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ttimes.org

맑고 밝고 아름답게(news and article)

* 잦은 질문    * 찾기

현재 시간 2018-01-18, (목) 11:28 pm

댓글없는 게시글 보기 | 진행 중인 주제글 보기

모든 시간은 UTC - 8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글쓴이 메세지
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1-24, (화) 8:26 am 

가입일: 2016-11-29, (화) 5:42 am
전체글: 427
사진1:몽골제국이 성립되기 전의 서하(西夏)의 영토범위(요나라, 서하(녹색부분), 송나라).
mogol2-1.jpg

사진2:몽골제국의 판도(14-17세기)
mogol2-2.jpg

사진3:티베트 불교의 수장에게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부여한 북원의 알탄 칸 왕(1507-1582)
mogol2-3.jpg

티베트의 장전불교가 원 나라에 수용되기 전에, 티베트 불교는 서하(西夏)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칭기즈 칸은 서하를 점령하면서 장전불교와도 만나게 된다. 먼저 서하를 좀 소개해 보자. 서하(西夏1038-1227)는 중국 북서부의 간쑤 성(甘肅省), 칭하이 성, 산시 성(陝西省),신장 동남부 내몽골 외몽골 일부지역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이다.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 사막, 남으로는 난주, 동으로는 황허, 서로는 옥문(玉門)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부족에 속했으며 국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인 서하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서하는 백고대하국(白高大夏國)이라고도 불렀다. 중국문헌에서는 이들을 당항(党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의 건국 왕인 이원호(李元昊 1038–1048)는 불교 보호 왕으로서 둔황 막고굴 사원에도 많은 시주를 했다고 한다. 2백년간의 왕업(王業)은 칭기즈칸을 만나서 무너지게 되었는데, 칭기즈칸 군대는 중원을 공략하는 첫 대상으로 이곳 서하를 선택했다. 칭기즈칸은 무려 네 차례에 걸쳐서 서하를 공략하고, 칭기즈칸은 끝내 1227년 서하 땅에서 죽고, 서하 또한 칭기즈칸의 아들들에게 의해서 멸망당했다.

서하의 주류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는 탕구트족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 한전(漢傳) 대장경을 번역할 정도로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서하의 불교는 티베트의 장전불교와 중국의 한전불교나 선종불교(禪宗佛敎)가 섞인 통(通) 불교적 성격이 강했다. 탕구트 사회의 불교는 요나라인 거란족이 신봉했던 불교와 비슷했다고 한다. 많은 불서(佛書)가 거란어에서 번역됐다고 한다. 서하 사회는 중원이나 티베트 문화보다는 중국의 북방계 민족에 더 가까웠다고 하는데 티베트 불교는 서하의 초기에는 탐험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후에 티베트의 사캬파보다는 까르마 까규파의 전통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티베트불교에는 4개의 종파가 있는데, 닝마파(Nyingmapa), 가규파(Kagyupa), 사캬파(Sakyapa)와 겔륵파(Gelugpa)가 그것이다. 여기에 조낭파와 티베트 고유 종교인 본교를 포함해서 지금은 대개 6개 종파라고 한다. 닝마파는 가장 오래된 종파로서 인도에서 온 파드마삼바바(Padmasambhāva)와 산타락치타(Śāntarakṣita)라는 대학승이 창종한 종파이다. 파드마삼바바는 연화생상사(蓮華生上師)라는 칭호를 갖고 있으며 부탄과 티베트에 딴뜨라 불교를 전했고,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파의 라마들은 홍모(紅帽)를 착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 파의 경전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른다.

