다.
온갖 원시적 청교도의 특질은 3세기 청교도의 직계 후계자인 신교도들, 모든 사회 개혁자들, 그리고 기독교 정신요법 신앙자들 사이에 잔존하였다. 그러나 루터교, 영국 성공회, 그리고 특히 천주교는 전연 다른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1923년도의 미국 통계에 의하면, 미국 천주교인의 수는 1,826만명, 신교도의 수는 2,836만명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교에 동감을 가진 자를 가산하면, 미국 신교도의 숫자가 상당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현금 미국의 기독교 종파를 지리적으로 관찰하면, 감리교 신자들은 동부, 남부, 특히 오하이오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침례교 신자들은 남부 및 서남부에 많고, 장로교 신자들은 동부 및 중서부의 서부 국경에 많고, 루터교 신자들은 서북의 독일인 및 스칸디나비아인의 부락에 많다. 조합파 신자들은 뉴잉글랜드에, 영국 성공회 신자들은 동부에, 그리고 퀘이커교 신자들은 펜실베니아, 뉴잉글랜드 및 중서부에 많다. 신교 신자들은 남부와 서부에 많으나 중서부 및 서북의 평야에는 거의 없는 반면, 천주교 신자들은 동북부 및 중서부의 도시, 외국 이민자들이 다수 모여사는 멕시코 국경 지방에는 어디든지 다수를 점한다. 영국 성공회는 상류 계급에 속하고, 감리교는 부유한 실업가들에 속하고, 침례교는 제3류의 도시 천민들에 속한다. 장로교와 조합파는 50년 전의 뉴잉글랜드 지식 계급의 후예들이 믿는 종파이고, 루터교는 독일인들이 믿는 종파이다. 퀘이커교는 프로 계급이 믿는 종파이고, 천주교는 인종 및 계급이 하열한 외국인들이 믿는 종파로, 영국인들은 천주교를 경멸하였다.
미국의 신교는 근본파와 근대파 둘로 나누어졌고, 그 두파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정교파와 자유파에 다소 상응한다. 근본파가 자기 옹호의 경우에 있는 반면, 근대파는 세계대전 이래 매우 유력하여졌다. 그 사실은 미국종교 문제의 핵심이다. 근대파의 교의, 의식, 등의 해석은 극히 자유스러웠고, 순수한 종교 사상에 속하지 아니한 형식은 근대파에서 해방되었다. 그들의 일상 생활과 교회를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람들은 근대파의 입장을 매우 놀랄만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근대파도 엄밀히 말하면 청교도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도덕적 진솔과 사회적 행복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지시된 사명을 사회의 지도적 원동력에 충족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조건에 적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만약 종교가 도덕 혹은 정치를 점유하지 못하면, 그것은 양심에 대하여 시인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심의 최상권은 가장 순수한 종교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파는 막대한 위험을 포장하였고, 즉 허령성과 물욕의 혼합을 강조하였다. 미국인들은 존재 자체로 만족하지 않았고, 항상 그들 자신을 정확한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그들은 과학적 연구에도 탐구보다 실험장치를 존중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도 교회의 기도와 묵상보다 교회당 건축과 토목공사에 더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종교와 다른 여러 활동과의 피치못할 관계성에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기독교와 결합시켰다. 그들은 사무소나 공장에서 능률을 높이려면 기독교도가 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적극적인 근대파는 신참자들을 주로 동부 여러 주의 유력한 제조업자들 가운데에서 구하였고, 교회를 생명의 전차에 연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응전하는 남부와 서부의 근본파는 성서문자의 해석에 매우 충실하였다.
근본파는 신교에서 나왔고, 특히 소도시의 침례교와 고 (古) 미국인들이 오랫 동안 머문 촌락에서 나왔다. 근본파의 신도들은 남부 여러 주에 다수 있고 서부 여러 주의 신교의 식민지에도 많이 있다. 이 파는 종교적 견지로 보면 유럽의 과학적 회의파와 같이 외국에서 수입된 신사상의 증장에 반동하여 나타났다. 근본파의 신도들은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 (1599-1658) 의 정신적 후예였다. 그들은 크롬웰의 종교적 불요 (不撓) 의 정신을 충실히 신봉하여 정신적으로는 영국인 자신들보다도 훨씬 편협하였다.
