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비판적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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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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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비판적 고찰(2)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19, (일) 1:03 pm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비판적 고찰(2)
성원 스님

미주 한국불교의 역사적 배경
한국과 미국은 1882년 4월 6일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통해서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시작하였다. 한인 이민자 121명을 태운 배가 1902년 12월 22일 인천에서 하와이로 출항하였고,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미국 상선 겔릭호로 갈아탔고, 1903년 1월 12일 한밤중에 호놀루루 항에 도착하였다. 호놀루루에서 총 121명 가운데 102명 (56명의 남자, 21명의 여자, 13명의 어린이, 12명의 유아) 이 이민을 허가받았다. 1903년 16차에 걸쳐 1,133명이, 1904년 33차에 걸쳐 3,400명이, 그리고 1905년 15차에 걸쳐 2,800명이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1903년 1월 이래 1905년 8월까지 약 7,300명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한국과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일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자국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싼 임금의 한국의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민가는 것을 전면 금지하였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인의 초기 미국 이민은 하와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북태평양에 있는 하와이는 하와이, 카우아이, 니이하우, 오아후, 몰로카이, 마우이, 라나이, 그리고 가호오라웨의 8개의 주요 섬들로 이루어져 있고, 적도 이북에 위치해 있다. 하와이 원주민은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족에 속한다. 영국 탐험가인 제임스 쿡 선장 (1728-1779) 이 1788년 하와이를 발견하면서, 하와이는 서구와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하였다. 카메하메하 대왕 (1758-1819) 이 1810년 하와이 왕국을 통일하였고, 하와이는 1840년 입헌군주국이 되었고, 1848년 진주만을 미 해군에 조차하였다. 미국은 1898년 하와이를 미국 영토로 합병하였고, 하와이는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하와이는 1848년 봉건 토지 소유 제도를 일신하여, 토지양도와 토지사유를 합법화하였다. 그래서 미 본토의 자본가들이 하와이의 국왕과 추장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를 합법적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 금광이 1848년 미 서해안에서 발견된 이후, 미 서부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하와이산 사탕의 수요가 미 서부에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사탕수수는 원래 하와이의 야생 식물이었으나, 미 백인 자본가들은 대량으로 사탕수수를 하와이에서 재배하고 수확하여 미 본토로 판매하였다. 미국과 하와이는 1876년 사탕의 수입 관세 문제를 완전히 타결하였고, 하와이 백인 농장주들은 사탕을 미 본토로 대량 수출할 수 있었다.

하와이는 1850년 고용계약을 합법화하였고, 그 조치에 의해서 왕립 하와이농업협회를 창립하였고, 사탕수수 농장에 필요한 노동자들을 외국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서, 233명의 중국 노동자들이 1852년 하와이로 이민을 올 수 있다. 40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1852년부터 1940년까지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하와이로 온 외국 노동 이민자들 가운데 75 % 가 아시아인들이었다. 남북 전쟁 (1860년 - 1864년) 의 결과로 노예제도가 미국에서 폐지되었고, 하와이 백인 농장주들은 농장 노예로 흑인들을 확보할 수 없었고, 필요 이상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하와이 원주민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하와이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과 하와이 원주민이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잘 훈련되고 매우 근면한 아시아 노동자들을 받아들여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로 고용하였다.

중국인 이민자들이 미 서부 지역에 늘어나고 그들이 그 지역에서 일정 정도 세력을 형성하자, 미국은 1882년 중국인 이민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1907년 신사협정을 일본과 체결하여, 일본인 노동자들의 미 본토 입국을 금지하였지만, 일본인 노동자 가족들의 미국 입국을 허락하였다. 미국은 1924년 아시아인 (일본인) 이민을 원천적으로 금지하였다. 한국이 1910년 8월 29일 일본과 합방된 이후, 피식민지 국민인 한국인들은 일본여권을 가지고 미국에 올 수 밖에 없었다. 하와이 한국인들은 1910년부터 1924년까지 그들의 가족들을 하와이로 초청할 수 있었다. 일본인 이민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된 1924년부터 아시아인 이민을 허락한 이민법이 통과된 1965년까지 한국인 미국 이민은 허락되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이탈하여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하기 위해 미 서부로 옮겨갔고, 미 대륙 횡단 철도 건설 현장과 미 서부의 쌀 농장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1907년 한미 신사협정 이후, 백인 이외 인종의 미 본토 입국은 금지되었다. 한국인들도 1907년 이후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옮길 수 없었고, 해리 S. 트루만 대통령 (1884-1872) (재임 1945-1953) 은 1948년 그 법안을 무효화하였다. 약 1,100명의 한인이 1905년에서 1907년까지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미 본토에서 초기 한인 이민 역사를 개척하였다. 전체 한인 이민자의 1/6인 약 1,300명이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귀환하였다. 예를 들면, 1903년에는 62명, 1905년에는 219명, 1906년에는 336명, 1907에는 349명, 1908년에는 105명, 그리고 1910년에는 55명이 귀국하였다.

