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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2-08, (수) 10:03 am 

가입일: 2016-11-29, (화) 5:4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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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를 다시 생각 한다.

백용성조사 유훈을 실현하는 장수 죽림정사
만해 한용운의 개혁을 실천선양 하는 백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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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의 고국방문(2014년4월)이었지만, 고국 불교의 이모저모를 주마간산격으로나마 인식하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막연하게 본국과 미국을 오가는 불교계 인사들을 볼 때, 생각되는 바가 많았었는데, 나는 이번 고국 방문이 1차적으로는 가족사(장모49재) 때문이었지만, ‘붓다의 메아리’ 편집자라는 신분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머무는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불교에 쏟았다. 나의 젊은 시절, 만해 한용운은 어쩌면 우리 젊은 불교운동가들에게는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시인이면서 독립 운동가이면서도 불교개혁의 선구자였다. 하지만 당시 우리 젊은 이들이 인식하는 만해는 독립운동가요 시인으로 클로즈업 되곤 했다.
이번 방문에서 나는 만해 한용운의 불교 개혁 쪽에 무게를 두고 주목해 봤다. 그리고 만해보다 상당히 연상이면서도 만해의 3.1운동 33인의 서명에 동참한 백용성 조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8일은 독립운동가 용성(1864∼1940) 스님의 탄생 150주년 기념일이었다. 용성 스님의 본명은 백상규, 법명은 진종이다. 용성 스님은 함께 3.1운동 민족대표였던 만해 한용운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한국불교의 청정수행 기풍을 세운 인물이자 독립운동의 숨은 주역으로 꼽힌다. 용성조사의 손자뻘 상좌인 불심도문 조계종 원로 큰 스님은 백용성 조사의 유훈을 수십 년 째 실현해 오고 있다. 용성 조사의 생가였던 집을 죽림정사로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죽림정사는 인도의 왕사성에 있던 불교 최초의 사찰이다.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제공했던 절이다. 여기서 이름을 따온 장수 죽림정사는 백용성 스님이 탄생한 생가이다. 상당한 규모의 가람으로 탄생한 죽림정사는 백용성 조사의 유훈을 실현하는 본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주석하고 계시는 불심 도문 조계종 원로 큰 스님을 찾아뵙고자 일정을 알아보던 중, 마침 4월19일 6시 반 서울 서초동 대성사 입구에서 죽림정사로 향하는 차편이 있어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당일 10시 전에 장수 죽림정사에 이르렀다. 그날이 마침 도문 원로 큰 스님의 80회 생신축하 법석을 주지 법륜스님과 큰 스님 직계 문도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자리로, 그간 각처에서 용성조사 유훈사업 불사에 인연을 지어온 불자 400여명이 함께 모이게 된 법석임을 알게 되었다.

큰 스님께서는 이 사람을 여전히 반가이 맞아 주시며 각별한 배려를 놓지 않으신다. 도안 스님 입적 이후 도문 원로 큰 스님께선 한결같이 나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해오신 분이시다. 도문 스님의 큰 법석자리엔 항상 어려운 객승들이 스님 주변을 맴돌며 구원의 손길을 청한다. 이를 뿌리치지 못하는 분이 큰 스님이시다.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큰 스님은 한국에서의 해야 할 불사가 너무나 쌓여있어 직접 미국 일까지 큰 힘을 보탤 순 없으나 가끔 미국에 오시면 특별법회를 여는 것으로 인연의 지중함을 약속해 주신 바가 있다. 이제 죽림정사는 백용성 조사의 유훈을 실현하는 차원을 넘어서, 상좌인 주지 법륜스님이 한국불교계의 대법사로서 통일운동까지 활동의 폭을 넓혀가는 곳이 되었다.

용성 스님은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를 내걸고 조선시대 500년의 탄압을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고 민간신앙에 파묻힌 불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힘썼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회복하고 계율을 정비해 정법을 확립했다. 수백 년 동안 승려 출입이 금지됐던 서울 4대문 안에 '대각교당'이란 도심사찰을 세웠다. 3.1운동으로 1년 반 옥살이를 한 그는 감옥에서 목사들이 한글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옥에서 풀려나 1921년 한국불교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 1928년에는 '조선글 화엄경'도 펴냈다. 당시 언론이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화제가 됐을 정도이다.

아무튼 나는 이번 죽림정사 방문에서 도문 큰 스님께서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건강하게 활약하시는 것을 보면서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백용성조사가 한국 근대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에 못지않게 큰 파장을 일으키고 지금도 그 정신이 한국불교계에 살아 있는 분이 만해 한용운 스님이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은 설악산 내설악 오세암으로 출가하여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고, ‘불교대전’ ‘정선강의 채근담’을 저술하고, 1918년에는 불교잡지 ‘유심’을 발간하기도 했다. 1917년 만해 한용운 선사는 오세암에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게송을 시로 남겼다.

“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몇 사람이나 나그네 시름 속에 오래 젖어 있었나,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 깨뜨리니, 눈 속에도 복사꽃 펄펄 날린다.(男兒到處是故鄕을 幾人長在客愁中에 一聲喝破三千界하노니 雪裏裡桃花片片飛다)”

1919년 3.1운동 33인 가운데 한 분이 되신 것도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백담사로 돌아와서 그는 그 유명한 ‘님의 침묵’을 발표했다.
설악무산 조오현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스님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하여 만해 한용운 선사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만해축전과 만해상을 시상해 오고 있다. 이 만해상은 한국의 노벨상으로 지칭될 정도로 권위 있는 국제상이 되었다.

한국불교는 지금도 백용성 스님이나 만해 스님이 절규했던 개혁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이 그렇게 염원했던 조국광복은 왔지만, 남북은 분단되었고, 불교 또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진행형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계종 원로 불심 도문 스님과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설악 무산 스님께서 활약하고 계심을 보면서 뭔가 희망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나의 삶의 터전인 LA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로 미력한 힘이나마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LA 불교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다짐하면서, 고국 방문 시에 여러모로 자문에 응해 주신 이치란 박사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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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안 수(붓다의 메아리 웹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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