우리가 근본파의 냉정한 신앙과 모너디즘의 막연한 신앙보다 미국 신교의 참된 정신을 탐구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본질적인 미국인들의 견해가 있었다.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은 원죄에 관해 비판주의적 교의를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일반적인 입장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성공을 희구하는 신비주의가 그들 본래의 종교였다. 그들은 그와 동일하게 공리주의적 외견과 낙관주의를 연결하여 운동과 진보를 부단히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지불식간 정력과 생활를 숭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히 무한의 진보를 믿어 청교도의 정신적 낙천주의와 함께 가지고 온 모국 (영국) 의 도덕을 봉대하였다.
미국인들이 보는 그리스도는 전통적 감정인 신비가 아니고 러시아에서와 같이 부저항의 사도도 아니었다. 그는 지도자였고, 인종의 초인이었다. 그는 혹 유용한 시민, 능력있는 생산자, 그리고 정직한 실업가의 완전한 전형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는 희생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정신적 정력의 그리스도였다. 그리하여 천국의 도는 철저한 속죄가 아니고 철저한 노동에 있었다. 신교의 추앙을 받는 전형적 성직자들이 이러한 행동의 집중을 선전하였다.
이와 같이 속화한 신교의 신자들은 다수의 후계자 및 상찬자들의 반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 자신의 정신까지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이 행하는 의식은 단순히 윤리를 위배치 아니할 정도로까지 속화되었다. 신교의 교회들은 항상 군중의 냉담을 불평하였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다수의 개종자들이 신교의 교회들에서 나왔다.
청교주의와 신교주의의 경계선상에는 일반적 경향에 대한 그들의 반항에 기인하여, 3종의 종파가 생겨났다. 첫째의 종파는 그들의 주의, 특히 영국 및 칼뱅주의 전통과 전혀 무관한 루터교이다. 루터교는 비상한 반항으로 다른 종교와 협동하였다. 둘째의 종파는 엄격한 신교도가 아님으로 인하여 신교에서 분리한 영국 성공회였다. 영국 성공회는 성례 및 사도의 계승을 믿기 위하여 계층적 성직 제도를 가졌고, 천주교의 흥미를 더하였다. 그들은 기도와 명상을 강조하였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건축상의 미관과 감명이 깊은 종교적 음악을 완전히 결합한 예술가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미국인들의 것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영향이 잔존한 까닭이다. 구시대의 제도가 많은 경로를 지나옴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의 의식은 기묘히 미국의 사회에서 특권을 향수하였다. 그들은 또 감독파의 화려함과 사회적 지위를 연결하여 회원들의 공리심을 이용하였다.
셋째의 종파는 천주교였다. 천주교는 신교에 반대한 기독교의 종파였다. 천주교는 일종의 피난소이니 외국인들이 믿는 종파인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다수의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종의 피난소였다. 다시 도덕상의 문제를 고찰하면,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가정과 교육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방종과 부도덕에 대한 그들의 투쟁은 그리 감동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라리 회의주의와 같은 회피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약점에 대하여 관대한 금도 (襟度) 를 가졌다. 도덕적 견해로 그리 고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신교도들보다 저열하였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심리적 견해로는 일층 문명화하였고, 그들 다수는 진화론을 노골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들은 또 금주를 반대하였다.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 현실주의자였다. 그들은 선량한 정치가들이었고, 방종과 회의주의를 연결한 인류의 약점에 대한 그들의 연민은 수평선 이하의 대중들에게 유효한 책략이었다.
천주교는 이러한 다수의 집합소인 고로 미국화의 정신에 극단으로 반대할 위험을 가졌다.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또 과거의 종교제도에 밀착하여 고대의 정치적 종교적 근간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미국의 정치적 단체의 중심에서 천주교를 분리하였고, 미국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적인 근대파와 같은 방면에서 그들의 교회를 경영해 가는 실업가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인들과 같이 종교생활의 강도는 교회건물의 입체적 내용에 의하여 측정되는 줄로 믿었다. 물질주의는 점점 그들의 정신 생활을 잠식하는 경향을 가졌다. 종교의 목적은 영혼과 정신에 신비주의를 고무하는 것이 아니요, 물질적 세력을 반사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지그프리드는 그의 저서인 『미국의 성숙시대』에서 미국 기독교의 특질 및 결함을 지극히 공평히 지적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저서는 실로 근래의 명저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의 해외포교 강조
이영재가 1922년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를 강조한 이래 10년이 지난 이후, 한용운은 『불교』 제 98호 (1932년 8월 1일) (pp. 2-4) 에 매우 짧은 한편의 글을 기고하여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를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는 그 당시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진단하였고, “한국불교의 포교기관은 전국적으로 약 100여개에 달하고, 교육기관도 불충분하지만 다소 진전을 이루었다.”라고 평가하면서, “지금 이 순간 한국불교의 해외진출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국내포교는 일정 정도 이루어졌다고 간주하였고, 해외포교는 그 당시 한국불교의 당면과제로 절감하였다.
