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와 간화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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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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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초기불교와 간화선의 만남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19, (일) 5:42 am

초기불교와 간화선의 만남

세계적 명상수행가 아잔브람 스님과 조계종립 봉암사 태고선원장 적명스님이 지난 2013년 1월16일 오후1시 봉암사 선열당(禪悅堂)에서 ‘초기불교와 간화선의 만남’이란 주제로 불교수행 의견을 교환했다.

북방과 남방의 불교수행을 살핀다.

적명 스님의 기조 법문 요지
선불교 수행은 정의 하기가 아주 미묘한 점이 있다. 조사선에서 ‘도불용수(道不用修)’라고 진리에는 닦음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수행자가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치면 그 깨달음은 본래 청정해서 완벽하기 때문에 더 닦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바로 깨쳤다는 말을 믿기 어려운 분들이 있겠지만 전등록이나 기타 기록서에 보면 언하(言下)에 바로 깨쳤다는 이야기가 수 없이 나온다.

초기불전에서도 바로 깨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교진여는 5일 만에, 목건련 존자도 5일, 사리불 존자는 보름 만에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언하에 바로 깨닫는다는 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수좌들은 특별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식을 찾아 다니는 것이었다. 선지식과의 문답, 즉 법거량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조사선이 일반화 되고 정형화 되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법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부처에 대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 마른 똥막대기다. 가장 고귀한 존재인 부처님에 대해 물었는데, 그 대답이 왜 마른 똥막대기가 되는가? 듣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사 스님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분들이다.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하는 서원을 가진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소홀히 대답하거나 진실치 못하게 대답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가장 추하고 더러운 것의 대명사인 똥막대기라고 대답을 했을까! 이 화두는 보통사람이 듣고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격외언구(格外言句)’라고도 말한다.