가규파는 명상위주의 종파로서 가장 유명한 스승은 티베트 출신인 밀라레파(Jetsun Milarepa(1052–1135)이고, 이 파의 라마들도 홍모를 착용하지만, 나중에 흑모파도 생겨난 바 있다. 이 파의 경전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까르마 가규파는 두썸 켄파(དུས་གསུམ་མཁྱེན་པ་1110–1193)로부터 유래하는데 그는 까르마파의 제1세 조사이다. 이 파는 가규파의 지파인데, 흑모(黑帽)를 착용하기도 한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1360-1424)는 제5세 까르마파에게 흑모를 하사한바 있다. 까르마 가규파의 법통은 지금 제17세에 이르고 있다. 사캬파는 1073년에 창종되었고, 홍모를 착용하고 경전은 신역이라고 부르는데, 이 파를 발전시킨 분은 사캬 판디타(Sakya Pandita 1182–1251)이다. 이 파는 불교학문을 중시 여긴다. 전회(원나라의 불교-1)에서 소개한 바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 같다.

다음은 겔륵파이다. 달라이 라마는 바로 이 겔륵파 소속이다. 겔륵파는 개혁성향의 종파이며, 불교논리학과 토론을 강조한다. 겔륵파는 종가파(Tsongkhapa 1357–1419)에 의해서 창종되었다. 종가파는 학행일치(學行一致)를 강조했다. 이 겔륵파의 정신적 수장을 간덴 트리파(Ganden Tripa)라고 불렀고, 종가파로부터 연유하는 자체의 정신적 수장인 간덴 트리파의 법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102대까지 이르렀다. 임기는 7년이다. 이 간덴 트리파는 달라이 라마와는 다른 개념이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몽골 제국의 칸이 부여한 전세활불(轉世活佛:세상을 바꾸어서 환생하는 부처)의 의미가 있다. 겔륵파는 황모(黃帽)를 착용하며 신역(新譯)에 속한다. 계승된 달라이 라마는 신정(神政)의 지위로써 17세기 중반부터 1959년 까지 티베트를 통치했다. 현재 제14세 달라이 라마는 1950년에 신정의 최고 수장에 올라서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밖에 사캬파에서 갈라진 조낭파(Jonangpa)가 있었으나 1658년 겔륵파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이 조낭파는 닝마파 가규파 사캬파와 더불어 겔륵파의 독주에 반발하고 티베트 동부 지역인 지금의 중국 청해성 사천성 감숙성 더 나아가서 몽골지역까지 일종의 초 종파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리메(Rime)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최근 14세 달라이 라마는 조낭파의 수장인 제 9대 젭춘담바 쿠투쿠의 취임식에서 조낭파의 성장을 격려했다. 젭춘담바 쿠투쿠는(Jebtsundamba Khutughtu,1932–2012)는 제8대 젭춘담바 쿠투쿠였던 몽골의 신정 왕 복드 칸의 환생이다. 티베트 불교전통에서 정신적 지도자로서 서열 3위에 해당한다.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젭춘담마 쿠투쿠이다. 젭춘담바는 겔륵파의 법맥에 의한 몽골 불교의 수장이다. 1936년 몽골의 신정 왕으로서 카간이었던 복드 칸의 환생이 확인되었지만, 1990년 까지 비밀에 붙여졌다가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불교 종파는 아니지만, 티베트 고유의 민속 종교인 ‘본’교가 있다. 하지만 불교의 다른 종파와 더불어 불교의 한 종파로 인정되었다. 이 본교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기로 하고 다시 원나라 불교로 돌아가 보자.

중국불교는 한당(漢唐) 시대에 크게 발전하였고, 송(宋) 시대에 이르면 중국적인 불교가 정착할 정도로 불교는 중국식 불교로 안착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북방유목민족인 원(元)나라가 건국됨으로써, 중국의 종교계도 엄청난 변화와 요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조(宋朝)가 비록 원나라가 들어서고서도 1279년까지 존속했고, 요나라 금나라가 원이 건국되기 전부터 있어왔지만, 결국 송은 원에 의해서 망하고 중국 천하는 몽골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전회(前回)에서 쿠빌라이 칸과 티베트 라마승과의 관계를 소개했지만, 이 무렵 장전불교(藏傳佛敎)는 중국 땅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한족(漢族)인 중국불교학자들이나 일본 한국 등의 중국불교 전공자들은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불교를 크게 주목하지도 않고 좌도밀교니 진언 주력불교니 해서 과소평가해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원나라 시대의 장전불교는 막강한 종교적 파워를 행사하고 있었다.

