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불교 -3 / 버마와 실론의 불교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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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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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미얀마 불교 -3 / 버마와 실론의 불교교류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29, (일) 4:21 am

버마와 실론의 불교교류

사진1:아난다 사원: 빠간 왕조의 캰지따 왕(재위 1084-1113)이 1105년에 건립한 사원으로 현재까지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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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301.jpg (118.37 KiB) 407 번째 조회
미얀마라고 부르기 전에는 버마라고 했는데, 미얀마의 공식 국호는 미얀마 연방 공화국이다. 행정수도는 양곤에 있다가 몇 년 전에 중부지방인 네피도(Naypyidaw)란 신생 도시로 이전했지만 경제 사회 문화 중심도시는 양곤이다. 1989년 이전만 하더라도 버마라고 불렀는데, 인구 분포 상 버마족이 70%를 차지한데서 기인했지만, 현재는 미얀마가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를 논할 때는 오히려 버마라고 호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샨족이 10% 중국계가 3%인데 이들도 대개 불교도이다. 이렇게 보면 미얀마 인구 80% 이상이 불교도이다. 이밖에 카렌족(7%) 인도계(2%) 몬족(2% 불교) 친족, 카친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미얀마어이지만, 소수 민족은 자기들의 말을 갖고 있다. 종족을 세분하면 100종족이 넘는 소수 민족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실제로 미얀마에 가보면 미얀마가 ‘미얀마 연방 공화국’이라는 나라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버마족은 티베트 고원에서 평야지대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으며 언어는 시노-티베트(중국-티베트)계통의 티베트-버마어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고, 타이-카다이어, 오스토로-아시아틱과 인도 유럽어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법상 공식적인 국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불교가 다수이기 때문에 불교국가나 다름없을 정도로 태국과 마찬가지로 상좌부(테라와다) 불교의 종주국이다. 하지만 소수종교이긴 해도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전회에서 빠간왕조 시대의 불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소개했고, 이번 회에서는 실론과의 관계를 집중해서 살펴보자. 11세기부터 빠간 왕조가 들어서면서 불교 또한 급속하게 수용되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버마 전체로 봐서는 이미 전설상으로는 기원전부터 불교가 하 버마 지역에 전해졌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이미 7세기가 되면 하 버마에는 남인도와 실론에서 전해진 상좌부 계통의 불교가 상당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미 빠간 지역에도 동인도 지역에서 대승불교 특히 밀교성향의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빠간 왕조는 몬 지역의 상좌부를 수용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실론과의 접촉을 시도하게 된다. 몬족의 불교를 추적하다보면 원조가 인도와 실론인데 11세기이면 인도에는 이미 불교가 쇠퇴할 때이다. 자연스럽게 실론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삼장(경율론)이 주된 이유였다. 몬족은 이미 상좌부 빨리어 삼장을 몬족의 언어로 역경을 해서 가지고 있었으나 어딘지 완벽성을 결여하고 있어서 실론과의 접촉을 시도하게 된다. 이 무렵 실론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불교 승가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사진2:인도양의 몬순 계절풍을 이용하여 실론과 버마사이에 불교교류를 했다. 지도상에 보이는 인도 실론 버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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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이지만, 기원후 7-8세기에 이르면 동부 인도의 대승불교인 밀교성향의 불교가 실론에 들어오게 된다. 물론 상좌부가 대세였지만, 밀교성향의 불교가 들어와서 ‘닐라빠따다르사나’ 라고 하는 신생 종파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 파의 승려들은 청색의 가사를 입고 술도 마시고 여자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은 다소 변칙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동부 인도와 버마나 남부 중국지역에 까지 이 파가 확장되는 추세였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나중에 이 파의 승려들은 추방되고 승가가 청정해졌지만, 11세기가 되면 승가는 다시 혼란 속에 놓이게 된다. 이런 차제에 버마와 실론은 불교를 매개로 접촉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실론이나 버마의 사서(史書)는 11세기 이전의 양국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이 없다. 소위 버마의 빠간의 아나와라하따(Anawrahta 1014-1077)왕 이전에는 특별한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나와라하따 왕을 아누루다 왕이라고도 호칭했다. 하지만 실론과 하 버마 사이에는 특별한 정치적 관계는 없었지만 종교적인 교류는 지속되고 있었다. 실론은 10-11세기 남인도의 공격과 지배로 혼돈 속에 빠졌고, 정치적으로도 왕권이 약해지고 불교 승단 또한 어지러웠던 모양이다. 실론의 사서인《쭐라왕서 Cullavamsa 小史》에 따르면 실론의 비자야바후(Vijayabahu 1065-1120) 1세 왕이 많은 선물과 함께 사절단을 빠간의 아누루다 왕에게 보냈다. 남인도의 쫄라 왕국의 침입에 구원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에 빠간의 아누루다 왕은 많은 선물을 여러 배에 실어서 보냈으나 군대는 보내지 않았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전회에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아누루다 왕은 쉰 아라한의 자문을 받아서 하 버마인 따톤의 상좌부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실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빠간은 이 무렵 부와 평화를 누리는 최대 융성 기간이었다. 하지만, 실론은 정치적으로 매우 곤경에 처한 시기이다. 비자야바후 1세 왕은 겨우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서 정신을 차리자 불교 승가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왕궁의 사원을 정상화하려는데 비구계를 줄 비구가 부족할 정도로 승가가 허물어져 있었다. 비구계를 주려면 다섯 명의 비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비자야바후 1세 왕은 아누루다 왕은 하 버마의 라만나(따톤)에서 비구와 삼장 등을 보내달라고 했다.

아누루다 왕은 버마를 통일했지만, 아직은 빠간에는 상좌부 불교가 하 버마와는 다르게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누루다 왕은 하 버마의 상좌부를 빠간에 빠른 속도로 이식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실론에도 22명의 비구들을 보내는 등, 실론 승가의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등, 실론 불교 또한 급속도로 정상화되면서 빨리어 학습이 복원되는 등 양국은 그야말로 상좌부 불교 전통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실론은 비구계를 줄 비구가 극소수였지만, 빨리어 학습에 의한 교학의 전통은 버마보다도 더 역사가 오래고 학자 층이 두터웠기에 빠간의 상좌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양국이 불교로 긴밀해지자 버머 왕은 실론의 불치(佛齒)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론 왕은 모조품을 만들어서 보냈다.

사진3: 미얀마 국립교학대학 교수님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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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루다 왕은 평소 하 버마인 따톤에서 온 삼장(三藏)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네 명의 학승을 실론에 보내서 아누라다뿌라의 마하비하라(大寺)에 소장하고 이는 빨리어 삼장을 베껴 오도록 했다. 아누루다 왕은 기원전 아소카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가 구송전통에 의해서 전해온 빨리어 삼장이 정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하 버마의 따톤(몬족)의 삼장을 신뢰하지 않았다. 배 두 척으로 각각 삼장과 불상을 싣고서 실론에서 버마로 왔는데, 배 한 척은 침몰하고 한 척의 배는 무사해서 결국 실론의 정통 삼장을 고스란히 이송해 와서 빠간에 봉안하게 되었다. 버마 불교를 이해하려면 실론과의 교섭사를 먼저 이해해야한다.

해동영한 아카데미 원장
이치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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