화두는 그냥 보통 말이 아니다. 누구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의심하는 말이고, 또 이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만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깨달음의 관문과도 같은 말이다. 이렇게 의심이 일어나면 그 의심을 계속 반복 지속해 나가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생각을 따라서 짓지 않을 수 없지만 아직 공부에 들어서기 전 단계이다. 생각이 끊어지고 순수한 의심상태에 들어서야만 이것이 공부의 시작단계이다.
이 단계는 대체로 4단계로 고요하게 앉아 좌선 중에만 지속되는 단계, 왔다 갔다 하면서 일상활동 가운데에서도 계속되는 단계, 잠자면서 꿈을 꿀 때까지도 지속되는 단계, 숙면 상태에서도 지속되는 단계다.
이 같은 단계에 들어서야 진정한 공부라고 하고, 여기서는 매우 집중된 느낌과 매우 맑고 깨끗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다른 데서 느끼지 못했던 깊은 희열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이 단계가 끊어짐이 있지만, 점차 수행을 하면서 끊어짐이 사라져간다. 깊은 숙면 상태에까지 화두가 지속이 되면 공부가 매우 깊은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불교에서는 선정을 권하지 않는다. 육조단경에 보면 견성만을 말하고, 선정과 해탈은 논외로 친다. 해탈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깨닫기만 하면 거기 갇혀 있다는 것이고, 선정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선정이 입출정(入出定)으로 말미암아 있는 단절성 때문이다. 선정에는 반드시 입정과 출정이 있다. 그러한 단절성이 진정한 깨달음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속되는 선정에 대해 초기경전에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화두가 지속이 되다 어느 순간 그 의심을 타파 하는 것, 그것도 폭발적으로 타파하는 것,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바야흐로 의심을 타파하고 화두를 타파하고 찾던 바 정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면 그 깨달았다는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깨달음의 경지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억지로 우리들의 지적 수순에 맞춰 설명한다면 그것은 연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연기법이라는 것은 무아라는 뜻이고 무실체공이라는 뜻이다.
공이라는 것은 비어 없다는 뜻인데, 있던 것이 소멸해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세계 전체가 연기 아님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체 모든 존재가 무실체공(無實體空)이라는 뜻이다. 모든 존재가 실체가 있다고 믿었었는데, 그 실체라는 것이 한꺼번에 사라져서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일체 모든 것이 소멸해서 없어지는 것 무실체공인 것, 이런 세계를 열반세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실체공인 현실세계가 상존한다는 것이다. 모든 세계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실체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유(假有)라 하고 허상이라고도 말한다. 금강경에서는 이것을 몽환(夢幻)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일체가 무실체공일때 그 무실체공인 상태가 완전히 비어 없음 만이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무실체공인 상태에서 그 무실체공인 상태를 자각하는 게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라고도 표현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같이 자각하는 것, 무실체공인 상태에서 공인 상태를 자각하는 것을 근본마음이라고 말한다.
무실체공인 세계가 존재하고, 그 무실체공이 열반세계이고, 그 무실체공이 우리들 마음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와 이 세계의 중생과 열반과 우리 마음은 하나라고 말한다.
이것을 마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모든 마음이 사라진 상태, 그것을 무심이라고도 하고. 무심이라는 것도 적절치 않은 마음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마음과 세계와 열반이 하나라고 보는 사상을 불이(不二)사상이라고 한다.
제가 앞에서 이 세계가 비어 없다고 말했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비어 없는 세계가 있다고 말했다. 없는 세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유를 들면 예컨대 무지개와 같은 것이다. 무지개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 잘 안다. 이것이 진짜 존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기구를 타고 올라가고, 헬기를 타고 올라가도 붙들려고 해도 붙들 수가 없다. 이것은 철저히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누구나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무지개를 사랑할 수도 있다. 이것이 대승에서 깨달은 보살들의 경계이다. 이 세계가 실체가 없지만 실체 없는 세계가 눈앞에 현전하는 것이다. 세계가 있고, 세계 속에 중생이 있고, 중생의 고통이 있다. 세계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중생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고뇌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고통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혹(迷惑)으로 말미암아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사람은 고통은 실체로 있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속에서 있다고 잘못 착각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깨달은 보살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불이(不二)를 깨달아서 일체 모든 세계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중생이 남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생들에 대한 보살의 끝없는 자비의 원행이 시작 되는 것이다.
그럼 대승불교 핵심사상 불이사상이 어떤 것인지 한두 가지만 예를 들고자 한다. 진망불이(眞妄不二)라는 게 있다. 참됨과 거짓이 둘이 아니다. 이것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기를 믿고 서원한다. 자타불이라는 것이 있는데,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까 말한 대로 보살의 비원(悲願)사상이 근거가 되고 있다. 또 미오불(迷悟佛)이라는 것도 있는데, 미혹과 깨달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깨닫기만 하면 미혹은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성불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사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도로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적인 것을 대략 마무리 하고자 한다.
제가 보기에 대승불교와 남방불교는 2000년 이상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종교들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다른 길을 걸어왔고, 그래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왔다. 비록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다름이 있고,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대한 차이가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구원하는 것은 같다.
오늘 이 같은 만남의 자리가 어쩌면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서로의 특색을 배우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융화되어 나가는 그런 시대이다. 불교사상만이 다름을 고집해서 끝까지 주장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사상 체계가 과거에 그러했듯이, 서로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그래서 융화되어 나가는 과정이 비롯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 같은 만남이 앞으로 불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아잔브람 스님의 기조 법문 요지
오래 지속돼 내려온 생각이라도 논쟁하여, 때로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수행할 때도 스승들과 논쟁했다. 논쟁에 대해 아잔차 스승은 좀 더 지혜로워지는 방식임을 알고 도전적인 질문도 다 받아주었다. 그것이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다니던 런던의 학교는 기독교 교단에서 설립했다. 교목(校牧)이 신(神)에 대해 말하면 질문하고 논쟁했다. “목사님이 말한 신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세요. 저는 알고 싶어요.” 교목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모든 사물의 시작이며 끝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언어를 초월한 곳에 있다” 다시 질문했다. “실제로 신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교목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신에 대해 알아듣게 설명하지 못했어요.”

불자가 된 후 어느 스님에게 질문했다. “깨달음이 무엇인가요” 그런데 스님은 목사님과 똑같은 형식으로 대답했다.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모르는군요”

서양에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다. 어떤 상인이 있었는데 왕에게 옷 한 벌을 팔았다. 상인이 왕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옷을 볼 수 없고, 아주 현명한 분만 이 옷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이어 상인은 왕에게 질문했다.
“폐하는 이 옷을 볼 수 있나요”
그런데 왕은 백상들에게 선하고 현명한 왕으로 여겨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보인다”고 답했다.
그리고 왕은 신하들에게 물었다. “경들은 이 옷이 보이는가” 신하들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싫어했기에 옷이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옷이 없었다. 상인의 사기극이었다. 다음 날 왕은 아무것도 안 입고 대규모 행진을 했다. 구경 나온 백성들도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왕이 벌거벗고 있는데도 “임금님이 입고 있는 저 옷을 봐”라며 환호했다. 그때 한 어린 소년이 소리쳤다. 소년은 솔직했다. “임금님 왜 벌거벗고 다니세요” 그제야 왕은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가 젊은 불자였을 때 어리석음이든 깨달음이든 구별이 없었다. 의심해라, 참구하라는 의미가 없었다. 이미 제 삶에는 의심이 너무 많아 오직 해결 방법만 찾고 싶었다. 한국의 선(禪)전통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 명상을 시작했을 때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명상을 하면 행복해지고 평화롭게 되고 스트레스를 없앨 수 있다.” 저는 깨달음에 관심이 없었다. 먼 곳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더 평화롭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불교 책들을 보니 부처님은 굉장히 단순하게 가르쳤다. 부처님의 메시지는 ‘고통과 고통의 멸(滅)’이었다.