원나라의 원(元)자는 한족 출신의 한 대신(大臣)이 주역의 건괘(乾卦)에서 건원(乾元)에서 인용하여 건의해서 대원(大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원 왕조 왕실의 왕족 이하 공경대부는 거의가 장전불교를 신앙했으며, 티베트 라마를 존경하고 사원을 건립하는 등, 티베트 장전불교에 심취했다. 왕실에서는 건원사(乾元寺), 용광화엄사(龍光華嚴寺)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라마가 되도록 했다. 원나라가 송을 멸망시키고 원조(元朝) 천하가 되면서 특히 장전불교는 최고조에 달했다. 선정원 지원28(1291)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사원수가 2만4천여 개, 승니(僧尼=남녀승려) 수가 2만1천3백 명이라고 했는데, 사원수가 승니의 수 보다 더 많을 정도로 불사(佛寺)를 많이 건립한 것이다. 원나라 중기인 14세기 초가 되면 승니 수는 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불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왕실에서는 장전불교가 크게 신장했다고 할지라고, 중국에는 이미 한당송(漢唐宋)과 요금(遼金)을 거치면서 한전불교(漢傳佛敎)와 중국불교인 선종(禪宗)이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선종은 조동종(曹洞宗)과 임제종(臨濟宗) 선사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금나라 태조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청으로 만송 행수(萬松行秀:1166-1246)선사는《종용록(從容錄)》을 저작했으며, 그의 제자인 해운인간(海云印簡:1202-1257)선사는 쿠빌라이 칸에게 설강(說講)도 하고 전계(傳戒)를 내리기도 했다. 조동종 선사들이 주로 중국 북쪽 지방에서 활약했다면 남쪽 지방에는 임제종이 세력을 얻고 있었다. 남방의 임제양기파의 운봉묘고(雲峰妙高1219-1293)선사는 쿠빌라이 칸(세조)의 부름을 받고 가서 선교율(禪敎律)을 변론했으며, 고봉원묘(高峰圓妙1238-1295)는 고봉고불(高峰古佛)로 지칭되고, 중봉명본(中峰明本1263-1323)은 원대의 유명한 선사들이다. 선종이외에도 화엄, 천태,자은,율종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원나라 시대에는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등과 문화교류가 활발했다. 지금의 중동지역인 페르시아에는 일 칸국(Ilkhanate)이 세워졌는데,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인 훌라구 칸이 중동 원정을 통해 1255년에 건설한 이후 이슬람 화하여 약 1세기가량 존속했다. 페르시아 칸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335년 9대 칸인 아부사이드 칸 사후 사실상 쇠퇴해서 멸망됐다. 일한 칸국은 처음에는 샤머니즘과 불교가 국교였다가 1295년부터는 이슬람이 국교가 되기도 했다. 이슬람이 국교가 된 배경에는 인도에서 불교가 무슬림 군대에 타격을 입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전파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다시 원나라로 돌아와서 원 나라 불교를 살펴보자. 밀교는 중국 원나라에도 전파되어 오늘날 중국 내몽골 외몽골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원나라 시기에는 티베트 불교가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른바 탄트릭 불교를 말한다. 탄트릭은 밀교라고 하는데, 밀교는 비밀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문자 언어로 표현된 현교(顯敎)를 초월한 최고심원(最高深遠)한 가르침을 말한다. 중국의 불교에서는 밀종(密宗)이라고도 한다. 밀교는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하는데, "밀교"와 "금강승"이라는 두 낱말은 티베트 불교와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밀교하면 티베트 불교의 상징이 되어있다. 또한 밀교는 힌두교의 영향이 깊게 스민 불교이기도 하다.