감리교 소속인 인천 내리교회의 조지 허버 존스 목사 (1867-1919) 는 하와이 이민자의 모집에 협조하였고, 안정수 권사와 김이제 권사를 포함하여 그 교회 소속 교인 28명이 하와이 이민 겔릭호에 승선하였다. 그들은 배에서 예배를 보았고, 기독교 신자 수는 겔릭호가 호놀루루 항에 입항할 때 58명으로 늘었다. 한국의 감리교 선교사는 하와이 감리교 선교사와 연락을 취해, 한인 기독교 이민자들을 도왔다. 감리교인들은 1903년 호눌루루 시내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인교회인 현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는 그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1903년 로스엔젤스에,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 1914년 오클랜드에, 1919년 시카코에, 그리고 1921년 뉴욕에 한인 감리교회가 각각 세워졌다. 1906년 로스엔젤레스에 한인 장로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는 제퍼슨한인연합장로교회의 이름으로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1964년 사실상 시작되는 한인불교와 다르게, 한인 기독교는 미주 한인 이민사와 더불어 시작하였다.

초기 한인 이민자 가운데, 한인 장로교 신자들이 한인 감리교 신자들보다 더 많았지만, 하와이에는 장로교단이 없었고, 한인 장로교 신자들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소속이 되었다. 강화도 출신의 이민자 가운데 상당수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 를 믿었고, 그들은 1905년 호놀루루에서 성공회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하와이 지역 이민사가인 이덕희는 하와이에는 1904년 14개의 교회 (예배처소) 에 402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오아후섬에는 5개의 교회가 있었고, 신자수는 241명이었고, 카우아이섬에는 7개의 교회가 있었고, 신자수는 135명이었고, 마우이섬에는 2개의 교회가 있었고, 신자수는 26명이었다. 한편 이승만 (1875-1965) 은 본인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1918년 감리교단을 탈퇴하여 무소속 교파인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미 이민국 자료는 1906년에서 1910년사이에 남자 182명, 여자 40명 총 222명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밝히고 있다. 900여명의 한국 여성들이 1910년에서 1924년까지 하와이로 이민을 왔고, 그 가운데 300명 정도는 본인의 남편이 초청하여 하와이로 이민을 온 기혼 여성이었고, 그 가운데 600명 정도는 장래 남편이 보낸 사진을 보고 결혼을 승낙하여 하와이로 온 사진 신부들이었다. 100여명의 한인 여성은 장래 남편의 사진을 보고 미국 본토로 시집을 왔다. 그 기간 동안 약 600명의 한인 유학생 망명객이 미국에 도착하였다. 1930년 미국 센서스에 의하면, 하와이 한인인구는 6,461명이고, 미 본토 한인인구는 1,916명으로, 총 한인인구는 8,332명이다. 그 이후 1950년까지 한인인구의 증가는 거의 없었고, 총 한인인구는 1950년 약 1만명이 되었다. 1950년에서 1964년까지 모두 6,423명의 한인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미법무부 이민국 2000년 통계연보에 의하면, 1948년에서 1950년까지 107명의 한인이, 1951년에서 1960년까지 6,231명의 한인이, 1961년에서 1970년까지 34,526명의 한인이, 1971년에서 1980년까지 267,637명의 한인이, 1981년에서 1990년까지 337,746명의 한인이, 그리고 1991년에서 2000년까지 164,166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러므로 1948년에서 2000년까지 총 806,414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한인 이민자 수는 1971년에서 1980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1981년에서 199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고, 1991년에서 2000년 사이에 감소하였다. 한인이민은 한국 경제의 급격한 성장과 한국 정치의 민주화에 기인하여 1980년대 후반 이후 조금씩 감소하였다.

