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불교탐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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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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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몽골불교탐방-2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24, (화) 7:49 am

사진1. 내몽고 울란호특 시 공원에 있는 칭기즈칸 사당(廟)

흉노제국
몽골고원의 역사는 흉노로부터 시작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본 몽골족은 오랑캐였다. 초원의 유목민족인 몽골족은 중국의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화되지 않은 비 세련된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몽골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야말로 자연과 함께 목축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민족이라고 자긍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마천이 그의 불후의 명작인 역사서인《사기(史記)》권 110에서 <흉노열전(匈奴列傳)>을 소개함으로써, 흉노 즉 오랑캐라는 관념이 고정화되었다. 사실, 한민족은 언어학적으로나 종족의 관점에서 보면 몽골족과 먼 조상이 같고, 우랄알타이어족에서 몽골어와 퉁구스어로 갈라진 같은 어족이면서도 중국 한. 당. 송. 명 시대의 문화나 성리학을 존숭하는 사대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는 듯 한 태도를 취한다. 요나라는 내몽고와 만주를 배경으로 한 거란족이 세웠고, 금나라는 퉁구스계인 만주족인 여진족이 세웠고,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들인데도, 우리는 당송이나 명나라를 중국의 정통으로 보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다. 사실 요금원(遼金元)이나 청(淸)은 한민족인 퉁구스계와는 사촌지간들인 것이다. 퉁구스계는 바이칼 호에서 동 몽골을 경유하여 만주를 거쳐서 한반도로 이주해왔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음을 볼 때, 흉노는 우리와 먼 친척이 아니겠는가. 중국불교나 동아시아불교를 연구하는 분들 거의가 한당송명 불교를, 특히 송 대의 선불교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고, 비중국계 민족의 불교는 도외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만나 본 몽골 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흉노이며 선비족임을 당연시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자들은 한국은 먼 친척의 나라임을 당연하게 여겼다. 칭기즈칸의 경우에는 퉁구스계의 동호에서 갈라진 분파라는 가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몽골 인들은 흉노 선비 동호 등이 전부 몽골인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몽골고원은 흉노 선비족 등이 지배하다가 이후 몽골 고원과 중국의 북방을 장악한 나라들은 5호(胡) 16국이라고 해서 중국민족이 아닌 비 중국민족인 흉노(匈奴)·갈(羯:흉노의 별종)·선비(鮮卑)·저(氐: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의 이른바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여 1백 수 십년간 북위(北魏)가 일어날 때 까지 서로 흥망을 되풀이하였다. 이후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인 북위를 세운다. 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하는데,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변의 보위(保衛)를 도모하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掎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 십익건(拓跋什翼犍)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淝水)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화베이(華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진 남북조를 거치고 수나라 당나라를 지나서 송나라에 이르러서 북방민족은 10~12세기에 중국 북방에서 거란(契丹)이 세운 정복 왕조(916~1125)인 요(遼)나라를 세운다. 요는 비중국민족인 거란(契丹)이 중국 북방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로서, 916년 건국 당시의 명칭은 거란국(契丹国)이었지만, 938년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한 뒤 나라 명칭을 요(遼)라 하였다. 1125년 여진(女眞)이 세운 금(金, 1115∼1234)에 멸망되었지만,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에 서요(西遼, 1132∼1218)를 건국하여 1218년 칭기즈칸(成吉思汗, 1155?~1227)의 몽골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금나라는 퉁구스족 계통의 여진족이 건립한 왕조(1115∼1234)이다. 창건자는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이다.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초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2세기 초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지금의 松江省) 아청(阿城)에 있던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그 추장인 아구다가 요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가 곧 금나라 태조(재위 1115∼1123)이다.

금나라는 그들의 근거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라 하였다. 금이라는 국호는 근거지인 안추후수이에서 금이 많이 산출된 점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조는 요군(遼軍)을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시성(山西省)의 다퉁(大同), 허베이성(河北省)의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으로 진출하였으며, 25년 제2대 태종(太宗:재위 1123∼1135) 때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서하(西夏)와 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이후 금은 새롭게 등장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손을 들고 만다.

사진2. 내몽고 울란호특 시, 칭기즈칸 사당 광장에 서 있는 칭기즈칸 동상 앞에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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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칭기즈칸

몽골이라고 하면 칭기즈칸을 떠나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몽골은 원(元) 제국이 명나라에 망하고 현재의 내몽골과 외몽골 지역으로 후퇴해서 북원(北元)을 세워서 견디다가 청에 복속되었다. 청의 지배를 받다가 1911년 독립을 쟁취하나, 1920년 외몽골은 소련에 내몽골은 중국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외몽골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있다가 1990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자유국가인 몽골공화국이 되어 우리나라와도 1990년 3월 26일 수교를 하였으며, 내몽골은 중국의 내몽고 자치구가 되어 있다. 12세기 칭기즈칸이 몽골의 제 부족을 연합하여 몽골제국을 세우면서 사실상 몽골의 역사는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1990년 한국과의 수교이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와 접한 이르쿠츠크와 브리야트 공화국 수도인 울란우데를 경유하여 울란바타르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칭기즈칸은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오랜 소련 공산 위성국가에서 잠을 덜 깬 듯했으나,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거리에는 자동차가 넘쳐나고 드디어 한국이라는 존재를 실감하는 듯했다. 동시에 칭기즈칸의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한참 동안 망각이나 하고 있는 듯했고, 오히려 우리 같은 방문자들이 칭기즈칸을 들먹이면서 반복해서 칭기즈칸을 노래하듯 화제에 올렸다. 레닌 동상은 심지어 울란바타르 호텔 앞에 서있었고, 브리야트 공화국의 울란우데 시내 한 판에도 서있었다. 내가 만난 분들은 거의가 지식인들이었고, 대통령 특별보좌관들과 국립대학과 과학원의 학자들이었다. 서서히 칭기즈칸의 존재를 인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울란바타르 시내 한 복판인 수하바르트 광장의 정부청사에 칭기즈칸 동상을 세우고 그 밖의 지역에도 동상을 세우기 시작했다. 외몽골 보다 내몽골은 1940년대인 국민당 정부 시절에 이미 칭기즈칸 사당과 능을 세운 것을 보면 칭기즈칸의 존재에 대해서 일찍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몽골은 몽골의 고문자를 버리고 키릴문자로 전환했지만, 내몽골은 지금도 몽골의 고문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누구인가를 알아보자.

이치란 박사
몽골불교대학교 부총장
해동경전어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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