중국에 밀교가 들어 온 것은 수당시대(隋唐時代)이다. 다라니(陀羅尼)가 예로부터 조금씩 중국으로 전해졌으나 인도 날란다사 대학의 학승(學僧)이었던 선무외(善無畏)의 원명은 슈바카라싱하(Śubhakarasiṃha637-735))이다. 그는 인도로부터 중국에 밀교를 전한 유명한 역경승(譯經僧)으로 그는 당 현종 때(716년) 장안에 와서 밀교를 전하면서《대일경(大日經)》을 번역했다. 720년에는 날란다사 대학의 학승인 금강지(金剛智)인 바즈라보디(Vajrabodhi 671-741)는 당나라 시대의 불교승려이자 밀교 경전의 역경자인데《금강정염송경(金剛頂念誦經)》을 번역했고, 그의 제자 불공금강(不空金剛) 삼장은 원래 이름은 아모가바즈라(Amoghavajra705-774)이고 밀교의 제6대조이다. 이처럼 원나라가 건국하기 전부터 인도의 밀교는 이미 중국 땅에 들어와 있었다. 인도에서 직접 또는 서역을 통해서 들어온 중국의 밀교와 티베트에서 전해진 장전불교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른 것이다. 앞에서 서하에는 티베트의 장전 불교가 들어왔고, 원 나라에서의 장전불교를 이미 설명 한 바 있다.

원나라는 망했지만, 원나라에 전해진 테베트의 장전불교는 북원(北元)으로 함께 밀려가게 된다. 명나라 주원장에게 중국 천하를 내 준 원나라는 원래 몽골족의 선조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으로 물러나서 북원을 세웠다. 티베트의 장전불교 또한 함께 갔음은 당연하다.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정신적 지도자 서열은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젭춘담바 쿠투쿠(복드칸)이다. 달라이 라마는 대승불교에서 자비보살인 아바로키데스바라(Avalokiteshvara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며,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그리고 제3 서열인 복드 칸은 몽골과 관련이 있다. 먼저 차례로 알아보자. 이런 사전 지식이 없으면 달라이 라마 제도와 현대 티베트 불교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제1세 달라이 라마는 겐둔 드룹(Gendun Drup 1391–1474)이며 그는 사후에 제1세 달라이 라마로 추존(追尊)된 분이다. 이 분은 목동 출신이었는데 지금 서장(西藏) 자치구 시가체시에서 네팔 가는 방향으로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나탕 사원에서 라마가 되었고, 후에 주지가 된 분이다. 나탕사원은 우장 지역에서 네 번째 큰 사원이다. 제2세 달라이 라마는 겐둔 갸쵸 팔장(Gendun Gyatso Palzangpo 1475–1542)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그가 제2세 달라이 라마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는 네 살 때 1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공포되었다. 1세나 2세의 전기(傳記)를 소개하려면 내용이 상당히 길다.

제3세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갸쵸(Sonam Gyatso,1543–1588)로서, 그에게 처음으로 ‘달라이 라마’란 칭호가 부여된다. 이 칭호는 1578년 몽골국의 통치자 알탄 칸(Altan Khan)이 소남 갸쵸에게 부여했다. 알탄 칸 자신이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이 환생했다는 것을 소남 갸쵸가 선포해준 선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소남 갸쵸는 비로소 달라이 라마가 되고, 제1세와 제2세 달라이 라마는 사후에 추존됐다. ‘달라이 라마’ 칭호는 이렇게 몽골 통치자의 정략적 필요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제3세 달라이 라마인 소남 갸쵸는 2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라고 선택된 다음, 라싸에 있는 유명한 드레 펑 사원(Drepung Monastery)에서 판첸 소남 드락파(Panchen Sonam Dragpa1478-1554)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한다. 판첸 소남 드락파는 겔륵파 전통의 정신적 지도자인 제 15대 간덴 뜨리파(수장)였다. 겔륵파 소속으로는 3개의 사원 대학이 있었는데, 드레 펑 사원은 그 중 하나였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 된 판첸 소남 드락파는 겔륵파를 창시한 종가파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1539년 ‘툴쿠’라고 하는 화신(化身)으로 즉위한다. 판첸 소남 드락파는 2세와 3세의 스승이었고, 계속해서 판첸라마 환생의 법맥을 이어가게 된다.