2000년을 기준으로 볼 때, 단일혈통 한인 1,076,872명은 미국 전체 인구의 0.38%를 차지하고, 아시아계 가운데, 2,435,585명의 중국계 미국인, 1,850,314명의 필리핀계 미국인, 1,678,765명의 인도계 미국인, 1,122,528명의 베트남계 미국인을 이어, 한국계 미국인은 다섯번째로 가장 많다. 한국계 미국인 숫자는 199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서 일본계 미국인 숫자에 비해서 적었지만, 200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서 일본계 미국인 숫자를 상당히 능가하였다. 200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일본계 미국인의 숫자는 796,000명으로 한국계 미국인보다 적게 나타난다.

한인이민은 1950년 이후 증가하였고, 미주 한인인구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미국 상무부 센서스국의 자료에 의하면, 1950년 한인인구는 약 10,000명, 1970년의 한인인구는 약 70,000명, 1980년의 한인인구는 약 355,000명, 1990년 한인인구는 약 799,000명, 그리고 2000년 한인인구는 약 1,077,000명 (단일 혈통) 이고, 약 1,228,000 명 (복합 혈통 포함) 이다. 한국불교는 미주 한인인구 증가와 더불어 미국 곳곳에 한국 사원들을 개원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들을 포교하고 있다.

2000년 기준 한인 108만 가운데 95%가 1965년 이후 미국으로 이민온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인 이민자 수는 조금씩 줄어든 반면, 미국 출생 한인 2세 비율은 현재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예를 들어, 미국 출생 한인 2세의 비율은 1980년에는 18%였고, 1990년에는 27%였고, 2000년에는 35%였다. 총 한인인구는 797,304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218,031명으로 그 비율은 27.35%을 차지하는 1990년을 기준으로, 필자는 미국출생 한국인의 비율을 연령대별로 아래의 문단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겠다.

4세 이하의 한인은 70,140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63,517명으로 그 비율은 90.56%이다. 5세에서 9세 사이의 한인은 70,337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55,965명으로 그 비율은 79.57%이다. 10세에서 14세 사이의 한인은 63,066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38,242명으로 그 비율은 60.64%이다. 15세에서19세 사이의 한인은 74,246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28,431명으로 그 비율은 38.29%이다. 20세에서 24세 까지의 한인은 63,995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11,679명으로 그 비율은 18.15%이다. 25세에서 34세까지의 한인은 153,830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9,227명으로 그 비율은 6%이다. 35세에서 44세 까지의 한인은 129,112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3,982명으로 그 비율은 3.08%이다. 45세에서 54세 까지의 한인은 95,912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2,221명으로 그 비율은 2.33%이다. 55세에서 64세 까지의 한인은 43,082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1,945명으로 그 비율은 4.51%이다. 65세에서 74세 까지의 한인은 24,066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2,128명으로 그 비율은 8.84%이다. 75세에서 84세 까지의 한인은 8,671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629명으로 그 비율은 7.25%이다. 85세 이상의 한인은 1,247명이고, 그 가운데 미국 출생자는 65명으로 그 비율은 5.21%이다.

미 상무국 인구 센서스국의 2000년도 센서스 조사에 의하면, 한국태생 한인 701,000 명 가운데 49% 인 341,000 명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미국출생 한인 379,000명은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전체 한인 1,080,000 명 가운데 66.7%인 720,000명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다수 미주 한인들은 “미국 속의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으로 본인들의 정체성을 삼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렇게 볼 때, 미주 한국불교는 미국 속의 한국인 불자 뿐만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불자들에게 포교 활동을 전개해야 하고, 포교의 주 대상을 미국 속의 한국인 불자들에서 한국계 미국인 불자들로 조금씩 옮길 필요가 있다.

이영재의 해외포교 중요성 역설 \n\n천은사의 이영재 스님 (1898-1927) 은 청주농고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스님은 일본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한 즉시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로 진학하여 인도철학, 범어, 팔리어를 배웠고, 재일 조선불교청년회 기관지인 『금강저』를 간행하여 창간호 (1924년 5월 1일) 부터 제6호 (1925년 7월 1일) 까지 편집 책임을 맡았다.

