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불교-9 (앙코르의 미소-②)

BUTTON_POST_REPLY
lomerica
전체글COLON 427
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캄보디아 불교-9 (앙코르의 미소-②)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03, (금) 9:09 am

앙코르의 미소②

아침 일찍 움직이기로 해서 앙코르 왓 사원 입구에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11년 전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사진1: 앙코르 사원 입구 매표소에 모여든 관광객들.
camb901.jpg

사진2: 입장표에 사진을 자동촬영 부착되도록 한 입장권.
camb902.jpg

입장료 20불이면 2만2천원인데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연간 수백 만 명이 찾는다고 하니, 관광수입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입장수입뿐 아니고 시엠 립에 떨어뜨리는 달러가 만만치 않는다고 보며, 캄보디아의 경제에도 플러스가 되는 황금알을 낳는 달러 박스라는 인상을 받았다. 앙코르 사원 주위는 벌써 활기에 넘치고 많은 인파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관광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관광객들에 대한 깔끔한 관리와 운영에는 아직 미흡한 것 같고 앙코르 사원 관리 보호 그 자체에도 아직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관리 운영이 요청된다는 것을 느꼈다.

앙코르 왓은 처음에는 힌두교사원 용으로 건립되었고 나중에는 불교사원으로 사용되었던 거대한 종교건축물이다. 이 거대한 건축물을 세운 분은 수리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 재위1113-1150) 왕이다. 힌두교의 비슈누 신을 찬탄하기 위해서 이 건축물을 지어서 헌납했는데, 남인도의 힌두문화가 크메르(캄보디아)왕국에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크메르 왕국이 세워진 것은 790년 자야바르만 2세 왕에 의해서이지만, 앙코르 왓은 수리야바르만 2세 왕에 의해서 건립되고 앙코르 왓 사원 뿐 아니고 다른 사원들도 건립했다. 앙코르 사원의 최 고층 첨단에는 캄보디아를 상징하는 건축양식이고, 이 건축모양은 캄보디아 국기가 되었다. 앙코르 사원은 힌두의 신화와 우주관이 건축 설계의 기본이 되고 있는데, 건축 양식은 남인도의 드라비다인 건축양식(Dravidian architecture)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남인도의 드라비다인 건축양식을 전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고 크메르 양식을 가미해서 앙코르 양식의 독특한 건축술이 탄생되었다. 앙코르 왓을 건립하는 데는 건축설계나 기술적인 분야는 남인도의 엔지니어들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중간 및 하층 인력은 크메르인들이었는데, 4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진3: 구름이 약간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이지만 많은 방문객들이 앙코르 왓의 다리 위에서 사원으로 향하고 있다.
camb903.jpg

사진4: 햇빛이 나자, 앙코르 사원 쪽에서 입구를 바라본 모습으로 수많은 방문객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다.
camb904.jpg

앙코르 왓에 대해서는 소개하려면 상당한 양의 원고가 필요하다. 《Ancient Angkor》란 영문 책이 있는데, 마이클 프리 맨이라는 분이 지은 앙코르 왓을 비롯한 이 일대의 사원들에 대해서 30년간 탐사하고 연구한 소개서인데, 정말 속속들이 구석구석 이곳저곳의 사원들을 세밀하게 소개하는 역사서요 해설서이다. 앙코르 왓 사원을 둘러보노라면 정말 인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왕의 의지에 의해서 이런 거대한 종교건축물을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강하고 부가 뒷받침되었다고 보는데, 수리야바르만 2세 왕은 크메르 왕들 가운데 막강한 군주였다. 이때만 해도 힌두교가 힘을 얻었고, 힌두 승려들이 앙코르 왓 사원에서 비슈누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주문을 외웠겠지만, 자야바르만 7세 (Jayavarman VII 1125–1218) 왕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자야바르만 7세 왕은 1181년에 등극해서 1218년까지 거의 40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그는 영토를 넓히고 힌두 사원도 건립했지만, 앙코르 톰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고 불교사원인 바이욘(Bayon)을 건축한 것이다. 앙코르 톰 신도시에 세워진 사원으로서 이 사원은 인도의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다. 자야바르만 7세 왕이 죽고 나서는 힌두와 상좌부 불교 간에 힘겨루기가 시작됐는데, 결국에는 상좌부가 힘을 얻게 되는데, 13세기에 접어들면 앙코르 왓을 비롯한 바이욘 사원 등은 상좌부 불교의 사원으로 점점 변화해 가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비록 16세기가 되면 앙코르를 비롯해서 앙코르 톰은 정글의 밀림 속으로 묻히게 된다. 앙코르 왓이 서양에 알려진 것은 1586년 한 포루투갈의 신부가 방문하고서 하는 말이 이 세상에는 그렇게 큰 건물이 없어서 펜으로는 묘사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박물학자이며 탐험가인 앙리 무오(Henri Mouhot1826-1861)가 19세기 중반 이곳을 방문하고 여행기를 썼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캄보디아 내전을 겪고 난 다음에 발굴, 개방하여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바이욘 사원은 처음부터 불교사원으로 건립되어서인지, 바이욘 사원 그 자체는 유적이 되었지만, 주변에는 여러 개의 테라와다 사원이 있어서 비구들이 전법.수행하고 있었다.

사진5: 바이욘 사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석면(石面)은 불면(佛面)같으면서도, 자야바르만 왕 자신을 부처와 보살로 동일시한 상징으로서의 얼굴을 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camb905.jpg

사진6: 바이욘 사원 유적 앞에 임시로 세워진 사원에서 한 비구기 신도들에게 법문을 들려주고 있다.
camb906.jpg

나는 시엠 립의 앙코르 왓이나 앙코르 톰의 바이욘 사원을 찾으면서 현재 캄보디아 불교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다행하게도 불교가 다시 부흥하고 있었다. 앙코르 사원 유적 경내에도 테라와다 사원이 있어서 수십 명의 비구와 사미들이 수행하고 있었고, 캄보디아 국민들은 사원을 찾고 있었다.

사진7: 앙코르 왓 유적 경내 사원에서 비구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캄보디아 불자들.
camb907.jpg

사진 8: 사미승들은 사원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camb908.jpg
camb908.jpg (13.62 KiB) 517 번째 조회
앙코르 왓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앙코르 왓의 위용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이런 초대형 건축물을 중세시대에 세웠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오전일정은 앙코르 왓을 보고 앙코르 통의 바이욘 사원을 보고 나면 어느 정도 오전 시간이 지난다. 시엠 립에는 앙코르 왓 등 사원군(群) 말고도 큰 호수가 있는데, 오후에는 대개 이 호수를 찾고 저녁에는 ‘앙코르의 미소’란 쇼를 관람함으로써 하루 일정은 끝난다. 영상 3-40도가 넘는 더위지만, 관광객들은 앙코르의 신비에 젖어들면서 중세 크메르 왕국의 꿈속에서 여행을 즐기는 기분을 느낀다. 캄보디아는 내전을 겪고 난 지금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가져오는 사회 국가의 불안은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씁쓸한 감을 느끼게 되는데, 한국이라면 다들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타산지석이 아닐까 한다. 시엠 립의 오후 일정은 정심 먹고 낮잠을 한숨자고 시작한다고 택시 기사가 알려준다. 오후 일정은 다음 회에서 소개하기로 하자(계속).

해동영한아카데미
원장 이치란 박사
BUTTON_POST_REPLY

다시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