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와 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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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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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참나와 이데아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24, (금) 5:29 am

헤라클레이토스(BC 535~BC 475)는 ‘만물은 변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이 변하는 사물의 배후에 변하지 않는 이데아가 있으며, 만물은 각각의 이데아의 복제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데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며 상주불변 불생불멸이다.

부처님은 만물이 변한다고 설했다. 이걸 무상(無常)이라 했다. 그리고 이 무상한 세계 뒤에는 그 어떤 상주불변하는 실체도 없다고 하셨다. 즉 제법은 무아(無我 anatman)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불교는 ‘상주불변하는 실체인 참나(眞我 true atman)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의 관계는, 부처님과 (진제 스님으로 대표되는 참나론적) 유아론자들과 유사하다.

(모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변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변하는 세상에 대응되는, 변하지 않는 세상, 즉 완벽한 이데아의 세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먼 옛날 황금시대에 이상적인 상태의 사회가 있었다’고 믿었다. 지금 사회는 그 사회로부터 퇴락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상사회도 타락할 수 있음을 의미하므로, 설사 미래에 우리가 그런 사회를 만든다 할지라도 그 사회도 결국 퇴락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플라톤의 이상사회인 공화국처럼, 불교의 이상사회인 용화세계도 왕정이다. 민중의 의식의 발달에 따라 왕정이, 속세에서는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세계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도대체 어인 일일까?) 불교도 그런 세계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 당시에는 수명이 84,000세이다. 세상이 타락함에 따라 10세로 감소하고, 다시 선해짐에 따라 84,000세로 증가하며, 이 과정이 오르락내리락 무한히 반복된다. 이 점에서 불교는 역사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순환적 역사주의’이다.

이데아는, 꿈·환상과 달리,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다. 사물보다 더 실재적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견고해 보이지만 결국 변해 없어지지만(바위도 시간이 가면, 천녀의 치마에 쓸려 닳아 없어지듯이, 비바람과 물과 화학적인 풍화작용에 의해 먼지가 되어 날려 사라진다), 이데아는 영원하다. 영원하므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한다. 하지만 시공과 접촉한다. (불교의 참나와 유사하다. 참나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지만, 시공을 만들고, 삼라만상을 만들고, 자기가 만든 사물을 보고 듣고 그들에 대해 생각을 한다. 즉 시공과 접촉을 한다. 기이한 존재이다.) 참나는 우리 감각기관으로는 느끼고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다. 즉, 감각과 언어를 초월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존재이다.

마음(참나)은 만물이 움직이는 추상공간이지만, 동시에 만물을 만들어 낸다(虛空覺所現發 허공각소현발).
(만물이 개념으로서 생성되고 활동하는 가상세계로서의 비물질적 공간은 뇌가 만들지만, 실제 세계의 물질적 공간은 뇌가 만드는 게 아니다. 인터넷상의 가상공간을 생각해보라.) 플라톤의 이데아는 여럿이지만, 참나는 오직 하나이다: 사람마다 각각 참나가 있지만, 각각의 참나의 기능이 모두 서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참나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데아는 오직 순수한 사념으로만 파악이 가능하다. (이데아는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참나도 순수한 의식으로만 파악이 가능하다. 이 순수한 의식을 힌두교는 '투리야(turya)' 또는 '브라흐만의 의식'이라고 부른다. 이 의식은 모든 분별을 초월한 의식이다. 선불교의 막망상(莫妄想), 즉 '분별을 넘어가라'는 말과 유사하다: 무분별삼매(無分別三昧)에 해당한다. (문제는 플라톤의 이런 철학이 현대철학과 현대과학에 의해 철저히 부인된다는 점이다.) 선불교의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이다.

인간의 이데아는, 즉 완벽한 또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하나뿐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부처라 부른다. 즉, 각 개인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성(佛性)은 동일하다. 이데아적 인간상과 부처,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이데아는 상주불변의 실체이지만, 불성은 상주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불성을 상주불변의 실체라 주장하면, 불성은 참나가 된다. 조계종 종정인 진제 스님은 ‘참나는 불생불멸’이라고 주장한다. 참나는, 이데아와 다르게, 의식을 지닌 생명체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쁨을 느끼는 존재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존재이다: 참나는 (바른 생각만 하고 번뇌가 없어) 청정하며 항상 기쁨을 느끼며 영원히 존재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물질세계에만 해당한다. 아름다움이나 기능은 물질에 부속된 성질일 뿐이다. 완벽한 기능은 완벽한 물질에 따라 나온다. 예를 들어 칼의 완벽한 절단 기능은, 완벽한 형태와 완벽한 재료를 쓰면 따라 나오는 성질이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적 기능이 물질적인 뇌에 의존한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플라톤 체계라면 뇌의 이데아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의 3원제(tripartite) 영혼(logical soul, spirited soul, appetitive soul)도 거기 해당하는 이데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세 개의 영혼은 이성, 감정(분노 등), 본능(성욕·굶주림·갈증 등)에 해당한다. 프로이트의 수퍼이고, 이고, 리비도에 대응된다.

