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존재론 - 12처 그리고 윤회와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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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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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불교의 존재론 - 12처 그리고 윤회와 재생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19, (일) 5:39 am

불교의 존재론 - 12처 그리고 윤회와 재생

제자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에 부처님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모든 것이란 열두 가지에 포섭되는 것이니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법法이다.”

흔히 일체라고도 표현되는 모든 것이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써 쓰이고 있다. 우주 전체가 따지고 보면 열두 가지에서 나왔으며, 그 원인을 규명하면 열두 가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두 가지를 십이처(十二處. Dvadasa-ayatani)라고도 하고 십이입十二入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처’ 또는 ‘입’이라고 번역되는 원어의 의미는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문’ 또는 ‘도달의 문’이라고 이해된다. 이렇게 하여 십이처설이 성립되는데,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우주의 모든 존재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각 여섯 쌍을 이루고 있는 십이처는 각기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眼耳鼻舌身意)이라는 인식기관을 육근六根이라 한다. 인간 밖의 외부세계엔 이들에 각각 상응하는 대상이 있다. 그래서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여섯 대상을 육경六境이라 한다.
말하자면 눈이 있으므로 세상에는 색깔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귀가 있으므로 세상에는 소리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코가 있으므로 세상에는 냄새나 향기가 있음을 알 수 있고, 혀가 있으므로 세상에는 맛을 지닌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몸이 있으므로 촉감으로써 사물의 존재를 파악할 수가 있으며, 마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법칙ㆍ진리ㆍ진실 등을 알 수가 있다.

또 색ㆍ소리 등의 세계는 인간의 눈ㆍ귀 등이 없으면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이처럼 외부세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의 인식을 통해서만 그 존재의 여부가 파악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이 현실세계의 중심을 이룬다는 입장을 강하게 표명한 것이다. 십이처설에서 인식의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감각기관, 즉 6근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의 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대상, 즉 6경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가 실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존재가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스스로 입증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잘 대변하고 있다. “탁월한 온갖 지혜를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그들이 믿는 최고의 신을 본 적이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런 신을 믿고 받든다면,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이렇듯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6근 중의 맨 끝을 포괄적으로 마음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실제는 의지意志라는 뜻이 강하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의지의 대상인 현상세계인 법法은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이를 자연법칙이라고 보아도 되고 진리 또는 진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인위적으로 그 질서를 깨뜨릴 수 없는 자연환경이다.

이렇게 의지와 법이 십이처설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지닌다는 사실은, 인간이 의지적 작용을 가하면 필연적인 반응을 보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존의 종교가 신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음에 반하여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두려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세계가 개조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각 개인이 보다 더 많이 그리고 넓고 깊게 보고 느끼고 이해하며 노력할 때, 그가 직면하고 활동할 세계의 폭은 그만큼 넓어진다는 사실이 자명한 진리로서 이해된다.

윤회와 재생 - 업을 짓는 자와 업을 받는 자, 어떻게 존재하나.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 납니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 난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고, 태어 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 이를 다른말로 하면 죽지 않으면 태어남도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근본불교에서는 해탈을 不死(불사)의 문을 열고 들어 간다는 표현을 합니다. 더 이상 죽지 않는 세계로 갔으니 태어날리가 만무한 것이고 이는 곧 육도 윤회를 끝낸 것이니 해탈을 한 것입니다.

