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불교7 / 식민통치와 영국의 불교학자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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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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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실론불교7 / 식민통치와 영국의 불교학자들-1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22, (일) 12:49 pm

사진1:스리랑카 지도

사진2: 스리랑카 국기

사진3:스리랑카 국가문장

사진4:영국 불교학자 리즈 데이비드 (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

사진5:영국의 불교학자 리즈 데이비드 여사(Caroline Augusta Foley Rhys Davids (1857–1942)

실론불교를 연재하면서, 실론불교는 인도불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흡사 한국불교가 중국선불교의 원형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할까. 15여 년 전, 중국 숭산 소림사를 갔을 때 처음 느낀 소감은 한국불교의 고향에 온 것 같은 것을 단박에 감지할 수 있었다. 네 차례 정도 소림사를 가봤지만, 항상 그런 한국불교의 향수 같은 것을 그곳에서 느꼈다. 그만큼 지금의 한국불교는 역으로 중국선종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증좌일 것이다. 중국에 있는 절이라고 해서 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중국의 선종사찰에 갔을 때 그렇게 느낌이 크게 다가왔다. 내가 남방불교 가운데 태국불교를 먼저 접했는데, 한국불교와는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태국을 가기 전에 대만불교를 보니 어느 정도 한국불교와 유사성이 있었다. 하지만 태국불교는 전연 다른 환경이었다. 그런데 실론에 가니, 실론 불교는 태국불교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실론불교의 모습에서 뭔가 인도불교의 원형 같은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태국불교와는 또 다른 어떤 특이한 인도적인 향취가 있었다. 내가 수 천 년 전의 인도불교의 원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실론불교는 태국불교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실론에는 현재 3개의 주요 부파(종파)가 있다. 실론의 부파에서는 근현대 실론불교의 역사와 질곡을 엿볼 수 있다. 3개 파 가운데 두 개 파는 버마에서 한 개 파는 타이(태국)에서 법맥을 이어와서 승가를 재건했다. 말하자면 승가가 해체되었다가 다시 소생한 것이다. 이런 아픈 상처를 간직하게 된 것은 유럽열강의 식민지 확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또한 실론불교가 서구에 알려진 것도 이들 유럽의 인도 실론 식민지식인들의 연구와 관심 때문이었다. 식민지식인이란 유럽에서 이주해온 지식인을 말하는데, 이들은 자국의 식민지에서 활동한 관리나 학자들이다. 본국을 위해서 식민지의 제 분야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 필요한 기본 자료가 필요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식민지의 언어 역사 문화 종교와 자연자원 등에 관한 연구와 조사였다. 물론 개중에는 좋아서 관심이 가서 이런 연구를 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극소수였을 것이고, 본국 정부나 식민지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서 시행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고 난후 조선식민지에서 일어났던 식민지 정책은 다 유럽열강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행해졌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실론이라는 무대로 눈을 돌려보자.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이 공식 이름이다. 스리랑카는 식민지 시절에는 실론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도 간단하게 실론이라고 호칭하자. 실론은 남아시아에 있는 섬나라이며 법률상의 수도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이고, 제일 큰 도시는 콜롬보이다. 인구는 2천 만 명 정도 되고, 국민 다수는 싱할라족이며 언어는 싱할라어이다. 인도 남부에서 이주해 온 타밀어를 사용하는 타밀족도 10% 가량 된다. 스리랑카는 고대 인도인들에게는 ‘랑카’ 또는 ‘싱할라’ 라고 알려졌으며,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타프로바네’, 아랍권에서는 ‘세렌디피티’(운 좋게 우연히 발견)라고 불렀다. 포르투갈인들이 1505년에 도착해서 영어식 표현으로 실론(Ceylon)이라고 했다.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가 되어서도 실론으로 불렀다. 1948년 독립이 되고서도 한동안 실론으로 호칭했다. 1972년부터 스리랑카로 부르게 된다.