한국의 선불교가 한국인에게 고통을 멸하는 방법이 있다며 접근하면 굉장히 효과가 있을 것이다. 결혼, 자녀, 건강, 직업으로 많은 고통 받고 있다는 한국인에게 의심해 보라는 대신 평화와 행복을 독려하면 어떨까. 그러면 단계적으로 깊은 평화와 행복으로 안내할 수 있다. 이것이 훨씬 존재의 근원이며 실용적이다.
너무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 조금 더 실질적으로 실용적으로 다가서면 어떨까? 명상을 통해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선정에서 체험한 것이 다른 스님에게 배운 것보다 많은 불법(佛法)을 체험하게 했다. 나는 깊은 선정을 체험한 후에 경전을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불교공부를 하고 명상수행을 하는데, 나는 반대했다. 명상을 먼저하고 불교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불교의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항상 선정을 권했다. 아난다가 질문했을 때 부처님은 네 가지 종류의 명상을 권했다. 초(初)선정, 이(二)선정, 삼(三)선정, 사(四)선정이다. 선정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다른 경전에도 부처님께서 선정 없이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팔정도(八正道)이며, 그 안에 선정이 있다고 설했다.

저는 도전을 잘 한다. 이해가 안 되면 부처님 초기경전에서 답을 찾는다. 선정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비유는 ‘올챙이와 개구리’다. 물속에서 태어나 사는 올챙이는 물이 무언지 알 수 없다. 마치 평생을 다섯 감각과 몸 속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이 그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올챙이가 개구리가 돼 육지에 오르면 물을 볼 수 있게 된다. 다섯 감각과 몸이 사라졌을 때 그것을 알게 된다.
선정에 더 깊게 들어갈수록 이 의지라는 것이 사라진다. 의지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의지를 알게 된다. 좀 더 선정에 깊이 들어가면 의식이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의지(意志), 육식(六識)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면 다 비어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차에 운전자가 없는 것과 같다.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거기에 없다. 여러분은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텅 비어 있는 과정일 뿐이다. 거기에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을 때 알 수 있다.

열반의 세계라는 것은 부처님 당시에는 아이들 조차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등잔불에 불꽃이 꺼질 때 그들이 아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부처님 당시 어린이들은 등잔불이 꺼지면 ‘불꽃이 열반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비워 있는 과정’이다. 멸했다는 것이다. 불꽃은 등잔, 심지, 기름 등 세 가지 요소에 의존한다고 부처님은 말했다. 이 가운데 기름이 없다면 더 이상 거기에 불꽃은 없다. 열반한 것이다. 소멸한 것이다.
우리의 존재 원인인 미혹(迷惑)과 갈애(渴愛)가 소멸되면 우리는 열반에 도달하게 된다. 열반에 이르면 이 불꽃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이것이 바로 제가 불교를 배우고 이해 하는 방식이다.

북방과 남방의 불교수행을 살핀다.-패널과의 질의 응답-

원담스님 = 마음과 뇌의 관계. 그리고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적명스님 = 대승불교 관점에서 뇌는 마음이 만든 상에 불과하다. 꿈을 꾸면 어떤 세상은 천상이, 어떤 세상은 지옥이 되는 것과 같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마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하기 어렵다. 저는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 마음이라고 알고 있다. 사성제는 바로 마음에 대한 것이다.

아잔브람 스님 = 초기불전에 보면 두 가지 깨달음이 있다. 하나의 깨달음이 그 다음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아라한과이다. 탐진치가 멸하는 것이다. 그때 본인이 자유를 얻었음을 안다. 두 번째는 반열반이다. 완전한 소멸이다.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이곳에서는 마음조차도 소멸하는 곳이다. (마음을 알려면)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뇌와 마음의 관계는 흥미롭다. 1981년에 존로버교수가 뇌가 없는 소녀를 발견했다. 수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었다. 씨티 촬영을 해보니 뇌가 없었다. 지성도 높았고 사회적으로 적응도 잘했다. 마음이 뇌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현대과학은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이 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뇌가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다.

원담스님 = 물질의 궁극적 본성은 무엇인가.

적명스님 = 연기 법문이 있는데, 달리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생성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무명을 세계가 일어나는 근원이라고 한다. 진여 불성은 근원의 근원이다.

아잔브람 스님 = 안다고 관찰하는 순간이 창조의 순간이다.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찰해야 한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의식적 관찰이 있어야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한다.

각산스님 = 깨침으로 가는 길에 선정은 필수인가.