윤회의 원리는 간단 합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 =行爲)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 입니다. 이를 근본 경전에서는 조건 지워지는 것이라고 표현 합니다.
조건지워짐이 없으면 존재의 이유도 없습니다. 조건 지워진 생명들의 윤회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시작이 없다’[無始]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있습니다. 아라한처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 정진하여 법을 깨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윤회의 조건을 만들지 않고) 그리고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조건들을 모두다 없애 버리면) 윤회의 바퀴는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업을 보통은 성질상으로 분류해서 선업(善業), 악업(惡業),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선업은 착한 행위로서 좋은 과보를 내게 되고, 악업은 악한 행위로서 나쁜 과보를 내게 됩니다. 무기업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행위로서 과보를 낼 수 없습니다. 업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因果)의 법칙”위에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업 이론은 인과성과 윤리성의 2중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업이론의 인과성은 자연 법칙에서와 같은 것이지만, 그 윤리성 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은 불교적인 윤리성의 가르침입니다.
업을 행할 때 업[행위] 그 자체는 순간적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업은 그것을 행한 존재 속에 반드시 어떤 흔적이나 힘을 남기게 됩니다. 마치 향(香)을 태울 때 향이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남게 되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업이 남긴 이 세력을 업력(業力)이라 하는데, 이것은 잠재적인 에너지로 되어서 존재 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업력은 존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 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업 에너지가 됩니다.
업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 생(生)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통해서 틀림 없이 그 결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행위는 존재의 현재의 운명뿐만 아니라 미래의 운명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모든 것은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날 업보을 지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짐승이 될 업보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한 존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모습, 성격, 환경, 수명의 길고 짧음, 육체적인 조건 등은 그 존재가 과거에 지은 업보의 결과 입니다. 역시 현재 짓고 있는 행위는 그 존재의 미래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재료가 됩니다. 이처럼 존재의 모든 것은 업보에 의해 결정 됩니다.

인간의 행위를 업(業)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모든 행위가 업은 아닙니다. 업보다운 업보가 되기 위해서는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행위는 업이 아닙니다.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2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 의도적인 행위여야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과보를 초래할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합니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합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무정란(無精卵)과 같은 것 입니다.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업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면 틀림없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인과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행위의 결과를 그것을 과보(果報:phala)라고 합니다. 업과 과보의 관계는 식물에 비유해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열립니다. 열매의 맛과 성질은 전적으로 그 씨앗을 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업을 지으면 그것은 성숙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과보를 초래 합니다. 그리고 과보의 성질은 전적으로 업의 성질에 좌우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밭에 고추 씨앗과 가지 씨앗을 심은 뒤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고추와 가지를 키우더라도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 납니다. 고추 씨앗의 결과는 고추로 나타나게 되고, 가지 씨앗의 결과는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고추와 가지의 모양과 맛은 그것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며 이미 그 씨앗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업과 과보의 원리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행위에 대한 업보가 일단 결정되고 나면 그 과보는 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업보를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맙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업보는 개인의 의지작용(意志作用)에 의해 짓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설사 그것이 선업의 과보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업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성질에 따라 틀림없이 그 과보가 있게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술적(算術的)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2개의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똑 같은 보시를 하더라도 그 보시를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그 과보는 다릅니다. 음식물을 짐승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결과가 더 크고, 범부에게 보다는 수행자에게 주는 것이 더욱 큰 과보를 초래하게 됩니다. 수행자에게 하는 보시보다는 도를 이룬 붓다나 아라한과 같은 존재에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과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짐승을 죽여도 죄가 되지만 사람이나 성인(聖人)을 죽이면 그 죄는 더욱 무겁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알아야 하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마는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이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이에대해 여기서 일일이 경전에 나타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옮겨 올 수는 없지만 즉 부처님께서는 이를 한다미로 “어떤 일이든 지혜롭게 잘 헤아려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어떤 행위가 큰 선한 과보를 낳고 어떤 행동들이 큰 나쁜 결과를 낳는가는 경전 곳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보면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강가에 넣으면 그 강물은 마실 수 있습니다. 한 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 강물속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닌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 납니다. 그것은 곡식이 종자에 따라 싹이 나오는 시기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또한 동일한 종자라 해도 온도나 습도등 종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싹이 일찍 나오기도 하고 늦게 나오기도 합니다.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도 이와 같아서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3 종류로 나눕니다. 이 생에서 지어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나타나 업을 순현업(順現業), 그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 차후생 또는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 설명 합니다. 그리고 과보가 나타 나는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하고 그 반대인 것, 즉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업을 지으면 틀림없이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는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선업을 지은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계, 즉 선도(善途)에 태어 나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주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 즉 악도(惡途)에 태어난다고 말 할 수는 있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설사 인간계에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여러가지 나쁜 조건 속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無我(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어떤 고정되고 변화되지 않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존재란 비실체적(非實體的)인 몇 개의 요소들[五蘊. 오온]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모여 있는 하나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 입니다. 여기에는 고정 불변하는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존재가 사라질 때 ‘누가’ 또는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이 생(生)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전생(輪廻轉生)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당연히 드는 것입니다.
사실 윤회의 주체(主體)를 즉 나 라는 自我(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이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며 많은 불자분들이 오해나 혼돈을 하는 가르침중의 하나입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 경전이나 주석서(해설서)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경전과 주석서에 의하면 윤회를 위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가야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윤회란 고정 불변하는 어떤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아 가는것’[移轉]이 아니라, 업보라는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면서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경전에서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존재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이 존재(此陰: 죽는 존재)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異陰: 태어 나는 존재)가 서로 업보를 이어 받으며 계속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유의 비유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우유가 변하여 버터가 됩니다. 우유가 버터로 될 때 우유에서 버터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버터는 더 이상 우유가 아니고 우유 역시 더 이상 버터가 아닙니다. 우유와 버터 사이에는 동일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유 없이는 버터가 있을 수 없고, 버터 없이는 우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이나 기름과 같은 다른 물질로서는 아무리 우유에서와 같은 조건을 갖추어 준다해도 버터를 얻을 수 없습니다.