실론에서의 첫 왕국은 아누라다뿌라 왕국으로 기원전 377년부터 시작된다. 불교는 데와낭삐야 띠싸(250-210 BCE) 왕 때,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의 아들인 비구 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기원전 247년경에 공식적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실론 불교사에서는 그전에 불교가 이미 전해졌다고 한다. 이로부터 실론 불교는 지금까지 2천3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나라 불교가 1천 7백년 중국불교가 약 2천년인데, 불교발생지인 인도 다음으로는 실론불교의 역사가 길다고 하겠다. 중세시대에는 버마와 시암 인도네시아 등지의 동남아에 불교를 전파해주기도 했다. 이러다가 16세기부터 실론 불교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유럽 열강의 식민지 개척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은 1505년에 실론 섬을 발견하고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 불교의 나라를 약탈하고 강점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1517년에는 콜롬보의 해안에 요새를 설치한다. 다음은 해안가 지역부터 야금야금 점령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자, 1세기를 견디다가 아무래도 이들이 물러갈 것 같지가 않자 싱할라 사람들은 실론의 내륙인 캔디라는 지역으로 옮겨가서 이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론의 해안가에서 가까운 저지대의 사람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되자,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이들을 싫어하게 되고 어떤 세력이든지 와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네덜란드의 무장 선장이 1602년에 실론 땅을 밟게 된다. 캔디 왕은 이 네덜란드의 무장 선장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캔디 왕은 1638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을 몰아내는 조약을 맺는다. 포르투갈은 실론의 해안지대와 저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캔디 왕은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몰아내주기를 바랐는데, 네덜란드는 야수로 돌변해서 무역 전매권을 달라고 하면서 캔디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신교(新敎)였기에 포르투갈의 구교(舊敎)를 박해하자 구교신자들은 모두 떠나고 불교 힌두 무슬림만 남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보다 더 세금을 무겁게 과세했다. 1659년 브리티시 선장 로버트 녹스란 사람이 실론 땅에 발을 디뎠고, 그는 다른 16명의 선원과 함께 캔디 왕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19년간 잡혀 있다가 탈출해서 잡혀있는 동안의 기록을 남겼다. 브리티시는 이 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지배시기에 네덜란드인과 실론 현지인 사이에 혼혈족이 생겼는데, 이런 유산은 지금도 시기민지였던 인도 실론 등지에서 볼 수 있다.

나폴레옹과 영국의 전쟁기간, 영국은 네덜란드가 실론 섬의 일정 지역을 프랑스에 넘길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면서 네덜란드로부터 일정 지역을 1802년 넘겨받아 직할 식민지로 삼는다는 조약을 맺는다. 1803년 브리티시는 캔디 왕국을 공격하지만, 격퇴당하고 제2차 캔디 전쟁인 1815년에 캔디 왕국을 무너뜨리고 실론이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직할 식민지로 손에 넣고 약 150년간 통치하게 된다. 1815년부터 브리티시 실론시대가 전개 된 것이다. 캔디지역의 농민반란 등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브리티시는 커피, 차, 고무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특히 실론티(tea)는 많은 이익을 안겨주는 인기 품목이었다. 더 많은 차 생산을 위해서 인도 남부 지역의 타밀족을 이민시켰는데 실론 인구의 10%가 되었다. 이들은 반노예처럼 일했다. 브리티시 또한 반 유럽인인 혼혈족을 좋아했고,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1833년에는 실론 출신들에 의해서 자치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1909년까지는 실행되지는 않았다. 실론인의 항의데모에 의해서 1931년에야 선거권이 도입되고, 그나마 평민들은 투표권이 없을 정도였다.

실론 불교사는 16세기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한국불교사가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박해받고 유교에 종교주류 자리를 내주었듯이, 실론은 기독교에 자리를 내주고 시달리기 시작한다. 200년 정도 시달리다보니 실론 불교는 거의 아사직전이 되었다. 비구계를 줄 수 있는 전계사(傳戒師)가 없을 정도로 승가가 허물어져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 네덜란드 통치시기를 거치면서 최악의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그나마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가 되고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지금 스리랑카에는 세 개의 주류 종파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시암 니까야(部)이다.

웰위따 사라난카라(1698-1778)라고 하는 실론 스님의 주선으로 시암(태국)에서 우빨리 비구가 1753년에 캔디 왕국을 방문해서 키리티 스리 라자싱헤 왕(재위1747-1782)을 알현하고 일단의 캔디의 사미들에게 구족계(비구계)를 설해줘서 계맥(戒脈)을 이어가게 만든다.