이제 간단히 정리하면 ‘달라이 라마’란 칭호는 몽골 제국의 후예인 알탄 칸이 부여한 칭호이며, 판첸라마는 2.3세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 환생한 서열 2위의 지위로 보면 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지난 90년대 인도 다람살라에서 링 린포체라고 하는 꼬마 라마가 한국에 온 것을 알 것이다.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에서 일종의 스승의 개념인데, 상사(上師) 또는 화상(和尙)이란 의미 정도다. 큰 스님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때로는 재가(在家) 린포체도 출현하기도 한다. 링 린포체는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라마가 환생한 분이다. 티베트 불교의 서열 2위인 판첸라마의 환생 맥은 현재 중국본토에서 이어지고 있다.

제3세 달라이 라마가 명실상부하게 탄생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몽골 국의 알탄 칸과의 관계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이후, 소위 황금가지 출신인 왕족이 아니면 몽골의 통치자가 될 수 없었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이후 몇 개의 칸 국으로 나누어지고, 칭기즈칸 막내아들인 툴루이의 아들이었던 쿠빌라이가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이 되면서 중국과 몽골지역에 대원제국(원나라 世祖)을 세웠다. 몽골제국은 1206년부터 1368년까지 존속하다가, 한족(漢族) 출신으로 한 때 승려였던 주원장이 원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세워서 몽골의 잔존세력을 몽골고원 사막 북쪽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알탄 칸이 등장할 때 까지 몽골제국은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가 알탄 칸에 의해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다시 몽골제국인 원을 세웠는데, 이를 북원(北元)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황금가지 직계인 쿠빌라이 후손이었지만 몽골 국민들은 확실하게 믿어주지 않았다. 이런 문제가 항상 북원을 통치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능력 있는 장군으로서 여러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다스려서 북원을 세워 권태중래의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황금가지에 대한 불신으로 민심을 얻는데 다소 장애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칭기즈칸의 황금가지라고 증명하는 어떤 극적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는 정통성 입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티베트 불교의 고승으로부터의 황금가지 정통성을 증명하는 의식이 필요했다. 알탄 칸은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종가파가 창종한 겔륵파를 선택하고, 당시 겔륵파의 수장인 소남 갸쵸를 몽골 고원에 초청하여 국민들에게 법문을 내려달라고 했다. 소남 갸쵸는 알탄 칸이 쿠빌라이 칸의 환생임을 선포했고, 알탄 칸은 소남 갸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전임의 두 분에게도 제1세와 제2세의 달라이 라마 칭호를 추존했다. 알탄 칸의 통치는 중국 북부 지역을 비롯해서 티베트까지도 영향력이 미쳤던 것이다.

이에 앞서서 알탄 칸은 1569년부터 소남 갸쵸를 초청한 바 있었으나, 소남 갸쵸는 응하지 않다가 티베트 밖의 나라에서 통치자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데에 측근들과 인식을 같이하고 또 알탄 칸으로부터 티베트 불교의 포교를 허용한다는 조건 제시에 1571년 사절단을 몽골에 보내서 탐색토록 했다. 하지만 당시 몽골의 현실은 너무나 북방 민족으로서의 야수성에다가 동물살생을 밥 먹듯이 하는 등, 생명경시와 고위층의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사절단은 이런 풍습을 중단하고 동물 살생을 자제하는 등의 조건을 내세웠지만, 알탄 칸은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끝내 소남 갸쵸 겔륵파 수장이 직접 와야 한다는 강한 요청에 의해서, 별로 긴 여행을 내키지 않은 소남 갸쵸를 측근들이 설득하여 1577년 몽골을 방문하여 권위를 맞교환 한 것이다.