그는 국제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고대 시대에도 “불교는 (한편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조선으로 일본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 인도에서) 버마로 태국으로 그 이외 타국으로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 교통시설이 불비하고 주거 (舟車) 가 불통하는 그 당시, 해외포교에 대한 우리 불교도들의 고심이 얼마나 참담하였는 지를 우리는 매우 쉽게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도 불교도들이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세계 곳곳에 불교를 전파하였듯이, 한국불교도들도 다른 지역에 사명감을 가지고 한국불교를 포교해야한다고 한용운은 주장하였다.
그는 “세계 각국의 종교는 물론 여타의 불교전통은 조선불교를 제외하고 모두 해외포교를 위하여 막대한 심력과 금전을 투자하고 있다. 우리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그러한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어찌 헛된 일이겠는가? 어느 종교이든지 그 교리와 사실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타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종교는 사실상 없다. 그러므로 포교는 종교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일반 사람들이 각 종교의 교리를 체득하여 그들 스스로 각 종교로부터 복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포교에 힘쓰고 있다. 불교는 모든 불자들이 각자의 마음을 깨달아 그들로 하여금 생사를 벗어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하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 (자리이타의) 교리는 불교 본분 중의 본분을 잘 드러내고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한국불교의 많은 사람들이 “조선불교의 해외포교는 재정과 인적자원의 부족에 기인하여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한다고 소개하였다. 그는 한국불교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해외포교를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하여, “조선불교의 해외포교에 대한 재정과 인적자원의 부족은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 순간 조선불교의 해외포교를 말하는 것은 풍부한 재정과 인적자원으로 세계 각국에서 신속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조선불교의 해외포교를 진행시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비교적 필요하고 또는 용이한 곳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조선불교의 해외포교를 진행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장소와 사람을 막론하고 균등히 그들을 대상으로 포교를 행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을 대상으로 균등히 포교를 해야 한다. 거기에 대하여 (해외포교의) 친소의 차이는 없다. 우리가 지리, 인물, 풍속, 그리고 여러가지 다른 사정으로 말미암아, 또는 종교 자체 내부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점진적 포교를 하게 될 경우에는 자연히 (해외포교의) 선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불교는 만주, 중국본토, 하와이, 미본토, 인도, 기타 지역의 순서로 해외포교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불교가 왜 만주지역의 포교에 가장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명확히 설명하였다:
만주는 우리 조선과 지리적으로도 가장 가까울 뿐 아니라 약 200만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여 그곳에 살고 있고,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장래에도 점점 증가할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현재 정치적 그리고 산업적 어느 방면으로든지 통제가 되지 못하고, 그들은 생활상 하등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들의 정신상태는 혼란스러워 실로 마음 둘 바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역 풍상에 모든 고초를 받으면서 아무 통제도 질서도 없는 그들의 생활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통제와 위안을 주려면, 종교의 힘이 아니면 아니될 것이요, 종교 중에도 조선에 있어서 가장 역사가 깊고 관습에 익혀진 심원광대한 불교가 아니면 그 성과가 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라도 속히 만주의 적당한 장소에 조선불교의 포교기관을 설치하는 것이 여러가지 의미로 보아서 긴요한 일이 우리에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지 굉대한 비용이 아니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외포교 담당자의 인물 문제도 거기에 대하여 상당한 여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독자들을 위해 현대 한글로 다듬어 위의 인용을 소개하였다.)

한용운은 “타종교는 중국본토, 하와이 및 미본토에 이미 포교기관을 설치하였고 다른 새로운 포교기관도 세울 계획도 가지고 있듯이, 조선불교도 그곳들에 포교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중국본토, 하와이 및 미본토의 지역포교와 더불어 인도포교도 상당히 강조하였다. 그는 “인도는 불교의 발상지로 모든 불교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 불교도들은 인도를 순례 또는 탐구할 필요가 있다. 다른 불교 국가들이 그들의 불교를 인도로 역수출하고 있듯이, 조선불교도 인도의 불교성지에 조선불교의 포교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불교는 (인도) 이외의 다른 해외지역에도, 여유가 있으면, 포교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조선불교의) 해외포교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조선불교의 현실에 견주어 볼 때, 일종의 공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힘닿는 데로 조금씩 노력을 기울린다면, 조선불교의 해외포교는 결코 불가능이 아닌 즉, 조선불교는 해외포교에 각고의 노력을 경주할지니라.”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불교는 한국불교의 열악한 재정과 인적자원의 사정을 감안하여 현실에 맞는 적절한 방안을 찾아 해외포교를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불교의 해외포교가 점진적이고 현실에 맞는 방안에 기반하여 지속적으로 진행됐을 때, 해외포교의 성공은 담보될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맺었다.