스님은 1925년 11월 9일 고베항에서 재일조선불교청년회 회원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불교성지의 순례 및 불교연구의 목적으로 인도를 향해 출발하였고, 12월 2일 스리랑카에 도착하였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불교유적을 순례하고 범어와 팔리어를 배웠다. 그는 또한 스리랑카에서 순례하면서 스리랑카 불교를 월간 『불교』를 통해 한국의 불교도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렇지만, 인도에 도착하여 본인이 원래 희망했던 목적을 이루기도 전, 그는 1927년 10월 11일 28세로 스리랑카에서 병고로 요절하였다.

그 당시 일본대학 종교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이영재 스님은 1922년 11월 24일에서 12월 20일까지 『조선일보』에 총 27차에 걸쳐 「조선불교혁신론」을 기고하였다. 그 시리즈의 일환으로, 스님은 『조선일보』에「조선불교혁신론 (21)」(1922년 12월 14일) 를 기고하였고, 스님이 그 시리즈에서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역설하였다:
우리는 다만 내지 (한국 지역) 의 포교에 노력하여 그 포교의 임무를 다 하였다고 주장해서는 않된다. 우리 한국불교가 전파되지 아니한 외지 (해외) 에 한국불교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새로운 포교 영역을 개척하고 그 지역의 현지인들에게 한국불교의 인연을 심어주고, 또 한국인들이 다수 모여사는 해외, 즉 간도와 러시아 지역 그리고 일본과 하와이 지역에는 (한국불교의) 총섭원 선교국 직할의 교회들을 설치하여 불타의 복음을 선전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의 한인 동포들을 위하여 (그 교회들을 통해) 제반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필자가 독자들이 읽기 편한 현대 한글로 이영재 스님의 문장을 바꾸었다.)

필자는 한인들이 최초로 하와이에 이민을 온 1903년부터 이영재가,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역설한1922년까지 이영재처럼 한국불교의 해외포교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역설한 사람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영재 이외에도, 한국불교의 지도자들인 백용성 (1864-1940), 박한영 (1870-1948), 한용운 (1879-1944), 권상로 (1879-1965), 박중빈 (1891-1943), 등도 각자의 입장에서 한국불교 개혁론을 체계적으로 주장하였다. 어느 누구도 1922년까지 이영재를 제외하고 한국불교의 해외포교 중요성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한용운은 10년 이후에 해외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매우 짧은 글을 발표하였다.

이영재 스님은, 우리가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1922년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를 강력히 역설하였고, 한국 불교인들은 국내포교와 더불어 해외 지역의 현지인과 동포들을 대상으로 불교를 포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불교는 한국불교의 차원에서 해외포교 전담기관을 설치하여 그 전담기관의 주관 아래 해외사원들을 설립할 것을 제시하였다. 리고, 그는 그 기관을 통해 해외의 한국사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현지인들과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불교를 포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님이 1922년 한국불교 차원의 해외포교 전담기관의 설립 필요성을 주장한 이후 수십년이 지난 이후, 조계종은 비로소 종단 차원에서 2011년 4월 1일 해외특별교구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고, 6월 13일 해외특별교구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공포하였고, 8월 9일 조계종 최초의 해외특별교구인 미국동부 해외특별교구 (약칭 미동부교구) 의 설립을 공식적으로 인가하였고, 10월 18일 미동부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뉴욕 불광선원 주지인 휘광스님을 임명하였다.

미동부교구의 관할구역은 미국 동부지역 16개주와 캐나다 동부지역 6개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동부지역 16개주는 뉴욕, 뉴저지,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메인,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버몬트, 펜실베니아, 메릴랜드, 웨스트 버지니아, 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델라웨어이고, 캐나다 동부지역 6개주는 온타리오 (토론토 포함), 퀘벡,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이다.