플라톤의 주장처럼 모든 물체의 이데아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이상적인 인간인 ‘인간 이데아’도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적 기능은 물질인 뇌에 의존하거나 뇌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뇌에 이상이 생기면 냉혹한 살인마가 된다. 인간의 선악조차도 뇌에 의존한다는 말이다.

이데아 인간은 인간이므로 당연히 의식이 있다. 어딘지 모르지만 어딘가 존재하고 있다. 그는 거기서 과연 혼자 무얼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참나도 이데아 인간처럼 불생불멸이므로, 참나에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무한한 시간 동안 너희 참나들은 무얼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니?)

플라톤은 티마에우스에서 ‘두 개의 유사한 사물은 하나의 이데아의 복사물’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고양이와 호랑이가 비슷한 것은 둘의 원형인 하나의 이데아가 존재하고, 둘은 이 동일한 이데아의 복사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는 침팬지와 보노보가 비슷한 것도 같은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현상은 현대 진화생물학으로 쉽게 설명이 된다: 둘은 200만 년 전에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둘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이 (200만 년 전) 공통조상의 일종의 복사물들로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통조상이 이데아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공통조상도 그 이전의 조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35억년 생물체 진화의 역사에 있어서 완벽한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따라서 시공에 따라 변하지 않는 즉 불변하는) 유전자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변하는 환경에 따라 끝없이 변한다. 이처럼 유전자의 발견으로 인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는 엉터리 사상으로 판명이 났다. (정확히 같은 논리에 의해 참나도 엉터리가 된다. 참나도 이데아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BC 510경~BC 450경)는, ‘이 변하는 세상 너머에 불변의 분화되지 않은 실체가 있다’고, 믿었다. 그에 의하면, 이 실체는 이 세상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다.

플라톤은 끝없이 흘러가는 경험세계를 혐오했다. 그는 덧없는 이세상의 분해·폭력적 변화·불행의 비밀을 밝히길 원했다. 구원(해탈)의 길을 발견하고자 했다. 플라톤이 이 무상의 세계를 고통의 세계로 파악한 것은 부처님과 동일하나, '무상의 세계 뒤에 상주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부처님과 달리 그런 실체(이데아)를 상정했다는 점이 다르다. 플라톤과 동일한 사상이 참나불교이다. 플라톤과 참나불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전자는 (이데아들이라는) 수많은 실체를 상정하지만, 후자는 (참나라는) 단 하나의 실체를 상정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참나는 우주에 있는 생명체 개수만큼 많지만 그 특성과 기능은 조금도 차이가 없이 모두 같다’는 점에서 하나이다. 만약 참나에는 개별성이 없고, 즉 복수의 개별적인 참나들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사실은 모든 참나들은 하나’라고 주장하면 힌두교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이다.

플라톤은 이 상변(常變 ever changing)의 세상 뒤에 숨어있는 에센스(essence)로서의 이데아를 발견하고자 했지만, 진화론에 의하면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체이건 사회이건 모두 진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깨달음도 그런 존재이다. 깨달음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음 역시 시공을 따라 끝없이 진화한다. 오늘의 깨달음이 어제의 깨달음과 같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늘의 깨달음이 어제의 깨달음의 복제품일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무명(無明)에서 명(明)으로 나아가는 필연적인 방향성은 없다. 즉, 생명체가 종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길을 통해서 동일한 종류의 깨달음을 얻도록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상(常), 즉 '변하지 않는 것'을 선(善)으로 규정하고, 무상(無常), 즉 '변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했다. 불교도 무상을 고(苦)라고 선언하지만, 선(善)으로 선언할 상(常)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생긴 참나불교는 상(常)을, 최고의 선(善) 중 하나로 삼아, 열반의 4가지 특징인 열반4덕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모셨다: 참나는 변하지 않고(常), 고통이 없이 즐겁고(樂), 궁극의 실체이고(我), 더러운 번뇌가 없이 깨끗하다(淨). 번뇌가 없어지는 경지야 가능하겠지만, ‘그런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론에 위배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상정하는 것은, 유신론(有神論)이건 무신론(無神論)이건 모두 필연적으로 유아론(有我論 atmanism)으로 흐르게 된다.

우리가 바닷가 모래밭에 만드는 모래성은 밀물에 쓸려 바람에 날려 사라지지만, 그 어디에도 '모래성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참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의식있는 생명의 배후에 참나를 상정하면, 생명인 참나의 배후에도 (같은 논리로) 또 다른 참나가 있어야 하므로 궁극의 참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약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참나는 배후에 또 다른 참나가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생명과 자연과 우주 역시 (배후 존재가 없이) 스스로 존재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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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39.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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