적명스님 =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선정은 끊어지지 않는 삼매이다. 일상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삼매라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화두 수행 중에도 선정에 드는 경우 있다. 그러나 그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각산스님 = 초기불교 경전에 보면 깨침의 통로인 정정이 나오는데.

적명스님 = 정정을 끊어지지 않는 선정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각산스님 = 팔정도의 견해와는 어떻게 일치되는가.

적명스님 = 팔정도의 정정은 지속적인 선정 상태이다.

아잔브람 스님 = 선정 안에 들어가면 내가 무엇을 하는지 조차 알 수 없다. 놓아 버리면 모든 사물이 다 사라지는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상태가 아니고 굉장히 초인적이고 수승한 상태이다. 선정 없는 지혜 없고, 지혜 없는 선정 없다. 명상을 잘하는 방법은 우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것이다. 내려놓으면 점점 움직임이 사라진다. 선정이라는 것은 고요해지는 단계일 뿐이다.

전현수 박사 = 요즘 마음이 힘든 사람이 많다.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아잔브람 스님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탐욕과 갈애 때문이다. 무엇인가 구하려고 열심히 달리지 말라. 멈추면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다. 그게 깨달음이다.

적명스님 = 남방불교와 대승불교의 수행관은 물론 진리관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를 절감한다. 마음의 움직임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선사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상하다. 그대 것이 아닌 것은 그대 앞으로 오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쉬어라. 그리고 보다 근원적인 해탈을 성취하면 모든 고뇌가 멈춘다는 것을 알아라. 그래서 가나오나 이 화두에 마음을 두어라. 그러면 일상에 고요하고 편안함은 물론이고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고 말 것이다.

아잔브람 스님 = 부처님이 ‘유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무가 없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유무의 중도를 연기를 통해 설했다. 점을 찍어놓고 보면 있다 없다고 정의할 수 없다. 인간이 사는 과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열반이 있다 없다에 적용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과정에서 보면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사라진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내용 그대로 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본성품이고 자연이다. 삶이 끝나면 재생이 있고 재생을 발견할 수 있다. 완전한 소멸을 이야기 한다. 모든 존재의 완전한 소멸만이 완전한 행복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대해 많은 서술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존재의 소멸이다.

각산스님 = 한국불교는 수행의 지향점을 견성성불에 두고 있다.

수좌스님 = 정말 견성한 분 있느냐는 문제를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언제나 치열한 수행자가 있고, 그런 수행자가 있어 왔다. 깨달음의 문제는 남방불교에서 생각하는 부분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다. 모든 탐진치가 제거돼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입장이 아니다. 깊은 삼매에서 문득 진리를 깨닫게 되면 깨닫는 것이다. 이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계에 중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세계 그대로 열반세계이다.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이 제멸하고 몸이 제멸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마치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을 때 소멸을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완전한 소멸만이 진정한 열반이라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열반에 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계가 무실체공 열반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중생이 있고, 중생의 고뇌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무지개의 비유처럼.

각산스님 = 남방불교에서도 초기경전과 같이 깨침을 이룬 분이 존재하는가.

아잔브람 스님 = 수백 명 수천 명이 되는 사람이 부처님 가름침대로 선정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은 후에는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것 자체를 놓아 버리는 것이었다.

전현수 박사 = 불이법문은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가.

적명스님 = 세계를 볼 때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세계이다. 산이든 바다든 너든 나든 다 ‘나의 세계의 존재’이다. 진정한 깨달음 이전 마음 일체라는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다. 일념이 곧 우주이고 세계이다. 꿈을 꿀 때 그 전체가 나의 생각이듯 말이다. 여러분이 세계를 볼 때도, 세계를 인식하고 느낄 때도, 오직 여러분의 세계일 뿐이다. 그걸 마음에 두어라.

아잔브람 스님 = 오늘 만남을 통해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도 발견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논했지만 친절과 자비와 형제애가 오갔다. 하나의 법을 두 개의 다른 각도 시선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신선했다. 제가 수좌스님에게 들은 가르침도 잘 간직해 가져가겠다. 정말 불이(不二)인가. 테라바라-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없을 텐데. 마음이 허공처럼 넓은 사람에게는 품안으로 날아드는 모든 새를 받아들인다. ‘한국 선불교의 새’와 ‘호주 초기불교의 새’가 오늘 만났다.

적명스님 = 열반이란 것, 진리라는 것을 몸과 마음과 세계가 있는 상태에서 수행할 수 있느냐? 몸과 마음과 이 세계가 다 멸진해야만 구경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차이였다.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결과에는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2000년이 넘는 전통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구도를 해 왔다. 어느 것은 진실이고, 어느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앞으로 당분간은 이 같은 견해 차이가 지속될 것이다. 어느 때인가는 융화되어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좀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길이 될 것이다. 그 일을 할 사람들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힘써 노력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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