시암 니까야 파는 두 개의 주류파가 있는데, 말와따(Malwatta)와 아스기리야(Asgiriya) 사원이 본산이고, 이 두 파안에는 5개의 분파가 있다. 이 두 파는 각각 각 파(宗)의 수장인 마하 나야카(首長=종정)를 두고 있다. 이 두 파의 사원이 1년 단위로 또는 6개월 단위로 돌아가면서 캔디 왕궁에 모셔져 있는 불치사(부처님의 치아사리)의 의식(儀式)을 집전하고 있다. 말와따파 소속이 약 5천개의 사원과 1만 5천명의 비구가 소속되어 있다. 아스기리야 파에는 6백 개의 사원과 1천 5백 명 정도의 비구가 소속되어 있고, 그밖에 나머지 다섯 개의 지파에 200여 사원과 1천 5백 명 정도의 비구가 소속 되어 있다. 그러므로 실론승가에서 시암 니까야 소속은 7천여 개의 사원과 2만 여명의 비구가 소속 되어 있는 제1종단이다. 다음은 아마라뿌라 니까야인데 1800년 버마에서 계맥을 이어왔다. 아마라뿌라는 버마의 옛날 수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통치시기에 두 번이나 계맥이 단절되었는데, 18세기 중엽, 시암의 비구 우빨리 장로에 의해서 시암 니까야가 재(再) 창종 되면서, 실론의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고비가마 카스트만이 입종(入宗)할 수 있도록 출가를 제한했다. 이 계급은 농부 계급인데, 당시에는 토지가 중요했기에 농부들이 주류 계급이었던 것 같다.

이 농부 계급에 속하지 않았던 계급은 자기들의 사원에서 비구계를 설했지만, 시암파에서는 계율상의 하자가 있다고 하면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수산업 계통에 종사하던 큰 부자가 후원을 해서, 버마에서 새로운 계맥을 이어올 사원을 찾게 된 것이다. 1799년 살라가마 카스트 출신인 왈리토타 스리 그나나위말라띠싸가 일단의 살라가마 계급출신들의 사미승들을 이끌고 버마로 향했다. 살라가마 계급은 계피를 재배하고 군인 계급이면서 주로 실론의 남부 지역에 살고 있었던 계급이다. 당시 버마 왕은 대환영을 하면서 버마의 승왕(종정)에게 직접 비구계를 받도록 한 것이다. 시암 니까야가 왕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아마라뿌라 니까야는 일반 재가의 후원자와 연결되어 있으며, 실론 중산층의 후원을 받고 실론 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보다 대사회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종단이다. 산하에는 21개의 지파가 있으며, 소속 사원은 확실하게 파악은 안 되지만 1천개의 사원과 1만 명 정도의 비구가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제3종단이라고 할 수 있는 라만나 니까야 파가 있는데 1864년에 버마에서 수행하고 돌아 온 암바가하와Ep 사라난카라 비구 장로가 창종했다. 이 파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명상을 위주로 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는데, 실론의 세 파 가운데서는 교세가 약하지만, 수행은 잘하는 것으로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이제 실론 식민지 시대에 불교에 관심을 가진 영국 불교 학자들을 소개해 보자. 시인이면서 저널리스트인 아널드 에드윈 경에 대해서 전회(前回)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지금 소개하려는 리즈 데이비드(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는 빨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1881년에 창립한 분이다. <빨리텍스트회>를 일본 사람들이 <빨리성전협회>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기에 명칭이 굳어졌다. 그는 젊어서 폴란드에서 산스크리트를 배우고 영어선생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선 실론으로 가서 남쪽 갈레 지방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승가법(僧伽法)과 관련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빨리어를 알아야만 문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1871년에는 고고학위원회로 발령을 받아서 아누라다뿌라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불교가 인도에서 처음으로 실론에 전해진 초전법륜지(初傳法輪地)로 아주 역사적인 곳이었고, 993년부터 폐허가 된 곳에서 비문과 사본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이 내용을 정리해서 로이얼아시아틱소사이어티 저널((Ceylo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Journal)실론 분원 메거진에 기고했다.

그는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실론비문과 경전 번역내용이 막스 뮬러가 편집한《동방성서》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발행되었다. 리즈 데이비드는 1882년부터 1904년까지 런던대학 강사로 근무했다. 1905년부터는 맨체스터 대학에 비교종교학과장이 되었다. 리즈 데이비드 교수는 영국에서 상좌부 불교와 빨리어 연구와 보급에 힘을 쏟았고, 영국 정부에 빨리어 산스크리트는 영어와 같은 인도 유럽어족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관심과 예산지원을 호소했다. 리즈 데이비드는 1894년 유명한 빨리어 학자인 오거스타 폴리와 결혼하여서 부부는 평생 《빨리성전협회》를 운영하면서 빨리어 삼장을 영역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이치란 박사
WFB 태국본부 집횅위원
WFB 세계불교대학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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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추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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