필자가 확인한 그리고 미동부교구 관할 구역에 있는 한국불교 유관 사찰들은 현재 아래와 같다. 뉴욕에는 관음사, 금강선원, 뉴욕 대관음사, 마하선원, 백림사, 불광선원, 선련사, 선정원, 연국사, 원각사, 전등사, 정명사, 조계사, 청아사, 한마음선원이 있고, 뉴저지에는 보리사, 원적사, 해인정사가 있고, 메사추세츠에는 문수사, 서운사, 심광사가 있고, 로드 아일랜드에는 홍법원이 있고, 커네티켓에는 대연 불보정사가 있고, 펜실베니아에는 관음사, 원각사, 화엄사가 있고, 버지니아에는 구곡사, 보림사, 아란야사, 한마음선원, 원등사가 있고, 메릴랜드에는 법주사, (진각종의) 법광심인당, 보현사, 한국사, 무량사가 있고, 조지아에는 전등사와 동화사가 있고, 플로리다에는 보현사가 있고, 캐나다의 토론토에는 대각사, 한마음선원 토론토 지원과 토론토 평화사가 있고, 온타리오에는 우리절이 있다.

필자가 또한 확인한 그리고 미동부교구 관할 구역에 있는 한국불교 단체들은 현재 아래와 같다. 뉴욕의 뉴욕지역 불교신도회, 금강경독송회, 정토회, 재미 한국불교장학회, 한미불교진흥재단, 미주현대불교, 뉴욕 라디오 불교방송, 뉴욕 붓다 라디오 방송, (봉사단체인) 자비원,등이 있다.

조계종은 교구 차원에서 미 동부에 거주하고 있는 본 종단 소속의 승려들과 그 지역에 산재해 있는 본 종단의 유관사원들과 단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영재가 주장하는 바와 다르게, 조계종은 현재 이 순간까지 종단 차원에서 해외의 어느 사원도 설립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동부교구는 조계종 소속의 승려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미 동부 곳곳에 창건한 사원들을 교구를 통해 조계종에 자발적으로 등록해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연방정부는 1882년 5월 6일 중국인 이민금지법안을 통과시켜 가주의 금광 노동자로 그리고 미국 대륙횡단 철도의 노동자로 미국 이민을 오기 시작한 중국인 이민을 원천적으로 그리고 특별히 금지시켰다. 이 법안의 영향으로, 미주 중국인 커뮤너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중국불교는 미주 중국인 커뮤너티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미국 연방정부는 1965년 개정 이민법을 통과시켜 차별없이 중국인 이민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미주 중국불교의 역사는 1965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국 연방정부는1924년 모든 아시아인들의 이민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여 통과시켜 아시아인들의 이민을 원천적으로 금지하였다. 중국불교와 마찬가지로, 한국불교를 비롯하여 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의 각 주요 전통은 1965년 이후 그 주요 전통을 신앙하는 이민자 커뮤너티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미국에 소개되었다. 그렇지만, 미주 일본불교의 전통만이 1889년 미국에 최초로 전파된 이후 미주 일본인 커뮤너티에서 현재까지 면면히 지속되었다.

조계종 미동부 해외특별교구는 미주현대불교와 공동으로 한인이민 110년이 경과한 이후 그리고 이영재가 고민한 해외포교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2013년 3월 30일 뉴욕 불광선원에서 비로소 세미나를 개최하여 미주 한국불교의 미래를 학문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조망하였다. 다시 말해서, 네 명의 학자들이 그 세미나에 참여하여 124년의 역사를 지닌 미주 일본불교를 주로 참고로 하여 미주 한국불교의 미래를 학문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조망해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라가르디아 커뮤너티 대학의 서영민 교수는 일본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사회를 비교하는 논문 한 편을, 그리고USC의 던컨 윌리엄스 교수는 미주 일본불교 조동종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논문 한 편을 발표하였다. 미해군 대학원 대학교의 송광섭 교수는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미본토교구의 포교과정을 주제로 논문 한 편을, 그리고 하와이 주립대학의 성원 스님은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하와이교구의 토착화 과정을 주제로 논문 한 편을 발표하였다.