나비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비의 알은 애벌레로, 그리고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하고 번데기에서 결국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는 전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고정불변하는 것이 전달 되지는 않습니다. 알이 변해서 애벌레로 되고, 그리고 애벌레가 변해서 번데기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로 되는 것일 뿐 입니다.
알과 나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기 까지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어떤 것’은 없지만 알과 나비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비 알속에는 이미 나비가 될 수있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비는 나비 알에서만 나오지, 모기 알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윤회이론에서도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윤회할 때 고정불변하는 영혼이나 자아같은 실체가 옮겨가는 것은 아니며, 존재 전체가 변화해서 다른 존재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업이며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은 잠재적인 에너지, 즉 업력(業力) 상태로 그 존재 속에 축적되어 있다가 존재가 죽으면 그 업력이 작용해서 다음 존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은 현재의 존재를 만들었고, 현재 짓는 업보는 미래의 존재를 만드는 것 입니다. 업의 성질에 따라 우리는 천상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축생(畜生)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트만(atman.자아)과 같은 변하지 않을 영원성을 갖춘 윤회의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나비의 알이 나비로 되는데 고정불변한 어떤 요소가 없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가지 업 이론 중에서 불자분들이 의문을 가지는 것이 현재의 존재에서 다음 존재로 넘어가는 영혼이나 자아 같은, 같은 것이 없다면 현재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果報]는 누가 받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윤회와 업사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결과를 받는다.”라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인데, 업을 짓는 존재와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동일 하지 않다면 이 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유와 나비 알의 비유에서처럼 전자와 후자가 동일 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유와 버터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유의 질이 좋지 않을 때는 그 결과인 버터의 품질이 좋지 않을 것 입니다. 나비의 알이 병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 알이 변해서 되는 나비 역시 건강한 나비가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우유와 버터, 또는 나비의 알과 나비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우유나 나비 알이 가진 결함에 대한 결과를 버터나 나비가 받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윤회이론에서의 과보 문제도 이와 마찬 가지 입니다.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다르지만 과거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는 현재의 존재가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간단하게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 날 수 없다.”

2013.10.31 실론섬 법사 / 원불사카페(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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