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불교-5 /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불교수난과 왕권 부침

BUTTON_POST_REPLY
lomerica
전체글COLON 427
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캄보디아 불교-5 /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불교수난과 왕권 부침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03, (금) 8:55 am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불교수난과 왕권 부침

사진1: 프놈 우동 산 언덕위에 위치한 사원.
camb501.jpg

캄보디아는 186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크메르(캄보디아)는 한동안 암흑시대가 연출됐는데, 프랑스 보호국으로 전락할 무렵 크메르의 왕실수도는 우동(Oudong)에 있었다. 지금의 수도인 프놈펜에서 북서쪽으로 40km 지점에 위치한 프놈 우동산이다. 이곳에는 대규모 왕실 공동묘지들이 있기도 하다. 우동은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최대의’란 의미를 갖고 있다. 노로돔(1834-1904)은 캄보디아의 국왕(재위 1860-1904)으로서 전 왕(王) 앙 동의 아들로, 재위 4년째인 1864년부터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그는 왕위를 보장받는 대신 실권이 없는 군주로 전락하였다. 프랑스 속국이 되기 전 크메르는 시암의 제후국과 같은 위치였다. 캄보디아 왕실은 시암과 베트남으로 갈라졌고, 노로돔은 시암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다. 사실상 인질이었다.

사진2: 태국 방콕 왕궁에서 노로돔 왕
camb502.jpg

시암이 캄보디아를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었기에 노로돔은 왓 포 사원에서 캄보디아 국왕으로 즉위식을 갖고 캄보디아로 향했다. 노로돔이 즉위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고, 결국 방콕에서 즉위했으나 프랑스 속국으로 전락하여 명목상의 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1867년 시암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캄보디아를 넘겨주는 대신 바탐방과 시엠립을 차지했으나 1906년 프랑스와 태국 국경 조약에 의해서 다시 캄보디아로 양도되었다. 노로돔 역시 캄보디아로 가기 전,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어서 프랑스 보호령이 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는 국왕에 즉위하기 전 태국의 보수파인 탐마유티카 니까야파에서 비구계를 받고 비구생활을 했었는데, 당시 태국 제 4대 국왕인 몽꿋 왕(1804-1868, 재위 1851-1868)이 비구로 25년간 있을 때였다. 따라서 당시 시암 몽꿋 왕은 종교적 스승이었다. 이런 인연이 있었는데, 시암과 프랑스는 바탐방과 시엠립과 앙코르 왓(사원)을 태국에 양도한다는 조약을 맺은 것을 듣고 노로돔은 분노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으로 캄보디아는 1867년부터 1953년까지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왜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했는가.

사진3: ‘왕과 나’란 영화로도 유명한 제4대 시암의 몽꿋 왕(1804-1868).
camb503.jpg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1851년 쿠데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고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8-60년)을 치르는 한편,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다. 1857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 신부가 살해되자, 그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1858년 전쟁의 개시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차차로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캄보디아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사진4: 시소와스 모니봉 캄보디아 왕
camb504.jpg

노로돔 왕이 죽자, 프랑스는 명목상의 왕이지만, 누군가를 올립해야했는데, 노로돔의 형제인 시소와스 모니봉(1875-1941)을 선택했는데, 그는 황태자 시절 프랑스군 소령을 역임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 치하에 있었지만, 프랑스는 시소와스 모니봉의 아들 대신, 시소와스 모니봉의 딸인 시소와스 코사막(1904-1975)과 노로돔 수라마리트(1896-1960) 사이에서 태어난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2012)를 선택했는데, 1941년부터 1955년까지 왕을 역임했다. 1955년부터는 노로돔 시아누크 왕을 강제 퇴위시키고, 노로돔 시아누쿠의 아버지인 노로돔 수라마리트가 196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하지만 시아누크는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3년부터 1970년까지 론 놀 국회가 그를 폐위할 때 까지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 후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면서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13년의 추방 생활 끝에 1991년 캄보디아로 돌아와서 1993년 왕위에 올라서 2005년까지 왕위에 있다가 2012년에 사망하였다. 왕위는 2004년 그의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1953-)에게 양위되었다.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1978년 폴 포트 정권 붕괴 직전 아버지 시아누크와 탈출, 프랑스에서 20년간 발레를 가르치면서 생활하다가 1993년 캄보디아 파리 유네스코 대사를 역임했고, 2004년 새 국왕에 즉위했다.

사진5: 1956년 베이징에서 모임. 좌로부터 마오쩌둥, 펑전, 시하누크, 류사오치.
camb505.jpg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현재 독신이며 독실한 불교신자이다.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시아누크 전 국왕과 두 번째 부인인 노로돔 모니끄 시아누크(1936-) 왕후 사이에서 태어났고, 현재 캄보디아 국왕으로 재위하고 있다.

사진6: 캄보디아 시아누크 시하모니 국왕
camb506.jpg

사진7: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왕궁에서 회담하고 있다(2009년).
camb507.jpg

캄보디아의 근현대사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테라와다(상좌부) 불교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크메르의 근현대 고승들의 불교에 대한 신념과 민족정체성 그리고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서이다. 전회에서 소개했던 캄보디아의 20세기 중반의 현대 고승들인 추언 낱(Chuon Nath 1883–1969), 르비 엠(Lvi Em(1879-1957), 후옷 낱(Huot That 1891-1975?), 옴 솜(Oum Som1852–1932)과 같은 비구장로 큰 스님들 때문이었다.

사진8: 캄보디아 비구 학승들이 불교대학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
camb508.jpg

프랑스 식민지 시기(1863-1954) 아래서, 캄보디아 불교는 사원 속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프랑스 식민지 정부는 크메르인들의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최소화 시켰다. 많은 크메르인들은 고등교육을 받으려 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어려웠다, 그래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베트남으로 가야했다. 캄보디아에서의 고등교육이란 그들의 통역을 위한 교육이었다. 캄보디아 비구들은 프랑스 식민지 관료들에게는 식민정부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크메르의 문학과 문화를 바꾸려하자, 크메르 비구들은 그들의 사원에서 이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고투했다. 사원은 크메르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초를 제공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을 한 분들이 추언 낱(Chuon Nath 1883–1969), 르비 엠(Lvi Em(1879-1957), 후옷 낱(Huot That 1891-1975?), 옴 솜(Oum Som1852–1932)같은 비구장로 큰 스님들이었다.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노로돔 시아누크 왕은 불교를 적극 후원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이 무렵 캄보디아에는 많은 학승들이 있었는데, 팡낱(Pang Khat)과 키브 cha(Kiev Chom) 같은 학승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75년 불행하게도 불교는 공산정권하에서 직격탄을 맞았고, 1979년 베트남 침공으로 많은 지성비구들이 죽고 망명길에 올랐고 사원과 도서관들은 파괴되었다.

캄보디아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서 지금 불교부흥에 힘쓰고 있다. 종교문제는 캄보디아 정부의 종교문화부 산하에서 보호받고 장려되고 있다. 캄보디아 헌법 43조에, ‘크메르 시민은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불교는 국교가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캄보디아 정부는 비구 승려들의 교육을 후원한다고 헌법 68조에 보장하고 있다.

해동영한 아카데미
원장 이치란 박사
BUTTON_POST_REPLY

다시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