성원 스님은 또한 논문 후기를 써서 미주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연구 동향을 소개하였고, 내년 (2014년) 미주 한국불교 전법 50주년을 맞이하여 미주 한국불교 자료집의 편찬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좁은 의미의 하와이 일본불교 그리고 넓은 의미의 미주 일본불교가 이미 하였듯이, 미주 한국불교도 50년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그 자료들에 근거하여 미주 한국불교의 미래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성원 스님은 미주 한국불교는 미주 한국불교 50년 자료집 간행 분과위원회와 미주 한국불교사 편집 분과위원회를 빠른 시일 안에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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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목의 「초기 미주 한인 이민사」 (한미동포재단 편, p. 40) 참조. \n 이덕희의 「하와이 한인 이민 100년」 (한미동포재단 편, pp. 13-32); 김영목의 「초기 미주 한인 이민사」 (전게서, pp. 33-50); 그리고 Y?ng-ho Ch’oe, “Chapter 1 The Early Korean Immigration: An Overview” (Y?ng-ho Ch’oe, ed., From the Land of Hibiscus: Korean in Hawaii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pp. 11-40) 참조. \n Manh-Yol Yi, “Korean Immigration to Hawaii and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Y?ng-ho Ch’oe, ed., pp. 41-52. 김찬희, p. 161. 김광식은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에 관한 매우 체계적인 논문을 발표하였다. 김광식, 「이영재의 생애와 조선불교혁신론」, 『한국근대불교사 연구』 (서울: 민족사, 1996), pp. 149-191 참조. 박윤진, 「금강저 속간에 제하야」, 『금강저』 제19호 (1931년 11월 1일): pp. 45-47. 이영재는 일본에서 스리랑카까지의 항해 일지를 월간 『불교』에 다섯차례에 걸쳐 기고하였다. 이영재, 「도석기」, 『불교』 제23호 (1925년 5월 1일): pp. 22-29; 「도석기」, 『불교』 제 24호 (1925년 6월 1일): pp. 26-33; 「도석기」, 『불교』 제 25호 (1925년 7월 1일): pp. 25-29; 「도석기」, 『불교』 제 26호 (1925년 8월 1일): pp. 27-30; 그리고 「도석기」, 『불교』 제 27호 (1925년 9월 1일): pp. 30-34. 이영재는 스리랑카 불교를 월간 『불교』에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였다. 이영재, 「석란의 불교」, 『불교』 제31호 (1927년 1월1일): pp. 31-43; 「남국기」, 『불교』 제32호 (1927년 2월 1일): pp. 26-30; 「남국기 (속)」, 『불교』 제 33호 (1927년 3월 1일): pp. 13-20; 「남국기 (속)」, 『불교』 제 34호 (1927년 4월 1일): p. 15-18; 「석란의 불교: 흥기시대 (속)」, 『불교』 제 38호 (1927년 8월 1일): pp. 10-18; 그리고「석란의 불교: 쇠퇴 시대 (3)」, 『불교』 제39호 (1927년 9월 1일); pp. 17-27. 이영재, 「불교군에게 이역병상에서」, 『불교』 제 34호 (1927년 4월 1일): pp. 26-29. 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 연구회 편, 『한국불교근현대사 자료집 I: 신문으로 본 한국불교 근현대사』 (상권) (서울: 선우도량 출판부, 1995), pp. 102-122. 그렇지만, 위의 자료집은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의 후반부인 (8)?(27)을 수록하고 있고, 전반부인 (1)-(7)을 수록하지 않고 있다. 전반부의 자료 발굴을 통해, 우리는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자료집에 수록되어 자료는 「조선불교혁신론 (8)」 (『조선일보』 1922년 12월 1일) ? (27) (『조선일보』 1922년 12월 20일)이고, 우리는 『조선일보』 1922년 11월 24 일 (1) ? 11월 31일 (7) 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전게서, pp. 115-117. 전게서, pp. 116. \n 한종만 편, 『한국근대 민중불교의 이념과 전개』 (서울: 한길사, 1980) 를 참조. 한용운, 「조선불교의 해외발전을 요망함」, 『불교』 제98호 (1932년 8월 1일): pp. 2-4. 『미주현대불교』 2012년 11월호 (pp. 116-118) 참조. 전게잡지 참조. 김형근 편, 『미주한국불교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세미나 자료집』 (뉴욕: 미주현대불교, 2013) 참조. 전게서, pp. 10-21. 전게서, pp. 22-57. 비록 던컨 윌리엄스 교수는 미주 일본불교 조동종의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를 주제로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지만, 자료집에는 스텔라 박이 동일한 주제로 쓴 논문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n 전게서, pp. 58-110. \n 전게서, pp. 111-158. \n 전게서, pp. 159-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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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4일; 옮긴이-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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