이후 알탄 칸은 황금가지로서의 신분을 확실하게 인정받고 통치하다가 1582년에 서거 했다. 소남 갸쵸는 제3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여 신정에 가까운 권위가 부여됐다. 1585년에 다시 몽골에 와서 몽골 국의 왕자들과 부족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는데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제3세 달라이 라마는 명나라로부터도 중국에 남아있는 몽골 족을 위하여 콜(초청)을 받는 등 주가가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3세 달라이 라마는 명나라 방문을 앞두고 1588년 45세의 나이로 몽골에서 티베트로 돌아가는 길에 입적하게 된다. 티베트는 몽골과 지리적 교통로가 뚫려있었다.

당나라 때도, 당번고도(唐藩古道)라고 해서, 지금의 사천성 지역이 아닌 청해성의 시닝(西寧)을 지나서 청장고원(靑藏高原)을 넘어 토번(吐藩 티베트)의 서울 라싸로 갔던 것이다. 당나라 때, 문성공주가 송챈 감포 왕에게 시집갈 때도 이 당번고도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 3세의 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다만 제4세 달라이 라마는 알탄 칸의 직계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제4세 달라이 라마 욘텐 갸쵸(Yonten Gyatso 1589–1617)는 몽골에서 태어났으며, 제3세 달라이 라마의 측근들에 의해서 제 3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이런 사실을 티베트에 통보하고 욘텐 갸쵸를 옆에서 보호하게 된다. 욘텐 갸쵸는 알탄 칸의 증손자뻘이 된다. 욘텐 갸쵸는 10세 때인 1599년 티베트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고, 티베트와 몽골은 더욱 가까워지면서 티베트 불교는 몽골 지역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제 4세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도착해서 겔륵파의 수장에 의해서 제4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고, 드레 펑 사원 대학에서 제4세 판첸 라마의 제자가 되어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되면서 1614년 구족계(비구계)를 받는다. 그리고 나중에 드레 팡 사원의 주지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티베트인들은 그가 몽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616년 동굴사원에서 특별 수행정진을 하다가 1617년 27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역대 달라이 라마 가운데 가장 막강했던 제5세 달라이 라마로 환생하게 된다.

제5세 달라이 라마 때부터 달라이 라마는 명실상부한 신정의 지위에 오른다. 롭상 갸쵸(Lobsang Gyatso, 1617-1682)인 제5세 달라이 라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내란에 휩싸인 중앙 티베트를 통일시키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독립국으로서의 티베트 주권을 확립하고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유럽의 탐험가들도 만나 주어 견문을 넓힌 분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대(大) 제 5세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가 붙는다. 제5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와 신정의 왕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40년간 종교와 행정수반으로서 통치했다.

티베트의 장전불교는 서하와 원나라를 거치면서 그리고 북원 시대에 몽골지역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오늘날 몽골불교가 티베트의 장전불교의 전통으로 확립된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치란 박사
몽골불교대학 부총장


상위
   
 
이전 게시글 표시:  정렬  
새 주제 게시글 주제글에 댓글 달기  [ 1 개의 게시글 ] 

모든 시간은 UTC - 8 시간 으로 표시합니다


접속 중인 사용자

이 포럼에 접속 중인 사용자: 접속한 회원이 없음 그리고 손님 1 명


이 포럼에서 새 주제글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그 주제글에 댓글을 달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서 당신이 게시한 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포럼에 첨부파일을 게시할 수 없습니다

찾기:
이동:  
cron
POWERED_BY
Free Translated by michael in phpBB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