그가 해외포교를 강조한 논점은 현재에도 상당히 유효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가 해외포교를 강조한 글을 썼던 많은 한인들이 일제의 압정을 피해 만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는 한국불교는 만주 이주민 해외포교를 가장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많은 한인들이 일본 식민지 시대에 만주, 중국본토, 그리고 하와이 (미국) 과 더불어 일본과 극동 러시아 지역에도 많이 이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글에서 일본과 극동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이상하리 만큼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글에서 당위의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해외포교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글에서 한국 불자들을 대상으로 한국불교의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매우 잘 제시하였다.

해방 이후, 많은 한인들이 만주, 중국본토, 극동 러시아, 일본, 하와이가 아니라, 미본토, 유럽, 그리고 남미로 이주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불교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주한 만주, 중국본토, 러시아, 일본, 그리고 하와이 (미국) 지역의 해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해외포교를 소홀히 할 수 없고, 해방 이후 이주한 북미주, 유럽 및 남미주의 한인들을 대상으로도 해외포교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전개해야 한다. 비록 한용운이 그의 글에서 현지인 포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현지인 포교도 경시할 수 없다.
한용운의 주장은 그 당시 한국불교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다. 한용운이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불교』 제 98호에서 주장한 후 약 3년 반이 지나, 이윤근은 한용운의 주장을 대폭 참조하여 『불교시보』 제 6호 (1936년 1월 1일) 에서 해외포교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용운과 마찬가지로, 그는 만주, 중국, 인도, 그리고 기타 지역의 순서로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중국 지역의 포교를 한용운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한용운의 주장은 현 한국불교의 해외포교 방향성 설정에도 매우 유효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가 일제 시대 한국불교의 해외포교 부족을 우려하였듯이, 해방 이후의 한국불교도 다른 종교인 한국 기독교 그리고 다른 불교전통인 티베트, 중국, 일본, 그리고 여타의 불교전통과 비교해서 만족할만한 해외포교의 성과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현 한국불교가 타종교와 타 불교전통과 비교해 물적 그리고/또는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해외포교에 많은 애로사항을 가질 수 밖에 없을지라도, 우리는 현실적 그리고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여 한국불교의 해외포교 정책을 수립하여 집행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는 식민지 시대의 한국불교에 비해서 훨씬 호전된 상황 속에서 해외포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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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게잡지, pp. 14-15. 한용운,『증보 한용운전집』, 제 2권 (1973, 서울: 신구출판사, 1980), pp. 235-285. 한용운, 「현대 미국의 종교」, 『불교』 제 105호 (1933년 3월 1일): pp. 2-6. 필자는 앙드레 지그프리트 박사의 저서를 검토하지 않아 한용운이 얼마만큼 정확히 그리고 심도있게 지그프리트 박사의 저서를 요약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김진무, 「청말 묘산흥학과 근대불교의 부흥」,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8), pp. 297-314. 한용운, pp. 2-6. 필자는 현대 한국인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바꾸어 한용운이 쓴 원문을 본 논문에서 전제하였다. 현대 한글로 한용운의 원문을 바꿀 때, 필자는 『증보 한용운전집』 제 2권 (pp. 261-265) 도 일정 정도 참조하였다. Andre Siegfried, England’s Crisis (London: J. Cape, 1931); 그리고 早坂二郞 譯, 『英國の危機』(東京: 先進社, 1932). 한용운은 일역을 참조한 것 같다. Henry Harold Hemming and Doris Hemming, trans., Andre Siegfried, America Comes of Age, A French Analysis (London: J. Cape, 1927); 그리고 藤井新一 ? 藤井千代子 共譯, 『北米合衆國』 (東京: 文明協會, 1931) 참조. 한용운은 본 저서의 일역을 참조한 것 같다. 앙드레 지그프리트 박사가 저술한 『미국의 성숙시대』를 직접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용운이 지그프리트 박사의 『미국의 성숙시대』를 얼마 만큼 정확히 그리고 심도있게 이해했는 지 검토할 수 없었다. 한용운 또는/그리고 지그프리트 박사는 미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국교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한용운,『증보 한용운전집』 제 2권 (pp. 216-218) 참조. 전게서, p. 216. 전게서. 전게서, pp. 216-217. 전게서, p. 217. \n 전게서. \n 전게서, pp. 217-218. \n 전게서, p.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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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5일; 옮긴이-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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