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

BUTTON_POST_REPLY
lomerica
전체글COLON 427
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20, (월) 8:33 am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

동암 선사의 글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진 글
1968년 3월 24일 -대한불교- 2면에 실린 '금주의 설법'을 통해 선사의 수행관을 짐작할 뿐이다.

동암 선사의 생애와 사상 - 이성수 기자 연구 논문에서
"대한불교" 연재물인 ‘금주의 설법’은 필자(동암스님)의 사진을 함께 게재돼 있어, 동암 선사의 글임이 증명된다.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이란 이 글에서 동암 선사는 “불교는 학문에만 그치는 문자승이 되거나 단순한 신앙으로만 그치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불교는 오직 수행의 종교이다. 자작자수(自作自修)에 대한 자기 인과의 길과 선리(禪理)를 닦아 자기를 창조하는 종교다.”라고 강조했다. 참선 수행을 통해 자기를 창조하는 종교,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동암 선사는 30년 전, 즉 1930년대 후반에 오대산에서 방한암 스님을 만나 법담(法談)을 나눈 일화를 소개한다.
이 두 가지 사례를 종합하면 동암 선사가 당대의 선지식과 교류하며 참선 수행을 중시했음을 시사한다.
동암 선사의 필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선사의 수행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금주의 설법’ 전문은 다음과 같다.

;今週의 說法
靑天白雲萬里通 - 東庵

불교는 학문에만 그치는 문자승이 되거나 단순한 신앙으로만 그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오직 수행의 종교다. 자작자수(自作自受)에 대한 자기 인과의 길과 선리(禪理)를 닦아 자기를 창조하는 종교다. 이와 같이 자신의 진리를 믿고 수행하여 스스로 성불(成佛)의 목적을 이루는 종교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인간 자신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 중생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자기진리를 믿고 바로 닦아 가는 것, 이것이 불교다.

경(經冊)에만 집착한 스님이 그의 상좌에게 한 방망이를 얻어맞은 도담이 있다. 고령신찬(古靈神贊)선사와 백장(百丈)선사 사이에 있는 수증법어(修證法語)를 보면 상좌가 자기 스님 머리를 삭발하다가 자기 스님 등을 톡톡 치면서 “법당은 좋은 법당이나 불무영험(佛無靈驗)이로군”하였다. 살찐 스님의 등이 기름이 흐르고 좋지만 영험이 없다고 하니 노장스님이 노해 뒤를 홱 돌아보면서 “이놈 무엇이 어째”하고 상좌를 꾸짖으니 상좌가 대꾸하기를 “이것 보아 부처가 방광(放光)하네.”하고 스님에게 대꾸를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언제든지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차 하루는 벌(蜂)이 방에 날아 들어와 밖으로 나가려고 앵앵대고 방안을 날아다니면서 창문을 자꾸 치는 것이었다. 이때 상좌가 방안에 든 벌을 보고 “世界如是廣闊(세계여시광활)한대 何以出頭不知耶(하이출두부지야), 空門不肯出(공문불긍출)하야 投窓也大癡(투창야대치) 百年?古紙(백년찬고지)한들, 何日(하일)에 出頭時(출두시)할가부냐.”고 하였다.

즉 “세계가 이와 같이 넓은 창 어찌 나갈 줄을 모르고 창문만 두들기는지 크게 어리석다는 뜻이다. 백년을 두고 옛 문만 본들 언제 나갈 때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때 스님이 생각하기를 자기 상좌가 비범한 줄 알고 상좌더러 “야 알거든 좀 가르쳐다오.” 하였다. 상좌가 답하기를 “영광(靈光)이 독약(獨曜)하여 형탈근진(逈脫根塵)하고 체로(體露)가 진상(眞相)하니 불구문자(不拘文字)로다.”

즉 “자기자성(自己自性) 자리는 진성(眞性)으로 물들지 않고 본래원성(本來圓成)에 있어 업에 얽힌 망념(妄念)만 여이면 곧 부처와 같으니라.” 이 몸이 올 때는 어떤 물건이며, 갈 때는 또한 어떠한 물건인가, 자기 진성이 주(住)해 있는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이로다.” 정(淨)이 극(極)하면 광(光)을 통달하여 적조한 허공을 한입에 마셔 버렸느니라. 문득 세간을 보니 몽중(夢中)의 일과 같고나.”하고 상좌가 말하였다.
이 말은 곧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의심을 가지고 참선 공부를 하여 자기본래의 진성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말이다.

나는(東庵) 과거 30년 전 강원도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큰스님을 친견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스님이 하는 말이 “참선을 해서 견성을 해야지, 그밖에 다른 일은 필경 쓸데없다고 하면서 자취를 감추는 천년 학(鶴)이 될지언정, 저 길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우는 꾀꼬리는 되지 말라.”고 하였다. “앵무새는 능히 말은 하지만 나는 새는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곧 법(法)을 일러주는 말이었다. 참선은 세간을 버리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혹자는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들어가 솔잎이나 씹어 먹고 독선기심(獨善己心)으로 세상을 피해서 참선하는 것을 강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산불교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그대로 선을 찾아야 세간에 이익을 주는 선이 되고 오늘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 불교다.

불교는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에 타율적인 구원을 받는 종교가 아니다. 인간 자신이 곧 최고절성(最高絶性)을 가진 우주의 진리로서 현실과 내세의 자기 앞길을 스스로 닦아 자기를 창조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종교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은 세간을 여이고 별천지(別天地)에서 어떤 위대한 힘을 가지고 제도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 위대한 힘을 가졌다 해서 각자의 업(業)을 현실적으로 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대한 불심(佛心)이 대중의 생활 속에서 서로 접촉하는 가운데 고해중생에게 약(藥)이 되어 스스로 제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이 글에서 동암 선사는 “이와 같이 자신의 진리를 믿고 수행하여 스스로 성불(成佛)의 목적을 이루는 종교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한암(漢岩, 1876∼1951) 스님을 오대산에서 친견하고, 법담(法談)을 나눈 일화를 소개하며 참선 수행에 대한 견지(見地)를 밝힌다.
그리고 동암 선사는 “과거 30년 전 강원도 오대산에서 방한암 큰스님을 친견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스님이 하는 말이 ‘참선을 해서 견성을 해야지 그밖에 다른 일은 필경 쓸데없다고 하면서 자취를 감추는 천년 학(鶴)이 될지언정 저 길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우는 꾀꼬리는 되지 말라’고 하였다. ‘앵무새는 능히 말은 하지만 나는 새는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동암 선사는 당신의 견해도 밝혔다. “이 말은 곧 법(法)을 일러주는 말이었다. 참선은 세간을 버리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혹자는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들어가 솔잎이나 씹어 먹고 독선기심(獨善己心)으로 세상을 피해서 참선하는 것을 강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산불교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그대로 선을 찾아야 세간에 이익을 주는 선이 되고, 오늘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 불교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동암 선사는 참선수행의 궁극적인 뜻이 ‘세상에 이익을 주는데 있다.’면서 불교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종교인의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동암 선사의 입장은 불교가 개인적인 원력만을 성취하고, 복을 비는 기복(祈福) 위주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구체적인 메시지를 주고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현실 참여의식의 선수행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동암 선사의 의지는 결국 독립운동 참여, 사회복지 실천, 불교정화 운동 참여로 구체화 된 것이었다.(이하-생략)

BUTTON_POST_REPLY

다시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